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판토 해전(그리스 어로 Ναύπακτος, Naupaktos 발음Náfpaktos, 구어체 그리스 어로 Έπαχτος, Épahtos; 터키 어로 İnebahtı)는 1571년 10월 7일 배네치아 공화국, 교황청(피우스 5세Pius V 치하)와 스페인(나폴리와 시칠리아 사르디니아를 포함)와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 성 요한 교회기사단 등이 연합한 신성동맹의 갤리선 함대가 오스만 투르크와 벌인 전투로 오스만의 전투용 갤리선 함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5시간의 전투는 10월 7일 일요일 아침 오스만 해군이 그들의 해군 기지가 있는 레판토에서 서쪽으로 출항 할때 메시나(Messina)에서 출항한 신성 동맹의 군대을 서부 그리스의 바깥쪽에 있는 파트라스 만(Gulf of Patras)의 끄트머리에서 만나 시작되었다. 전투는 신성동맹에게 일시적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로마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유럽에 대한 오스만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오직 노를 젓는 전함들만으로 치러진 이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는 세계적으로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로 "역사상 '레판토전투 이후에 세계를 움직이는 추는 다른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해, 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전해가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세계의 패턴을 갖추게 되었다." 또 "중동과 유럽 사이의 계속된 다툼의 전환점이기도 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해소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군세
신성동맹의 함대는 206척의 갤리선과 6척의 갤리어스(개조된 대형 상선으로 많은 양의 함포를 적제하고 있었다.)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카를 5세(Charles V)의 서자이며 스페인의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의 이복동생인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가 지휘를 맡았다. 전선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양한 국가가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109척의 갤리선과 6척의 갤리어스는 베네치아의 함선이었고, 80척의 갤리선은 스페인과 그 속령인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담당했다. 12척의 토스카나 대공국의 갤리선은 교황청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으며, 3척의 갤리선은 제노바, 말타, 사보이아가 담당했으며, 일부 개인소유의 갤리선도 참전했다. 동맹의 모든 소속 원들은 오스만 투르크를 그들의 지중해 해상 무역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다. 다양한 국가들을 대표해 출진한 함대는 베니에르의 휘하에 있는 동맹군 주력 함대인 베네치아함대와 1571년 7월과 8월 사이에서 시칠리아에 있는 메시나에서 합류했다.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는 8월 23일 도착하였다.
기독교 동맹 함대는 12920명의 선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거의 2만 8천에 이르는 병사들을 수송하고 있었다. 잘 훈련받은 스페인 정규 병사들은 1만 정도의 규모였고, 그 외에는 7천의 독일용병과 6천의 이탈리아 용병, 그리고 5천의 베네치아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베네치아의 노잡이들은 오스만 함대에 열 지어 있던 노예들과 다르게 자유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무장을 하고, 그들의 베네치아를 위해 싸울 수 있었다. 자유민 노잡이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전투원들에게 뛰어난 실력이 있다고 인정받았으나, 서서히 모든 갤리선 함대(1549년부터 베네치아의 갤리선 함대를 포함하여)에서 16세기 동안 노예와 범죄자 전쟁 포로들로 대체되었는데, 이 자유민 노잡이들의 임금이 지나치게 비쌌기 때문이다.
오스만 갤리선은 1만 3천의 선원들이 승선 있었고, 3만 4천의 전투원들이 탐승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해적 쿨룩 베이(Chulouk Bey)와 우르지 알리(Uluj Ali)의 보조를 받는 오스만 해군의 사령관 알리 파샤(Ali Pasha 터키어로 카판 델랴 알리파샤Kaptan-ı Derya Ali Paşa)는 222척의 전투용 갤리선과 56척의 소형 갤리선(galliots), 그리고 좀 더 소형의 함선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오스만군은 실력이 좋고 숙련된 선원들이었으나, 정예 군단인 예니체리(Janissaries)는 어느 정도 부족했다.
