Prologue

그가 만약 스위스에 없고 국내에만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도 핸드볼이란 종목이 있구나'의 일대 '발견' 차원을 뛰어넘어 한국 남자 구기 대표팀 최초로 메달까지 거머쥐었던 88올림픽 남자 핸드볼 팀…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던 강재원…
축구의 차범근, 배구의 김호철 이후로 처음 유럽 무대에 진출했던 강재원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스포츠 팬이 얼마나 될지…
'독일의 차붐, 이태리의 킴, 스위스의 캉'…
한국 구기 스포츠 '환상의 삼각 편대'이자 유럽 무대의 선구자들…
그 중에서도 강재원의 존재 만큼은 아직까지도 철저히 베일 속에 가려있다. 어쩌면 핸드볼이란 스포츠 자체도 두터운 '방음벽 속의 녹음실' 만큼이나 빛과 갈채로부터 차단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한국 구기 스포츠는 여자 선수만 육성하고 투자해야 된다' 는 항간의 지적에 일침이라도 놓듯, 강재원이 뛰었던 88올림픽 남자 핸드볼 팀은 말 그대로 '밥값'을 하고도 남았던 그런 팀이었다.
핸드볼이 아이스 하키와 함께 유럽 최고의 겨울 스포츠란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위스의 한 투어 가이드까지 'Korea' 하면 'Kang' 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핸드볼 감독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 정도로 전문적인 질문 공세를 펼쳐대는 유럽 기자들의 전문성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강재원에 대해 이토록 무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10년 넘게 유럽에서 한국의 이름을 한국 핸드볼의 이름을 PR하고 돌아온 강재원은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핸드볼러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고 안간힘 쓰고 있다.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럽 최고의 무대 스페인 리그에서의 1년을 꿈꾸고 있다.
오늘날의 강재원을 만들어준 것은 그 만의 '승부욕'이요 '도전 정신'일 것이다.
한국 남자 핸드볼 슈퍼스타 계보는 참으로 찬란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지만 그들 모두 '강재원이 없었더라면..' 이란 의혹엔 수긍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올림픽 은메달 이후에 변변한 실업 팀 하나 없어 결국은 우리의 핸드볼 자산들을 모조리 외국으로 몰아내야 했지만, 결과적으론 '프로 축구 선수의 임대냐, 이적이냐…' 와 같은 일대 파문 없이도 선진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던 '속 편한 진로'가 된 셈이기도 하다.
강재원의 바닥과 정상.
"시야가 넓어 수비가 좋고 슛 감각이 뛰어난 타고난 핸드볼 선수.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동방에서 온 환상의 선수.
핸드볼의 마라도나"
사실 핸드볼이라는 종목은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상대를 제치고 나아가기 위한 현란한 발놀림은 축구와도 같아야 하고, 볼을 손으로 다루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농구의 볼 터치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어깨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야구에서 말하는 강한 어깨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상대방 위로 뛰어올라 고공에서 슛을 내리 꽂을 수 있는 배구의 점프력, 순발력, 유연성 등 소위 운동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항목에 능해야만 핸드볼의 달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핸드볼을 시작한 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재원이 핸드볼을 시작하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당시 키만 삐죽 크고, 비쩍 마른 체질이기에 그의 건강을 염려하신 부모님은 운동을 권하셨고, 그는 이후 약 30년 간 그와 함께할 핸드볼을 처음 시작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체격 조건이 이유 하나.
게다가 여타 운동 선수들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핸드볼만 죽어라 한 게 아니라, 여러 운동을 병행했다고 한다.
육상, 높이뛰기, 배구, 농구 등 그의 큰 키를 활용할 수 있는 가지가지 종목의 운동을 모두 즐겼고, 이런 다양한 종목의 포식은 핸드볼이라는 종목의 특성 상 후에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기초 섭득이 그 이유 둘.
그리고 운동 신경 자체가 천부적이었으니..
