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camille claudel

김선미 |2008.08.24 07:22
조회 969 |추천 1



까미유 크로델, 20세




1929년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에서 까미유,71세


 

 

까미유 끌로델(1864-1943)



그녀의 어린시절(1864-1881)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12월 8일 Fere 프랑스 페레에서 등기소 소장인 아버지 루이프로스퍼 끌로델 (Louise-Prosper Claudel)과 의사의 딸이자 마을 주임 사제의조카인 어머니 루이즈 아나타즈 레슬보(Louise-Athenaise Cervaux)사이 1남 2녀中 장녀로 태어난다. 그녀의 여동생인 루이즈(Louise)는 1866 년 2월 26일에, 남동생 폴은 1868년 8월 6일에 태어났다. 태어난지 2주일만에 죽은 아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녀의 부모는 '까미유'라는 양성(兩性)적인 이름을 지었다. 까미유의 어머니는 유독 막대 여동생 루이즈만 사랑했으며, 그러한 편애는 일생동안 계속된다. 반면에 까미유는 4살 아래인 남동생 폴과 (폴이라는 이름은 자살한 아저씨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가깝게 지내는데 폴은 훗날 시인이자 극작가로 이름을 떨친다. 1876년 까미유의 아버지가 노장 쉴 세느 (Nogent-sur-Seine)로 전근을 가게 되자 가족들은 그곳에서 3년을 지낸다. 어린시절부터 까미유는 이웃 숲속에 괴물같이 생긴 "제앵"이라는 바위에 매료되어 누가 부추긴 적도 없는데 타고난 감성과 열정이 그녀의 풍부한 영감과 놀라운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잠자는 일도 잊은채 흙반죽에 열중하게 된다. 작품의 영감은 나폴레옹 흉상, 비스마르크 흉상,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 기초한 조각등을 비롯하여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그 지방의 농부들로 부터 얻는다. 이시기에 주목해야 할 것은 까미유가 그때까지 제대로 데생과 조각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점이다.그녀는 단지 본능과 결단력이 이끄는대로 움직였을 뿐 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조각을 위해 폭군처럼 가족과 이웃 사람들 그리고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동원했다. 조각의 방법, 기술 등에 대하여는 무지하였으나 조각에 대한 고지식한 영감만을 이용하여 집, 나무, 그리고 화낸 얼굴등을 조각할 뿐이었다.

1879년경 이곳 노장 출신인 조각가 알프레드 부쉐(Alfred Boucher,1850-1934)는 그녀의 첫 조언자이자 조각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까미유의 아버지에게 까미유의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천부적 소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재능을 키워줄 것을 당부했다. 까미유는 17세가 되던 1881년 정식적인 조각수업을 받고자 파리로 가기를 원하는데, 당시 아버지는 저당권을 지켜야 하는 직업상의 이유 때문에 다시 와시 쉴 블레즈(Wassy-sur-Blaise)로 전근을 가게되자 결국 다른 가족들만 파리로 이사를 하게된다. 까미유의 아버지는 휴일에만 파리로 와서 가족과 함께 보냈었고 루이즈는 음악 학교에, 폴은 문학 수업을 위한 준비 과정에 들어갔다. 알프레드 부쉐는 까미유를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의 교장인 폴 뒤브와(Paul Dubois)에 소개하며 까미유의 다윗과 골리앗 습작을 보여 주었다. 교장은 매우 놀라며 그녀가 로댕에게서 수업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을 했다. 그러나 까미유는 그때까지 로댕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창작기(1882-1892)

그녀가 추구하는 목표는 뚜렸했다. 그러나 전문적인 예술 세계는 여성에게 거의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가장 권위있는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여학생들을 받지않았다. 이론상은 아닐지라도 현실에서는, 여학생들은 조각 작업실의 시쓸벅적하고 문란한 생활에 완전히 동참할 수 없었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클로델은 1881년 17살의 생일이 되기 전에 훌륭하긴 하지만 패쇄적인 사립학교 아카데미 콜라로 시에서 수업을 받으며 그곳에서 사귄 야심찬 젊은 여자 친구들과 함께 노트르담 데 샹에 공동 작업실을 마련한다. 그들에겐 영감을 불러일으켜줄 선배 여성 조각가가 없었다. 그런건 꿈도 꾸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예술의 세계를 뚫고 들어갈 능력이 있음을 확신했다. 알프레드 부셰는 정기적으로 까미유의 작업실에 찾아와 많은 충고를 해주었다.