중요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결정적인 기독교 군세의 우세는 그들의 함선에 실린 총포에서 적들보다 수적으로 확실히 많다는 것이었다. 크리스트교 함선에는 1815문의 총포가 있었음에 반해 오스만 투르크 군에는 750문이 있었고 그나마도 탄약이 불충분한 상태였다. 크리스트교도들은 훨씬 진보된 화승총병과 머스킷 총병들을 승선시킨데 반해서, 오스만군은 그들의 잘 훈련되긴 했지만, 이미 끝물이었던 자신들의 복합궁 병들을 믿고 있었다.
배치
크리스트교 함대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4개의 분대로 나뉘었다. 해안과 근접한 북쪽의 끄트머리는 53척의 갤리선이 좌익을 구성하였다. 베네치아의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Agostino Barbarigo)가 마르코 퀴리니(Marco Querini)가 안토니오 다 카날레(Antonio da Canale)의 지원을 받으면서 주로 베네치아 함대로 이루어진 좌익을 통솔하였다. 중앙에는 돈 후안 데 오스트리아 스스로가 기함 레알(Real)에서 62척의 함대를 통솔했는데 여기에는 훗날의 베네치아의 원수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Sebastiano Venier)와 마칸토니오 콜론나(Marcantonio Colonna)가 그를 보좌했다. 우익에서는 유명한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의 손자인 제노바의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Giovanni Andrea Doria)가 다른 53척의 지휘를 맡았다. 좌익과 중악 우익의 앞부분에는 두 척의 갤리어스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그는 전투 중에 갤리어스 마르퀘사Marquesa에서 전투를 담당했다.)에 따르면, 이렇게 배치한 목적은 오스만군의 함선이 작은 배로 기습하여, 크리스트교 함선에 올라타 공격하는 것은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한 부대는 중앙부대의 후방에 배치되었는데 필요한 곳에 언제든지 달려가 지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후방 부대는 38척의 갤리선으로 되어 있었는데, 30촉은 중앙부분의 후위에 배치되어 알바로 데 바잔(Álvaro de Bazán)이 담당하였고, 4척은 각 날개의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정찰부대도 구성되었는데, 우익에서 두 척과 후방부대에서 6척의 갤리선이 차출되었다. 크리스트교 함대는 느리게 스크로파(Scropha) 지점의 주변을 돌았고, 해안가에서 떨어진 곳에 있던 도리아가 지휘하는 우익은 전투를 시작하는 게 늦어 우익의 갤리어스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투르크 함대는 쿨룩 베이 휘하의 우익이 54척의 갤리선과 2척의 소형 갤리선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중앙은 기함 술타나(Sultana)에서 알리 파샤가 61척의 갤리선과 32척의 소형 갤리선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남쪽의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우르지 알리가 63척의 갤리선과 30척의 소형 갤리선의 지휘를 맡았다. 소규모 잔여부대는 8척의 갤리선과 22척의 소형 갤리선 64척의 푸스타스(fustas)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앙의 후방에 위치했다. 알리파샤는 기독교 노잡이 노예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내가 전투에서 이긴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마. 만약 오늘 운수가 좋다면, 신께서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실 것이다."
전투
좌익과 중앙의 갤리어스는 기독교 함대의 전열로부터 반마일 정도 앞에 배치되었고, 오스만 군이 그들의 후방에 있는 기독교 함대에게 도달하기 전에 두 척의 오스만 갤리선을 격침시키고, 다른 많은 함선들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또 오스만군의 전열을 흩뜨려 놓았다. 전투가 시작할 때, 도리아는 우르지 알리의 갤리선이 그의 위치보다 더 남쪽에 멀리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측면을 공격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이는 그가 우르지 알리보다 더 늦게 움직였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결국 되돌아서 기독교군 중앙의 남쪽 끄트머리를 공격한 우르지 알리에게 속은 것이었는데, 우르지 알리는 도리아가 떠난 공간을 최대한 이용했기 때문이다. 전투가 시작했을 때 오스만 군은 갤리어스가 수송용 상선이라고 잘못 판단했고, 갤리아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는 끔찍한 결과로 나타났으며, 갤리어스는 함선의 많은 포들을 이용해 70척의 오스만 갤리선을 침몰시켰다고 한다.