자유 자재로 덩크슛을 구사할 수 있었고, 높이뛰기는 경기도 신기록 보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으로 같이 배구를 하던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잘 생긴 외모로 잘 알려진 최천식 선수..
강재원의 말을 빌자면, 당시의 최천식은 '그저 키만 큰 채, 수비 때 블로킹하러 들어가던 선수'로,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의 선수였다니.... 천부적인 운동신경이 이유 셋.
또 그의 성격적 요인을 들 수 있다.
다양한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기에, 그를 데려갈려는 종목은 많았지만, 그는 결국 핸드볼을 택했다. 자신의 몸과 상대 선수의 몸이 직접 맞부딪히는 운동을 선호하는 것, 탁월한 인내력 등. 그의 성격적 요인이 이유 넷.
이런 숙명적인 요인 덕분인지, 부천중, 부천공업고등학교 시절 서순만 감독의 엄격한 지도하에 열심히 자신을 단련한 그는 각종 대회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인 1981년, 당시 최연소 나이로 대표팀에 발탁되게 된다.
하지만, 그 어떤 천재라도 '시련'과 '노력'이라는 두 단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재원의 시련은?
그 첫번째가 강재원이 중학교 2학년 때이다.
강재원의 큰 키와 유달리 큰 손(그 때 야구공 3개를 한 손에 쥘 수 있었다고 한다)과 핸드볼로 단련된 좋은 어깨를 눈여겨 본 야구 명문 동산중 감독은 투수를 해보길 권하고..
매일 맞으며 핸드볼을 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 그는 그것을 수락, 동산중 야구부의 투수로 발탁되어 연습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었는지, 아무런 다른 훈련 없이 한 구석에서 공 잡는 손가락 위치만 바꾼 채로 죽어라 공만 던지는 것이 지겨워서 2주만에 그만두고 다시 핸드볼을 시작했다고 한다.
두번째 시련은 그의 대표팀 발탁 이후 찾아온다.
최연소로 발탁된 그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다.
1981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는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모두 대회 장소로 떠난 이후 홀로 귀향하게 된 것이다.
무척 부끄럽기도 하고, 어머니나 동네 분들 볼 낯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천재는 이러한 시련의 극복으로 만들어진다.
그러한 자신의 체력 부족을 이기기 위해 엄청난 개인연습을 하며 자신을 단련했고, 아시아 선수권 대회가 끝난 후에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자마자,
全 핸드볼 선수가 참가한 불암산 달리기에서 2등을 기록,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그 이후 12년간, 한국 남자 핸드볼을 강재원의 활약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세번째 시련. 유럽의 벽.
직접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선수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지만, 한국 사람의 체격 조건으로 신장과 체력으로 그들과 맞서는 것은 쉽지 않다. 혹자는 거기에서 낙담하고 포기하게 되고, 혹자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강재원은? 유럽 선수들을 이길 수 있는 방안은 단 하나, 점프력을 키우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점프력을 키우려고 나름대로 운동을 열심히 했고, 그 결과 월등한 점프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한창 때는 유럽의 2m 넘는 장신 수비수들 위로 손 하나 정도 더 올리고 점프슛을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워낙 고등학교 때부터 탁월한 기량을 내세운 강재원을 영입하기 위해 각 대학교에서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성균관대에서는 그의 선배들을 동원했고, 한국체대에서는 학교 신설을 약속했으며, 지방의 명문 원광대 또한 그를 잡으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강재원의 선택은 동료 3명과 같이 진학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경희대.
그 후 강재원은 국제 대회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열린 83 아시아 선수권 대회부터 교체멤버로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보이코트로 운 좋게 참가했던 LA 올림픽에서, 남자 핸드볼 대표팀이 11위를 기록할 당시부터 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골 랭킹 3위.
그 이후는 단순한 파장의 수준을 넘어섰다.
1985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는 60여 골이라는 당시 주니어 선수권 대회 신기록을 세웠고,
1986년 세계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는 최고 득점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 핸드볼 남자 대표팀으로서도 그렇고, 그의 인생에서 역시 전환점이 된 86 스위스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그는 단순하게 한 번 반짝하고 마는 별이 아니라 더 환하게 빛날 자질이 있는 선수임을 입증했다.
