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봤다. 8년 전의 그 경기는 구 웸블리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0-1패배였다. 매우 우울한 비가 내리는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가본 뉴 웸블리의 외관은 과거와 매우 달랐지만, 잉글랜드 대표팀의 플레이와 날씨는 예전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팬들은 야유를 보냈고 언론도 분노를 표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심스러운 것은 상당수의 빈 좌석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잉글랜드 사람들은 대표팀 축구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1. 계속되는 그저 그런 성적
잉글랜드 대표팀이 진정한 성공을 거둔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유로 2008 탈락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협회, 팬, 언론은 메이저 토너먼트에서 예선 탈락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8강 이상 가본 적이 없는 월드컵과 유로에서의 최근 성적도 문제로 작용했다. 대표팀의 위신은 떨어졌고, 변덕스러워진 팬들은 실패한 팀에 대한 응원을 원치 않는다.
2. 무지함과 거만함
상당수의 선수, 팬, 언론, 지도자들은 아직도 잉글랜드 축구에 대해 우쭐한 마음을 갖고 있다. 마이클 오웬은 크로아티아에게 2-3으로 패하고 나서도 “크로아티아 선수들 중에는 잉글랜드 대표로 뛸만한 사람이 없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포츠머스 해리 레드냅 감독도 체코와의 2-2 무승부 뒤 “2~3명 정도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뛸 수 있을까?”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와 같은 거만함과 무지함은 잉글랜드 축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3. 거품 스타들
영국이 이번 올림픽에서 거둔 성공은 적은 보수를 받으며 열심히 운동해 온 무명의 금메달 리스트들과 프리미어리그 스타들을 비교하게 만들었다.
한 신문이 보도한 것에 따르면, 3개의 금메달을 딴 사이클리스트 크리스 호이는 지난 4년간 9만 달러 정도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 첼시의 프랭크 램퍼드는 6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다.
금메달리스트들의 겸손한 태도도 프리미어리그 스타들과 비교될 수 밖에 없다. 잉글랜드 대표팀 축구 선수들은 형편 없는 경기를 하고도 단정치 못한 복장에 다이아몬드 귀고리를 한 채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인터뷰에서는 경기력에 대한 걱정을 하는 선수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4. 짜증난 팬들은 국가가 아닌 클럽만 사랑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열성 축구 팬들은 국가보다는 클럽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들은 국가와 클럽의 성공 중에서 택하라면 주저 없이 클럽의 성공을 고를 것이다.
대표팀 경기에 큰 매력을 느끼는 팬들은 주로 하위리그 소속 소규모 구단의 서포터인 경우가 많다. 반면 리버풀, 맨유, 뉴캐슬 등 빅클럽의 팬들은 대표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국제 대회 기간 중에도 꼭 축구를 봐야 한다는 사람들만 대표팀 축구를 서포팅하게 된다. 프로 축구를 더 좋아하는 팬들은 대표팀이 보여주는 축구에 점점 지쳐가고 있다.
5. 언론
잉글랜드의 축구 언론은 잔인하고 인내심이 없으며 용서란 것도 모른다. 대표팀의 전 감독들- 보비 롭슨, 그레험 테일러, 스티브 맥클라렌(특히 심했음)은 잔혹한 비판에 시달린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신문의 판매 부수에 도움을 주지만, 대표팀의 이미지에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6. 높은 티켓 가격
유로 96이후에 열린 대표팀 경기의 대부분은 매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뉴 웸블리의 정원은 9만 명인데, 7만 명의 팬이 큰 돈을 지불하고 경기장에 입장했다. 티켓의 평균 가격은 8만원 정도였다.
7만 명의 관중수는 물론 인상적인 수치다. 하지만 축구 협회가 이러한 관중수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만원을 기대하고 있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축구 협회는 경기장 건설에 들어간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팬을 필요로 하고 있다.
7. 소속 팀에서만 잘하는 선수들
파비오 카펠로를 비롯한 최근의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들은 똑같은 문제로 고통 받아왔다. 소속 팀에서는 펄펄 나는 제라드, 램퍼드, 루니 같은 선수들이 대표팀에만 오면 평범한 선수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선수들이 대표팀 경기(특히 친선전) 보다는 프리미어리그나 챔피언스리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8. 다른 볼거리들
K리그가 재개된 지난 주말 한국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됐다고 들었다. 잉글랜드에서도 많은 스포츠 팬들이 올림픽 관전에 푹 빠져있었다. 이토록 관심을 받지 못한 대표팀 경기도 없었던 것 같다. 이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데, ‘축구는 당연히 된다’는 마인드에 경고를 던져주고 있다.
9. 개혁은 어디에?
파비오 카펠로는 세계 최고의 감독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몸값도 상당히 비싸다. 하지만 팬들은 스티브 맥클라렌의 팀과 다를 바가 없는 카펠로의 선택에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팀에 환멸을 느끼는 대중들과 대표팀의 관계가 복구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글쓴이:존 듀어든
=존 듀어든은 런던 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을 졸업했으며 풀타임 축구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가디언, AP 통신, 축구잡지 포포투(영국, 한국), 골닷컴에 아시아 축구에 대한 심도 있는 기사를 송고한다. 현재 서울에 거주 중인 그는 호주 ABC 라디오와 CNN에서도 활약하는 국제적인 언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