북쪽에 쿨룩 베이는 크리스트교 함대 좌익을 해안가로 몰아가려고 여섯 척의 갤리선을 이용해 옆구리를 찌르려 하였고 처음에 크리스트교 함대는 이 공격에 피해를 받았다. 바르바리고는 활에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인들은 이러한 공격에 직면하여 그들의 전열을 지켜냈다. 갤리아스가 되돌아와 기독교 함대의 좌익을 구해냈다. 기독교 함대의 중앙은 많은 피해를 입은 후에 후방 부대의 도움으로 전열을 유지하여 오스만 군의 중앙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남쪽의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도리아는 우르지 알리의 함선과 혼전을 벌였고 기독교 측에게는 가장 안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우르지 알리는 스스로 16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기독교 함대 중앙에 첫 공격을 감행하여, 6척의 갤리선- 이들 중에는 말타 기사단의 카피타나(Capitana)도 포함되어 있었다-을 탈취하고 올라타 세척의 갤리선에 있는 적군을 몰살했다. 이 배들의 사령관이자 성 요한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피에트로 귀스치니아니(Pietro Giustiniani)는 다섯 발의 활에 무수한 상처를 받았으나, 선실에서 살아남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알바로 데 바잔과 후안 데 카르도나(Juan de Cardona)가 지휘하는 후방부대는 중앙과 도리아의 우익으로 나뉘어 전투에 참여했다.
우루지 알리는 그가 탈취한 배중 단 한척을 제외하고는 전부 내버려 둔 채로 16척의 갤리선과 24척의 소형 갤리선을 이끈 상태로 패주하였다. 전투의 과정에서 오스만의 기함에 기독교 함대의 겔리선 3척에 배치되어 있던 스페인 테르시오 방진부대가 올라탔다. 7척의 갤리선으로부터 올라탄 오스만 예니체리는 이들과 오스만의 기함 술타나의 갑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스페인 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두 번이나 패퇴되었으나, 세 번째 시도에서 알바로 데 바잔의 갤리선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끝내 압도할 수 있었다. 무에젠자데 알리 파샤(Müezzenzade Ali Pasha)는 돈 후안의 바람에 반하여 효수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기함의 창끝에 효수된 그의 머리는 오스만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이 완전히 오스만 군에게서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예니체리 부대는 여전히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예니체리는 무기가 떨어지자 그들의 기독교인 적군들에게 오렌지와 레몬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는 일반적으로 전쟁의 비참함에 대한 쓴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전투는 오후 4시쯤에 결판이 났다. 오스만 함대는 약 210척의 함선을 잃었는데, 이중에서 117척의 갤리선과 10척의 소형 갤리선, 그리고 세척의 푸스타스는 별로 부서지지 않은 상태로 나포되어 기독교 함대는 이를 자신들의 함대에 편입시켰다. 기독교측은 20척의 갤리선이 파괴되고 30척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어 분산되었다. 나포된 갤리선 중 오직 한척만이 오스만 군에 편입되었고, 나머지 함선들은 버려지거나 기독교군이 재탈환하였다.
말타 기사단(1522년 투르크의 공격으로 쫓겨난 로도스 기사단의 후신. 소아시아 서남단의 로도스 섬을 중심으로 비기독교 선적들에 대한 해적행위와 기독교 선적들에 대한 구호 및 의료 서비스를 배풀던 십자군 운동의 선두에 섰던 성요한 기사단이 로도스 섬에서 쫓겨난 후 시칠리아 남단의 몰타에 자리를 잡으면서 몰타 기사단으로 불리게 되었다.)의 기함을 나포한 우르지 알리는 전투의 승패가 확실해 졌을 때 그의 함선의 대부분을 보존할 수 있었다. 비록 그는 도망치기 위해 말타 기사단 함선의 기함의 밧줄을 끊기는 했으나,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항해하여 도중에 다른 오스만 함선들을 모집하여, 최종적으로 87척의 함선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그는 술탄 셀림(selim)에게 거대한 말타 기사단 기를 헌상하였고, 술탄은 이로 인해 우르지 알리에게 검을 뜻하는 카르(kιlιç)라는 칭호를 수여하였다. 우르지 알리는 이로 인해 카르 잘리 파샤(Kιlιç Ali Pasha)로 알려지게 되었다.