한국 대표팀으로서도, 다져진 팀웍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이 바로 이 때 쯤으로, 누구도 선보이지 못했던 빠른 고공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스카이슛 등 어디에서든 시원하게 슛을 날리는 한국 팀 만의 경기스타일을 창출해낸다.
당연히 동방의 작은 나라의 멋진 게임에 스위스 팬들은 매료되고, 한국의 에이스 강재원의 이미지는 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다.
당시 첫 게임은 최강팀 아이슬랜드.
강재원은 그 시합에서 13골을 기록, 팀의 6골차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그 이후 계속되는 시합에서도 선전, 8, 9위 전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대회 베스트 7 선정, 종전 기록인 65골을 능가하는 기록인 66골으로 대회 득점왕 수상.
이렇기에 86 아시안 게임의 우승은 내정된 일인지도 모른다. 피를 깎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86년 아시안 게임에서 남, 녀 핸드볼 대표팀은 일본, 중국에 이은 만년 3위의 탈을 벗어버리고 동반 우승을 거두고, 최고의 활약을 보였던 강재원은 인기인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88 올림픽 기적의 은메달. 남자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의 쾌거.
이런 열매는 너무나도 달콤하지만, 그 이전의 쓰라린 인고의 세월은 사실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강재원을 비롯한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쓰라린 인고의 2년은 어떠했을까?
6시 기상, 그 이후 바로 12분 달리기가 실시된다.
히딩크 감독 등이 실시한 축구 국가대표팀의 훈련으로도 잘 알려진 이 테스트는, 그 전날의 기록보다 단 1cm라도 더 못 나간다면 바로 감독, 코치님께 꾸중을 듣게 되는 혹독한 테스트다.
8시에 아침 식사하고 10시부터 12시까지 운동을 하게 되고,
점심식사 後 3시부터 6시까지 운동을 한다.
그리고 저녁식사 後 미팅(비디오 분석) 등이 벌어지고 과외로 열심히 웨이트.
그리고 태릉 선수촌 입촌자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유명한 '불암산 눈물고개 달리기'.
선수촌 근처의 불암산을 올라가는 눈물고개 조깅에서 항상 핸드볼 팀이 전체 500명 중 20위 내에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육체적인 강훈이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바로 비인기 종목 선수라면 언제나 겪게 되는 설움이라고 해야 하나?
또한 어떻게 피할 수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 역시 그들을 압박해왔다.
당시 핸드볼 남자 대표선수의 월급은, 선수촌에서 주는 월급 8만원, 그리고 핸드볼 협회에서 주는 10만원의 수당.. 해서 한 달간 총 18만원의 박봉으로 생활(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38만 5천원. 통계청 소비자 물가지수 의거)을 유지해야 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상효(교사로 재직 중)를 제외하면 그들에게 과외의 보수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수단도 없었던 상황. 그러니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히, 올림픽 상위 입상자에게 주어지는 '연금 획득'이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제로 떠올랐고, 그런 현실적인 요인까지 포함되어 핸드볼 대표 선수 모두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훈련했다고 한다..
그리하야 역사적인 88 서울 올림픽은 개막되고.. 대외적으로 남자 핸드볼 대표팀은 세계 5위를 목표로 삼았다.
당시 남자 핸드볼은 A, B조 2조로 나뉘어 조 1위는 결승전, 조 2위는 3, 4위전에 진출하는 형식의 2조 풀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의 실력으로는 솔직히 버거운 상대인 러시아, 유고슬라비아, 동독, 헝가리 중 러시아와 유고슬라비아는 다행히 다른 조에 편성되게 되었고..
한국은 바로 前 세계대회에서 2위를 기록한 강호 헝가리, 그리고 동독, 스페인, 일본, 체코와 함께 예선 B조에 소속되게 되었다.
