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남자와의 관계에서 늘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줄 알았다. 모 통신사 휴대폰 광고에서처럼 심심할 땐 A, 돈이 없을 땐 B, 남자 품이 그리울 땐 C에게 연락하면서 수시로 물고기를 갈아주는 어장 관리를 하다 문득 뒤돌아보니 사랑 없이 산 지 어언 5년. 친구들이 머릿속에 뛰노는 캔디 좀 이제 그만 떨치라고 충고해도 ‘네가 눈이 높은 것 같아서 대시하지 못하겠다’는 남자들의 푸념을 위안 삼아 세월을 보내다 이 지경까지 왔다. 물망에 오른 대어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자, 이제는 현실이 똑똑히 보인다. 실은 내가 어장 관리를 하고 있던 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떨궈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주변을 둘러봐도 멀쩡하게 예쁜 여자들이 오랜 기간 솔로로 ‘발효’하고 있다. 가끔 남자랑 영화도 보고,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하는데 왜 정작 ‘애인’은 없는 걸까. 나날이 까다로워지는 ‘남자 보는 눈’ 때문에 고르고 있는 거라고는 하지만 그러기엔 독수공방 기간이 너무 길다. ‘내가 눈이 높은 탓’이라며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 ‘괜찮은 여자’들의 속내는 사실 ‘나한테 호감을 보이면서 왜 대시하지 않는 걸까?’를 고민하느라 곪을 대로 곪아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있다.
참다못해 이성 친구에게 물었다. “도대체 금방이라도 고백할 것처럼 굴면서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하지 않는 이유가 뭐야?” “응. 그러기엔 뭔가 좀 부족해서.” 그렇다. 알고 있겠지만, 당신이 어장을 관리하며 이 남자 저 남자 고를 때, 남자 역시 당신을 저울 위에 올리고 품질을 감정한다. 이 저울 위엔 ‘아카데미 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버금가는 그의 ‘호감 가는 여자’들이 두 명 혹은 그 이상이 놓여 있다. 무거운 순으로만 뽑아준다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이겠지만, 결국 뽑히지 않으면 노미네이트는 의미도, 실속도 없다.
참고로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가 모공이 조금 넓다든지, 머릿결이 조금 안 좋다든지 하는 사소한 결점이 있다고 해서 그에 대한 마음이 확 변하는 경우는 드문데, 남자들은 그렇단다. 호감이 있지만 어느 한순간 확 깨는 그녀의 모습을 봤을 때 타오른 마음이 단박에 식는다고. 그것을 바꿔줄 마음도, 변화시킬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뭐가 이리도 까다로운지. 여자가 외줄 타는 광대도 아니고, 고작 실수 한번에 바로 곤두박질쳐야 하는 거니?
많은 여자가 저울질만 당하다 버림받는 이유에는 분명 공통점이 있다. 특히 취재 과정에서 만난 남자들은 ‘나이’에 따라 뚜렷하게 다른 양상을 보였다. 즉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축’과 ‘결혼을 고려하는’ 30대 중반 남자들의 ‘저울질 기준’은 허무하게도 ‘외모’와 ‘성격’인 것. 쉽게 말해 전자는 ‘성격이 좋아서 호감이 갔는데 왠지 데리고 다니기 창피한 여자’ 앞에서 수십 번도 더 고민한단다. 가슴이 너무 작다거나 허리가 없다거나 뚱뚱하다는 이유로 켕기기 시작하면 그냥 마음을 곱게 접는 식이다. 내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 휴대폰 배경화면에 등록하기 부끄러운 여자와는 사귀고 싶지 않다는 말. 외모야 선천적인 조건이라 어쩔 수 없다 해도 패션 감각이 젬병인 여자는 있던 호감마저 사라진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옷을 못 입는 여자가 아니라, TPO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여자다. 남자친구는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새틴 원피스에 원색 하이힐을 신고 나온 여자는 ‘자기만 돋보이고 싶어 환장한’ 여자 같다나. 수수해서 매력을 느낀 여자가 어느 날 의 캐리처럼 입고 사만다처럼 덤벼들 때도 ‘아, 이 여자는 안 되겠구나’ 체념한다. 반면 결혼에 혈안이 된 30대 초·중반의 남자는 아무리 예쁘고 마음에 들어도 ‘친구나 가족에게 소개하기 망설여지는 여자’에게 대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이고 영악하다. 우스개 섞인 답변이지만 한 인터뷰이는 ‘장인어른 소득세가 얼마 이상’인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그건 그가 그만큼 잘났기 때문이다). 재테크라고는 ‘은행 적금’밖에 안 하는 여자라든지 연봉 자체가 적은 것도 망설임의 요인. 주변에 남자들이 적은 건 좋은데 ‘여자친구’마저 없는 여자는 성격에 하자가 있거나, 결혼 후 집에서 하염없이 남편만 기다리는 망부석이 될 것 같아 부담스럽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렵게 만난 ‘외모, 성격 모두 마음에 드는 환상적인 여자’는 계속 감당할 여력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놓아준다고. 의 ‘알렉스’가 조장해놓은 ‘이벤트 문화’를 따라 하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들이 결혼 후 더 ‘비싸고’ ‘화려하고’ ‘놀라운’ 선물과 이벤트 공세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에 지레 겁먹고 물러나는 것이다.
참으로 원초적이고 비겁하고 자잘한 이유로, 남자는 ‘좋은 여자’를 맥없이 흘려보낸다. 어딘가에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허황된 믿음은 어장 관리하다 늙어버린 당신에게도, 저울질하다 카드 빚만 불어난 그에게도 부질없다.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입거나, 그의 앞에서 친구가 많은 성격 좋은 여자인 티를 내는 것, 지금부터라도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물론 좋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하라주쿠 뒷골목에서 마주친 100%의 여자아이’처럼, 당신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00%의 연인’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쏜살같이 흐르는 이 아까운 시간에 많은 청춘이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밤을 보내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말을 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