1883년에 알프레드 부셰는 로마상를 받게 되어 오랫동안 이탈리아로 가 있게 되자 오귀스트 로댕(1840~1917)에게 노트르담 데 샹에 있는 작업실의 자신의 제자들을 대신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로마로 떠나게 된다. 까미유와 로댕이 처음 만났을 때 까미유는 19살의 생일이 되기전 이였고 로댕은 43살의 나이었다. 당시 로댕은 조각가로서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로댕은 끼유의 작품에서 자신의 조각과의 내적인 유사성을 느꼈다. 까미유가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알보고 그녀의 표현력에 감탄을 하고 얼마되지 않아 까미유에게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 한다.

1884년 부터 까미유는 로댕의 제자로 있다가 1887년 대학가에 위치한 로댕의 아틀리에서 제작 조수로 일하게 된다. 로댕의 작업실에 젊은 여조각가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였다. 그녀는 주위의 한가로운 잡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조용하고 말없이 자신의 일메만 열중하거나 점토를 반죽하고

앞에 놓여진 형태대로 손과 발을 만들 뿐이였다. 그 당시 로댕이 새로 만드는 장식 미술관의 주문으로 [지옥의 문]을 창작하고 있었는데, 까미유는 몇몇 지옥의 여인 모델이 되기도 하고, 몇몇 여인들의 손과 발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점차로 까미유는 로댕에게서는 없어서는 않될 공동작업자가 되고, 이 공동작업 시기에 그들 상호간의 창작에 대한 각자가 맡은 부분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아, 이때문에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의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까미유보다 24세 연장자인 로댕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까미유의 조숙함과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당시 예술사에서 흔치 않는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이후 까미유와 로댕사이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미묘한 갈등, 사랑을 겸험하게 된다. 1883년에 쓴 로댕의 에서 보인 불타는 정열의 편지는, 로댕이 그녀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정열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로댕과 까미유의 사람은 결코 쉽거나 간단하지가 않았다. 까미유와 로댕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사이의 미묘한 갈등, 예술가로서의 경쟁 그리고 작품에 대한 질투심등이 작용 쉽거나 간단치만은 안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로댕과 함께한 기간 중에 클로델도 작품을 더러 전시했으나 결코 세 점이상은 되지 않았다.

한편 까미유는 1888년 Portrait of Paul claudel 20세의 폴 끌로델과 루이즈의 초상화를 그렸다. 같은해 프랑스 예술가 살롱전에서 힌두교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사쿤탈라(Sakuntala- 마술에 걸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쿤탈라가 남편과 재회하는 모습)는 최고상의 영예를 얻는다. 로댕 또한 1883-1893사이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는등 많은 공적 생활을 하게 되고 이 생활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클로델과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했다. 지방출신인데다가 다리를 절어 불편했고, 예술계의 막후 거물들 중에서도 고작 '옷을 못입는 사람들' 만을 보았을 따름 이었다.

"나는 예술에 대한 이론적인 문제는 모릅니다."

스스로 단지 장인의 역할에 국한 시키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클로델은 예술적인 천재성은 개인의 내면에서 나오며 타고난 재능에 비례하여 인정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은둔 생활을 하며 작업하였다. 까미유는 로댕과의 관계를 어느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고 주위사람들에게 단지 로댕의 제자로만 인식 되어있었다. 로댕과의 성적인 관계가 타로나면서 클로델은 집에서 쫓겨났다. 클로델은 이시기의 상당기간을 이탈리아 가에 있는 허름한 빌라에 기거하면서 작업했다. 그녀는 때가 되면 자신의 재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리라고 확신하고있었다.

고독한 창작기(1893-1905)

1893년 부터 1905년 동안에는 까미유는 로댕의 그늘을 벗어나서 왕성하게 창작하는 시기다. 그때까지 로댕은 로즈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로즈를 그의 곁에서 떠나가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로댕과 로즈의 관계를 비난하면서 세점의 그림에서 독특한 개성으로 경멸감을 표현했다.