수원에서 열린 1차전은 강호 헝가리.
하지만, 홈 이점을 안은 한국은 항상 맨투맨 마크가 따라붙는 강재원, 이상효 등의 활약으로 시종 일관 3, 4골 차이로 리드하며 결국 22 : 20으로 승리를 거둔다.
모두가 버거운 상대이긴 하지만, 헝가리를 물리친 이상, 단순 구도로 봤을 때 한국의 결승 진출이 걸린 시합은 바로 2차전인 對 동독戰.
19 : 21로 뒤지고 있는 가운데 김재한의 페널티 스로우가 성공, 20 : 21 한 점 차이로 스코어 차이를 줄이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종료 3분을 남기고 박도헌의 슛으로 동점을 만든 한국은 몇 번의 슛 실패 이후, 종료 1분 19초 前 박도헌의 페널티 스로우로 22:21로 앞서나간다.
하지만, 31초 남기고 통한의 페널티 스로우 허용으로 동점..
시합 종료까지 31초 남은 시점에서 한국은 마지막 공격권을 쥐게 되고..
경기 종료 4초 前, 한국 남자 대표팀의 패스는 왼쪽부터 오른쪽 사이드에 있는 강재원에게 이어졌고, 모두의 열망이 담긴 그 상황에서 강재원은 장거리 슛으로 역전 골을 성공시켜, 스탠드를 열광에 몰아 넣었다.
동독戰 결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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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k 동독戰 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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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는 운도 따르며 승승장구했다.
한국 남자 대표팀은 앞서다가 종료 직전에 동점을 허용하나, 종료 10초 前 상대의 범실을 틈타 얻어낸 공격권에서, 시계가 멈춘 상황에서 페널티 스로우를 성공시키며 극적으로 체코를 23 : 22로 물리쳤고, 또한 일본을 연파하며 4연승을 거두게 된다.
체코戰 종료 10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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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마지막 경기인 對 스페인戰.
이기면 자력으로 결승 진출이 가능한 상황에서 아쉽게도 한국 대표팀은 20 : 23으로 패하나, 동독이 헝가리에 17 : 18로 패하는 덕분에 운 좋게도 B조 선두로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10월 1일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발 디딜 틈 조차 없을 만큼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A조 선두 최강 소련과의 시합.
한국 남자 대표팀은 최선을 다했지만, 누구 보다도 월등한 소련을 상대로 경기 내내 5, 6골 차이로 끌려다니다 결국 25:32로 패배하고 만다.
아쉽지만 누구도 '아쉽다'란 말을 내뱉을 수 없는 자랑스런 은메달 획득.
이렇게 강재원은 그 자신의 꿈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자신의 꿈을.
그의 진정한 핸드볼 선수로서의 꿈은 '유럽에서 뛰는 것'이었고,
그의 마지막 소망을 이루기 위해 마침내 강재원은 '한국에 실업팀이 생기고, 자신을 불러 주기만 하면 언제라도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외국에서의 비상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핸드볼의 마라도나'
2001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한국 남자 대표팀 선수 中 해외 진출 중이거나 해외 진출이 확정된 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윤경신, 조치효, 박성립, 백원철, 조범연, 이석형, 최현호, 김성헌.
선수 대부분이 해외 진출 선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아마 어떤 종목도 이렇게 많은 해외 진출 선수를 보유한 대표팀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말 그대로진정한 핸드볼 판 한국의 '드림 팀'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이런 핸드볼의 '海外進出'에 강.재.원.이란 이름 석자를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기억하고 있는가? 한국 핸드볼 사상 최초로 바다를 건너 진출한 …
바로 12년 前 스위스로 건너간 "핸드볼의 마라도나 강재원"을 말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43골을 넣으며, 일약 팀을 2위로 이끌었던 강재원의 명성은 1989년 여자팀의 김현미와 함께 세계 핸드볼 협회에서 뽑은 "올해의 선수"가 되면서 더욱 더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185cm-75kg의 약간 마른 듯하지만 군살 없는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플레이들 - 2미터代의 수비수들 위에서 내리 꽂는 강타, 현란한 스텝-인(Step-In)에 이은 점프 슛, 예측 불가능하며 탄환같이 빠른 패스, 상대방의 패스를 미리 예측하는 천부적인 코트 비전(Court-Vision)-은 이 동양계 라이트 이너(Right-Inner)를 모두들 스카우트 리스트의 1순위에 올려놓게 만들었다.
