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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서야 이 상처의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통증은 여전하다. 이제야 그전 강진군 유격대장이나 박춘근씨의 고통을 알 것같다. 문계성군도 유사한 통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증상을 이번 전쟁에서 처음으로 '카우살기아'라고 명명하였다던가?
병원에는 빨치산 환자가 약 50명, 수용소에는 많은 포로들이 잡혀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조직적 활동을 한 빨치산의 최후인 것같다. 더러 개개의 인원이 흩어져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조직적 투쟁력으로서의 빨치산은 아니다. 이런 사태는 7.27.정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예견되었던 일이며 올 것이 온 것이다. 살아서 국경을 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던 나는 이제는 참기 어려운 통증에 괴로워하고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앞 일을 어떻게 슬기롭게 처리해 나가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지만 우선 이 무서운 통증으로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남태준씨가 잡혀왔다. 알 것도 같다. 진정한 공산주의자에게는 자살이란 있을 수 없다.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그의 최후를 주시해 보자. 양구열 소령의 부인이 고추장 단지를 가지고 찾아왔다. 만나고 보니 구면이다. 그녀는 내가 의전 재학 시 合含선생에게서 바이올린을 함께 배운, 말하자면 동문인 셈이다. 그 때 경북여고 4학년의 이뿌장한 소녀였었다.
전빈 모 송병례(나의 외할머니)도 다녀갔다. 빈 손으로 왔다가 영문 앞에서 돌아갔다. 손은채라는 소년도 잡혀와 있었다. 그는 9세때 부모와 함께 입산하였다가 홀로 살아남은 천애의 고아였다. 11-12세의 소년으로 자기 키보다 훨씬 긴 장총을 메고 용주동골의 승주군당에서 도실봉을 돌아 상봉 밑의 도다아지 연락을 다니던 대담한 소년이었다. 병원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면서 환자들이나 헌병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 주입된 교육은 민감하게 접수된 것같다. 빨래줄에 걸려있는 손수건이나 팬티를 가리키며 "저런 것도 다 미제라고 해요!" 산에서 남조선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배웠는데 과연 그 말이 진실이다,라는 의미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얼마후 그는 석방되어 장흥으로 아버지를 찾아갔었으나 영문 모르는 아버지는 대범하게 그를 대하였고, 그 후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 때 나는 전주 형무소에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디서도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다. 그는 13세 소년이 되어있었으나 행동이니 사상체계나 표정에서 입산할 때의 9-10세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산 생활이란 사회와 격리되어 있어서 나이를 먹어도 입산 당시의 의식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같다.
소년 말이 나왔으니 金永承의 언급을 않을 수 없다. 그는 15세에 입산하여 이제 19세가 된 어엿한 청년이었다. 함평 출신으로 영리하고 순진하고 명랑한 소년이었다. 간부들의 연락병을 두루 거쳤으며 이봉삼부대의 핵심으로 용감하게 싸웠다. 포로로 잡혀오니 그 역시 덩치 큰 어린이였으며 사회적 연령은 입산 당신의 15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군법회의에서 소년이라하여 무죄석방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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