까미유는 1892년 경에 음악가 끌로드 드뷔시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그 둘은 예술가의 친선 모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까미유는 24살이었고 드뷔시는 26살로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까미유와 드뷔시를 연인으로 보는 것은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들은 서로 커다란,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느날 갑자기 까미유는 드뷔시와 헤어지고 후에 왈츠의 청동상을 드뷔시에게 주고 드뷔시는 죽을때까지 왈츠 상을 소장하였다.
1893년에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왈츠]가 전시되는데, 그녀의 개인적인 모든 예술의 특성이 표출되는 작품이다. 또한 예술가로서 까미유는 금전상의 문제보다 좀더 개인적인 탐구에 열정을 쏟는다. 1890년 부터 로댕은 벨기에의 예술가 모임의 관계자들에게 까미유를 그들이 전시회에 초대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4년후인 1894년에야 비로소 그녀는 전시회의 초대를 받는다. 1894년 살롱에 까미유는 세인의 주목을 끌만한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것은 1892년과1893년 두 해의 여름동안 아자이 르 리도 가까이에 있는 이즐레뜨성에 머물면서 여주인의 6살짜리 손녀를 모델로 한 작품 청동으로 만든 [어린소녀 샤틀렌느](La Petite chatelaine)의 초상으로서 가냘프지만 저열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어린 소녀상으로 나이가 어린데 비해 성숙해 보이고 무언가를 꿰뚫는 듯한 총명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모하르트는 그녀의 작품평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모양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화하고 확대시켜 더 깊은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접근하려했다"고 평했다.

1895년경부터 까미유는 로댕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녀만의 독창성을 나타내 보인다. 까미유의 작품은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많은 비평가들이 신문, 잡지등에서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1898년 까미유는 로뎅과 이별을 고한 뒤, 그들이 관계는 편지를 통하여 재연되었으며 까미유는 그에게 작신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손님을 대신 만나 줄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1897년 까미유 끌로델은 옥으로 만들어지 뜬 소문(Les Causeuses)을 샹 드 마리스의 살롱전에 출품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은 그녀에 대한 모멸 또한 부채질 했다. '이제 그녀에게는 물질적인 어려움은 없겠군'하고 말하며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수근 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틀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899년 까미유는 살롱전에 대리석올 된 클로토를 출품한다. 이것은 로댕과 까미유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까미유는 이 작품을 룩셈 부르크의 박물관에 전시하기를 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몇년이 지나도록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행방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로댕은 그 연유를 알기 위하여 모르하르트와 의논하였으나 사건은 점점 더 악화 되어갔다. 즉 , 까미유는 로댕이 이 작품을 훔쳐갔다고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까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을 도용했다고 하여 그에 대한 증오를 날로 쌓아갔다. 까미유의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적인 증오는 로댕이 죽은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1899년 까미유는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변경한다. 이곳에서 그녀는 정신병원에 들어가지 전까지 약 14년간을 혼자서 살았다.

1905년은 까미유에게 작품활동의 마지막해이다. 1905년 12월 14일부터 16일까지 으제니 블로의 주선으로 그의 화랑에서 까미유의 작품13점이 전시되었으나 그다지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고 [애원],[소외된 사람들],[왈츠]등 몇몇 소품들만을 판매하는데 그친다. 까미유의 작품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상하는 신(1894-1905)]및 [중년(1894-1900)]등 그녀의 작품에는 로댕과의 관계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중년]의 최초 석고상에서는 한가운데 선 남자가 오른손으로 노파의 어깨를 껴안고 왼손은 웅크린 젊은 여성의 가슴에 대고 있다. 물론 이 남자는 로댕이며 노파는 로즈, 젊은 여성은 까미유 자신이다. 1899년에서 1913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작품의 브론즈 상에서는 이미 남자는 완전히 노파의 수중에 들어가 있고, 젊은 여성은 웅크린 채 허공을 향해 양팔을 헛되이 뻗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 이러한 변화는 로댕과까미유 의 관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의 까미유에 대한 첫 주문작인 [중년]이 청동으로 제작되는 것을 로댕의 영향력으로 정부가 막게 되는데, 이에 까미유는 본래의 석고상을 자신의 작업실에 보관하면서 비밀리에 두번씩이나 청동작품을 만듦으로써 정부의 처사에 이를 반박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나,정신적으로 지쳐버린 까미유는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파괴적인 칩거생활에 인생을 맡긴다.