강재원에 대한 외국 클럽의 구애는 끈질겼다.
이미 84년 올림픽에서 득점 3위를 기록한 이후 계속된 강재원에 대한 스카우트는 88년 올림픽이후 최고 정점에 도달했는데,
독일 분데스리가 (축구 뿐만 아니라 핸드볼에서도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이다)를 비롯해서, 오스트리아-스페인 등 각국의 명 클럽에서 그를 향해 스카우트 제의를 하게 된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경우 당시 세계 핸드볼 연맹의 회장인 오스트리아인 어윈 란츠 회장이 강재원의 오스트리아 행을 강력하게 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국 남자 선수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던 '병역 문제'가 세계 진출의 항상 걸림돌이 되어 왔고, 여기다 한국 남자 핸드볼의 간판인 그가 해외로 빠져나가면 곧 있을 실업 팀의 창단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도 문제였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강재원이 이끌던 한국팀의 86년 아시안 게임 우승과 88년 올림픽 은메달 획득은 강재원의 군 문제 해결 및 그가 한국 핸드볼을 위해 봉사할 만큼 했다는 우호적인 기류를 만들게 된다.
국내 실업팀의 창단이 계속해서 늦어진 것도 '전성기'의 강재원에게는 참기 힘든 일이었을 뿐더러 핸드볼로 밥벌이를 해야 했던 그에겐 'IMF' 나 마찬가지였다.
핸드볼의 해외진출. 그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었고, 그 누구도 당시까지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 하자면 '비인기 종목 중에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로도 해외 진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이었다.
1989년 강재원은 결국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혼자서만 살겠다고 실업 팀에 남지 않고 해외로 도망간다는 '왕자병'이 아닌, 이제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는 아내와 갓 태어난 맏이를 한국에 남겨두고도 한국 핸드볼의 활로를 뚫고, 세계 최강 핸드볼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유럽 선진 핸드볼을 몸소 체험하기 위한 일생일대의 도박과 꿈의 실현을 노크하기 위해서 말이다.
강재원은 당초 처음부터 스위스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FC 바르셀로나나 분데스리가의 레버쿠젠에서 사전에 영입 요청 (레버쿠젠의 경우 거의 성사 단계였으나, 언론에 노출되면서 실패한 전례가 있었다) 이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의 클럽에서 몇 개월 머물다 세계 핸드볼의 총아인 분데스리가로 옮긴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강재원은 스위스 클럽인 그라스호퍼에 가는 것과 동시에 분데스리가 클럽과 가계약 (분데스리가의 외국인 선수 쿼터는 2명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강재원을 다른 팀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가계약을 맺어 놓은 것이다)을 한 상태였었다.
강재원이 스위스에 도착한 날이 정확하게 1989년 10월 11일.
불과 며칠 뒤 강재원은 모든 스위스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그가 임시로 머물 예정이었던 스위스 취리히를 연고로 하는 그라스호퍼(Grasshopper)팀은 10개 팀이 뛰던 스위스 리그에서 3위에서 5위를 오르내리던 중위권 팀.
하지만 강재원은 여독이 아직 풀리지도 않았을 스위스 도착 3일째 열린 그라스호퍼와 스위스 대표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혼자 14골을 넣는 활약을 하며 31-24로 소속팀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190대 이상의 신장이 즐비한 스위스 대표팀의 수비진 위에서 터지는 날카로운 왼손 슛에 유럽 내에서도 결코 약체가 아니었던 스위스 대표팀이 자국의 일개 클럽팀에게 져버리는 '이변'이 벌어진 거다.
이어서 벌어진 리그 개막전에서도 강재원은 무려 12골이나 퍼붓는 대활약을 펼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한편 전년 시즌 3위에 불과했던 그라스호퍼팀이 난데없이 나타난 강재원의 활약으로 대표팀을 꺾어 버리자 모든 현지의 언론 등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게 된다.
손타이그자이퉁 紙는 "동방에서 온 환상의 플레이어"로 묘사했으며,
스위스 TV의 한 스포츠 쇼의 진행자는 그를 "핸드볼의 마라도나"로 소개했다고 한다.
이런 강재원의 활약에 고무된 그라스호퍼팀은 강재원의 독일 行을 극구 말리며 매우 좋은 조건으로 다시 계약할 것을 제안했고,
강재원 역시 자신의 핸드볼 인생을 가장 크게 빛나게 했던 86년 스위스 세계 선수권 (강재원이 당시 기록했던 66골의 기록은 90년대 말 윤경신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불가침의 득점 기록이었다)과 왠지 조용하면서도 편안한 그리고 시합장에서는 열렬한 스위스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결국 독일 팀과의 가계약은 그라스호퍼측에서 위약금을 물어주는 것으로 해결됐고,
이후 강재원은 11년간의 긴 '스위스 성공시대'를 시작하게 된다.
강재원이 그라스호퍼 팀에 끼친 영향은 국내 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1989-90, 90-91, 91-92 3년 연속 득점왕과 함께 3년 연속 리그 우승.
구단 사상 최초로 유럽 컵 8강 진출.
그라스호퍼의 팬이나 구단 관계자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특히 강재원 특유의 사람을 이끌어 내는 카리스마는 자신 이외의 선수들이 공수에서의 허점을 드러내지 않도록 지도하게 됐고, 선수들 입장에서도 팀의 에이스의 지시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의 말대로만 하면 팀은 계속 이겨나갔으니까.
또 구단에서도 이런 강재원에게 팀 지도까지 맡아달라고 할 정도로 그라스호퍼의 강재원에 대한 신뢰는 실로 대단했다. 결국 1991-92시즌 그라스호퍼 측에선 정식으로 강재원에게 플레잉 코치로 뛰어 줄 것을 강재원에게 제안했고,
강은 그런 구단에게 그에 합당한 연봉을 제시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재정이 빈약했던 그라스호퍼에선 강재원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없었으며,
이에 강은 다음 시즌 이적을 하겠다고 발표하게 된다.
3년간의 그라스호퍼 시절이 끝나자 그에게는 세계 최고의 선수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유럽 리그 적응이란 부수적인 메리트까지 붙게 된다.
비록 스위스 리그였지만 3년 연속 득점왕과 3연패를 이끌어낸 에이스 플레이어가 다음 시즌 자유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스위스 리그의 팀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파리, 리옹, 스페인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독일의 분데스리가 팀들 등 수많은 스카우터들이 다시 한 번 동양에서 건너온 핸드볼의 마라도나를 가질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강재원이 결정한 팀은 의외로 스위스 리그의 파디 빈터투어(Pfadi-Winterthur)클럽이었다.
빈터투어라는 스위스의 공업 도시에 있는 팀으로 소속사인 빈터투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험회사. 따라서 재정적으로도 안정된 팀이고, 91-92시즌 강재원의 그라스호퍼에 밀려 2위를 할 정도로 팀의 능력도 어느 정도 있는 클럽이었다.
여기다 빈터투어라는 도시 자체가 매년 옐로우 컵이라는 국제 대회를 열 정도로 핸드볼 열기가 아주 뜨거운 도시였으며, 실제로 빈터투어에는 파디 빈터투어 말고도, 옐로우 빈터투어라는 라이벌 팀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다 빈터투어 보험 회사의 회장인 슈펠티 회장이 직접 그의 스카우트에 뛰어들었으며, 스위스를 제 2의 고향이라고 생각했다는 점도 강재원이 더 좋은 리그가 아닌 스위스의 파디 빈터투어로 이적을 결심하게 된 원인이었다.