칩거생활(1906-1912)

1906년 [상처입은 니오미드]가 제작되었는데, 이작품은 보자르 측이 자체 결정한 재료로 까미유에게 주문의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도움은 그 시기가 너무 늦어, 이미 크게 쇠약해진 까미유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위잰느 블로는 부르조아 고객들이 기호에 맞추어 까미유에게 청동소품들을 제작할 것을 요구한다. 1906년에 사랑하는 남동생 폴 끌로뎅이 결혼을 하자 마자 중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이게 충격을 입은 까미유는 이때부터 매해 여름 까미유는 그녀의 창작활동을 모두 중단하고 그 해의 모든 작품들을 고의적으로 부숴 버렸다. 그녀의 작업실은 점점황폐해져 갔다.

그녀는 일꾼들을 불러 부숴진 파편들을 어딘가에 묻어 버리라고 하곤 주소도 남기지 않은채 몇달동안 사라지곤 했다 . 차문이 열리지 않는 1층은 믿을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졌고 더러움이 끓었고 견딜 수 없는 냄새가 새어나왔다. 까미유는 벽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더러운 의자는 부숴진 채 놓아 두었다. 부르봉에 있는 까미유의 아름다운 작업실은 7년동안 자신을 가두어 놓고 전혀 외부 출입을 삼가한 채 고독한 예술가의 쓸쓸한 독방으로 전락했다. 옛연인이며, 영광속에 살고있는 로댕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녀의 이성과 영감을 마비시켜버린것이다.

1906년부터 1909년 까지 폴은 중국의 텐진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살며 그곳의 시장과 경찰 국장을 지내다가 1906년 영사를 역임했다. 1909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서 까미유를 만났다. 폴은 전후사정을 아버지에게 편지로 알리게 되고 까미유의 광기에 의해 아버지는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게 된다.1912년 여름 로댕이 반신불수가 도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같은해 까미유 조카의 죽음이 있었다. 폴은 9월20일 함부르크로 떠났다.

감금기(1913-The end)

1913년 3월 2일 일요일 아버지가 8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까미유는 이 소식을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망에 앞서 폴은 이미 빌 에브라르 요양소 원장과 면담을 가졌고 아버지의 사망후 급히 귀국한 폴은 장례식 후 미쇼 의사에게 까미유의 정신병원 수속절차를 위한 증명서를 발송하게 했다. 까미유끌로델은 1912년 3월10일 빌르 에브라르의 수용소에 집어넣어졌다. 로댕은 까미유의 감금 소식을 알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소란한 신문의 사설에 의해 그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소식은 그를 혼란시켰다. 로댕은 마지막으로 모르하르트를 중간에 내세워 까미유를 도와주려 시도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파리가 곧 위험에 빠질 상태에서 로댕은 로즈와 함께 런던으로 떠난다. 그러나 가을에는 로마로 내려가 흉상 제작에 들어갔다.