그라스호퍼 팀에서 3년간 "가장 뛰어난 메뚜기"로 활약했던 강재원이 파디 빈터투어와 계약한 금액은 월봉 600만원과 한국 대표팀 참가 시 필요한 3개월의 휴가 및 1500만원에 이르는 유급 보너스. 물론 강재원 가족에 대한 모든 보험 처리 및 고급 자동차, 아파트가 제공됨은 기본이었다.
그라스호퍼에서 월급 480만원을 받았던 강재원으로선 만족할만한 대우였다.
다만 스위스 리그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던 일이었다. 전년도 1위 팀의 선수가 2위 팀으로 말을 갈아탔으니 말이다. 마치 루이스 피구가 FC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옮긴 것처럼...
파디 빈터투어 클럽으로 옮긴 강재원은 이후 기대대로 팀을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게 된다.
데뷔 시즌이던 92-93 시즌 마지막 우승팀을 결정 짓는 중요한 경기에서 17대 17 상황에서 페널티 스로우를 미스하며 팀의 패배와 자신의 득점왕 획득 실패라는 뼈아픈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 후부터 파디 빈터투어의 팬과 구단 관계자들은 이 '13번의 동양인 선수'에게 절대로 실망하는 일이 없게 된다. 13번의 코트의 황제…
(후에 강재원은 23번으로 자신의 등번호를 변경했다).
파디 빈터투어에서 강재원은 92-93, 94-95, 95-96, 98-99 시즌에서 리그 MVP를 받았으며, 그 동안 팀은 무려 5번 연속 우승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11시즌의 스위스 리그 경력 중 모두 9번의 우승. 그 중에서 6번을 파디 빈터투어에서 이루게 된다.
파디 빈터투어 팀이 창단된지 60년이 다된 유서 깊은 팀인데도 불구하고, 강재원이 입단하기 전까지 리그에서 단 한 번 밖에 우승하지 못한 팀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파디 빈터투어의 팬들이 강재원이 있던 시절을 "黃金時代"라고 부른다 해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파디 빈터투어 팀은 강재원과 조치효(후에 강재원이 불러 들였다)의 '코리언 원 투 펀치'를 앞세워 팀 사상 최초로 96-97, 97-98시즌 챔피언 리그 4강 (유럽 축구와 같은 포맷), 98년과 2000년에는 스위스 컵 우승을 하는 등 유례없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실제로 파디 빈터투어 팀은 강이 입단한 후인 93-94시즌 처음으로 "Flyers"란 서포터즈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여기다 1999년 강재원이 미국 국가 대표팀 감독을 맡기 위해 미국 行 비행기를 탄 후
파디 빈터투어 팀이 3위로 미끄러지자 부랴부랴 팀에선 강재원을 다시 불러 감독 겸 선수로 계약한 후 2000-01시즌 맡기게 되는데
이 시즌동안 파디 빈터투어 팀은 리그 통합 우승은 물론 챔피언스 리그와 유럽 컵 우승까지 노리는 지점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강재원을 이렇게 성공하게 만들었을까?
무엇보다 강재원의 11년이란 긴 세월동안 이런 대활약을 거두게 된 것은 최고 선수라는 자긍심과 그에 걸맞은 혹독한 훈련량, 그리고 스위스 현지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유별났기 때문일 것이다.
강재원은 스위스에 처음 도착한 이후 스위스 음식에 적응하기 위해 일부러 한식을 꺼리고, 스테이크만 먹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강재원이 본래 유럽 진출의 이유 (한국 핸드볼의 활로를 뚫는다)를 잊고, 자신의 영달에만 매달린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강재원이 스위스 리그에 순조롭게 적응한 이후 조치효를 파디 빈터투어로 불러드린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이석형, 조범연, 윤경신 등 자신의 대표팀 후배들의 대부분이 유럽 무대로 진출하는데 직접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실례로 지금도 스위스에 있는 강재원의 자택은 유럽 진출을 노리는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몇 일씩 묵어가는 베이스 캠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강재원은 선진 핸드볼을 접촉하고, 이것을 한국에 전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9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대표팀을 지도한 것을 비롯해서, 스위스 리그에서 11년간 거구의 외국인 선수들과 대전해본 경험을 92년 올림픽 때까지는 현역으로, 95년에는 대표팀 코치로서 한국의 핸드볼 선수들에게 보다 실전적인 지식을 전수하게 된다.