폴 끌로델은 함부르크 영사를 떠나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거쳐 파리에 도착하고 까미유는 앙김으로 이송됐다. 9월 9일 다른 환자들과 함께 앙김에서 몽드베르그 수용소로 다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1943년 10월 19일 사망하기 까지 마지막 인생의 30년을 보냈다. 1919년 2월 25일 몽드베르그로부터 까미유는 처음으로 정신 병원에서의 편지라 불리우는 서신을 미쇼 의사에게 보냈다. 그는 그녀에게 감금 증명서를 발부한 사람이다. 빌뇌브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가족들이 수모를 당하느니 그녀 혼자 고통 받게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 루이즈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까미유의 간곡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물론 남동생도 절망에 빠진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 환자를 가족들 가까이 살게 하거나 퇴원시키는 것에 대해서 의사들이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외교관인 폴이 간혹 휴가 때 그녀를 보러 왔고 그때마다 그는 받은 느낌을 일기에 적었다. 1915년 5월경 그의 첫번째 방문에는 고 적었으나, 5년 후에 고 적었다. 그 후 또 5년이 지난 1925년 폴은 다시 까미유를 볼 수 있었는데 그때는 치아가 모두 빠져 없어지고 건강 상태도 몹시 나빴으며 허옇게 센 머리는 늙은 여자를 연상 시킬 뿐이었다. 1927년의 방문에는 낡아 구멍이 뚫린 밀짚 모자와 누런 베 치마의 서글픈 까미유의 모습을 보았다. 1930년 6월 8일 일기에는 고 적었다. 1939년 부터 유럽은 다시 전쟁에 휩쌓였다. 몽드베르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환자들의 사망이 두드러졌고 이들의 안전 대책은 전무한 상태였다. 1942년 여름 이후 까미유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그녀의 나이 78세였다. 그해 말,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까미유는 부종 상태였고 음식물을 삼키지 못했다. 게다가 탈수 증세도 보였다. 1943년 9월 20일이 되어서야 폴 끌로델은 까미유를 방문했다. 1913년 3월 10일 빌르 에블라르 Ville-Evard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된지 30년 후인 1943년 10월 19일 오후 2시 까미유 끌로델은 몽드베르그 Montdevergues 정신병원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출처 http://janus.netian.com/person/camille.htm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까미유 끌로델. 그녀의 일생은 그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슬프기만 합니다. 만약 좀 더 사랑받으며, 사랑할 수 있으며 살았다면 그녀의 예술은 더욱 찬란했을까요. 아니면 가슴 속 슬픔이 묻어나기에 그녀의 작품이 더욱 감동적인걸까요. 어느 쪽이던 까미유의 예술 세계는 그녀가 단지 로댕의 연인이었다라는 것으로 끝나기에는 안타깝게 합니다.

태어난지 2주일만에 죽은 아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녀의 부모는 '까미유' 라는 양성(兩性)적인 이름을 지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도 모르는 오빠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했던 그녀는 자라면서도 온전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까미유의 어머니는 유독 막대 여동생 루이즈만 사랑했고, 그래서 까미유는 동생 폴과 가깝게 지낼 수 밖에 없었지요.

카미유는 정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곧잘 잠자는 일도 잊으며 혼자서 나폴레옹 흉상이나 독일 정치가였던 비스마르크에 관련된 조각들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본 아버지는 자신의 딸의 재능을 이해했고, 곧 조각가인 알프레드 부쉐에게 정식으로 조각 수업을 받게 해 주었지요. 그리고 부쉐가 이탈리아로 떠나는 바람에 43살의 로댕과 19살의 까미유가 전쟁 같은 사랑의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굳이 부쉐가 아니었어도 그들은 사랑에 빠졌을 지도 모르겠네요. 부쉐가 까미유를 프랑스 최고의 예술 학교였던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시키기 위해 그 곳의 교장을 만나 그녀의 작품을 보여주었답니다. 그 작품을 보고 교장은 로댕의 지도를 받은 게 아니냐고 물었다지요. 이미 서로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들의 영감을 통하고 있었나 봅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로댕은 까미유의 작품을 보자마자 그녀의 재능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작업에 초대했지요. 까미유는 로댕이 만들던 의 모델, 함께 작품을 제작하는 동료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이 되었지요. 조용하고, 조숙하며 아름다웠던 까미유에게 로댕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시골 출신의 이 여인은 늘 은둔자처럼 지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며 조용한 시간들 속에 머물렀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로댕의 제자가 아닌 연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녀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집안에서도 쫓겨나고,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 보다는 그녀 자체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까미유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로댕이 그녀의 예술에 대해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로댕이 끌로델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게 되었지요. 로댕은 부담을 갖게 되었고, 그런 로댕을 바라보던 까미유 또한 지쳐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파국을 맞이했죠.

까미유의 결말은 그 파국으로 끝나지 못했습니다. 로댕은 까미유의 제작 활동을 이런 저런 이유로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댕은 나의 재능을 두려워 해 나를 죽이려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히기까지 했구요, 살롱전에 출품하려던 작품을 로댕이 훔쳐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로댕의 그늘을 벗어난 그녀 만의 전시회 조차 냉담한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멀어진 둘 사이 만큼이나 까미유의 인생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전시회의 실패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부숴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상관없는 듯 여전히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살고 있는 로댕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그녀의 모든 이성과 감성을 망가뜨리기 시작한 것이죠.

편집증, 우울증 등을 보이기 시작한 그녀는 그 이후의 삶을 정신병자들을 위한 요양소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동생에 의해서 말이죠. 79세의 병든 몸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을 그곳에 갇혀 살았습니다.



추천수1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