1980년대 한국 남자 핸드볼의 신장이 180중반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얼마 전 열린 2001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대표팀에서 190cm이상의 남자 핸드볼 선수는 다음과 같다.
신장(cm)체중(kg)신장(cm)체중(kg)조치효19494박찬영19085김성헌19085윤경민19385이석형19797윤경신20395박성립19087최현호19388
이런 한국 핸드볼 선수들의 장신화, 대형화가 해외 진출 선수들이 몸으로 겪어서 얻어낸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일 강재원이 1989년 스위스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면 현재 세계 속에서의 한국 핸드볼의 위상은 어떻게 됐을 것인가?
현재같이 질적 양적으로 열악한 실업팀 환경 속에서 지금처럼이라도 한국이 핸드볼 종목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해외진출 선수들의 힘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맨 꼭대기에 한 선수가 있었음을 우리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강재원이 모국을 떠나 '알프스의 나라'에 둥지를 튼 이후, 우리 남자 핸드볼은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강재원이 기여한 한국 핸드볼의 도약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바다 건너 딴 나라'에서 들려오는 강재원의 전설 같은 실력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모범답안 강재원'
1964년 11월 30일,
경기도 부천에서 강석희 씨와 백승희 씨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강재원.
비록 그렇게 잘 알려진 운동 가족은 아니었지만, 하나 있는 형님이 축구를 좀 하셨고, 그렇게 가까운 가족이 공을 다루는 모습이 어린 시절의 그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뇌리에 깊숙히 박혔으리라 감히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각인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다른 운동 선수들같이 '천부적인 소질' 운운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그의 마르디 마른 몸 때문. 거기다 키마저 삐쭉 크기까지 했다니..
덕분에 어린 시절 그의 별명은 '개뼉다구'로 낙찰되었다고 한다.
러닝 훈련 중 항상 뒤에 개가 따라오면 무서워서 제일 앞으로 빨리 뛰어 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김성곤(지금은 사망)이라는 선배가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이런 어릴 때부터의 '개에 대한 공포'는 아직도 그의 뇌리 속에 깊이 남아 있어서,
감독 생활을 하는 지금에도 스위스 산악 지역을 달릴 때, 산책나온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면 무서워서 제일 앞으로 달려나간다고 한다.
그렇게 핸드볼 선수 생활을 계속 해나가던 강재원.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겠지만, 매일 20~30대씩 쏟아지는 살인적인 매 속에서도 유일하게 탈출 한 번 안 해본 선수는 부천중-부천공고 시절을 통틀어 강재원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미련스러울 정도의 인내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남들보다 더한 인내력에서 바탕이 된 노력과 천부적인 운동 신경이 결합되어 순탄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가던 강재원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게 되니..
고교 2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뛰던 강재원은1983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회가 끝난 후, 폐회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어디서 나타난 '여자애 2명'이 핸드볼 공을 들고 와서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당시 처음으로 사인 요청을 받아보기에 쑥스럽고, 거기다 자신이 그렇게 뛰어난 선수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자기는 그런 사인 같은 거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집요한 여학생들의 질문 공세는 계속되고, '사인 같은 게 없으면 주소라도 가르쳐 달라'고 물어보길래, 귀찮고 해서 '태릉 선수촌에 산다'라는 답을 하니 여학생들이 삐져서 가버렸다. 하지만, 이 짧은 만남이 강재원이 앞으로 평생을 같이 살 아내와의 만남이었으니..
인연은 계속 이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혹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