신성동맹은 약 7천 5백에 달하는 병사와 선원, 노잡이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많은 크리스트교 노예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약 2만 5천에 달하고, 적어도 3천 5백 명이 사로잡혔다.
영향
이 전투는 오스만 해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15세기부터 결정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았던 오스만 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기독교 세계의 반수에게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여겨진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켰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그 함선의 거의 대부분과 3만의 병사 거의 대부분을 잃었고, 서구 역사가들은 이를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로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성동맹의 불협화음은 이 승리로부터 얻은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실패했다. 크리스트교 세계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다르다넬스(Dardanelles) 해협을 공격하는 계획은 동맹군들끼리의 언쟁으로 없었던 것이 되고 말았다. 놀라울 만한 노력으로 오스만 군은 그들의 해군을 수복하고, 성공적으로 베네치아의 갤리어스를 복제하였다. 1572년 지중해에서 이제까지 나타난 함선 중 가장 큰 최고 성능의 함선들을 더하여 150척의 갤리선과 8척의 갤리어스가 만들어졌다. 6달 동안 250척(8척의 갤리어스를 포함한)의 새로운 함대가 동지중해에서 오스만 해군이 우위를 주장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1573년 5월 7일 베네치아군은 레판토 해전에서 겨우 두 달 전인 1571년 8월 3일 피얄레 파샤(Piyale Pasha)휘하의 오스만 투르크 군에 함락된 키프로스에 대한 오스만의 점유를 인정하는 조약을 맺었고, 이 섬은 다음 3세기동안 오스만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파마구스타(키프로스 최대의 항구)함락 이 후 투르크군은 약속을 어기고 항복한 성주의 살껍질을 벗기고 바닷물에 담그는 극랄한 처벌을 가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기독교 연합군은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리고 여름에 오스만 해군은 지질학적으로 취약한 시칠리아의 해안과 이탈리아 남부를 약탈하여 피해를 입혔다. 오스만의 대재상은 유명한 말을 했는데 "당신들로부터 키프로스를 탈취한 것은 우리가 당신의 팔을 뽑아 버린 것과 같고 우리 함대가 패한 것은 단지 우리의 수염을 깍은 것이나 다름없소. 팔은 뽑히면 다시는 자라지 않으나, 면도칼에 잘린 수염은 더욱 풍성하게 자라는 법이라오."
그러나 그들의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의 손실은 전략상으로 중대한 것을 의미한다. 함선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복구되었으나, 숙련된 선원과 노잡이, 군인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대체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배의 충각이나 초기의 화기보다 뛰어났던 오스만 함대의 주요 적제무기인 복합궁을 사용하는 궁수들의 대부분을 잃었다는 것이다. 역사가 존 키건(John Keegan)은 고도로 숙련된 전사들의 손실은 쉽게 대체될 수 없으며, 사실상 오스만 군의 살아있는 전통들이 죽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종국에는 많은 수의 범죄자들이 도망친 크리스트교 노예들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574년 오스만 군은 스페인이 지원하는 하프시드(Hafsid) 왕조로부터 돈 후안의 군세에 의해 1년 전에 빼았긴 전략적 도시인 튀니스를 탈환하였다. 프랑스와 오스만의 오랜 기간의 동맹은 오스만군으로 하여금 서부 지중해에서의 능동적인 행동을 다시 점유하게 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과 군사적인 보조를 맞췄다.
1579년 페즈(Fes) 함락은 슐레이만 대제(Süleyman the Magnificent)때부터 시작된 오스만의 모로코 점령을 완결시켰다. 지브롤터에서 그리스에 이르는(스페인이 지배하는 무역 도시 오랑Oran과 전략적 거점인 멜리아Melilla와 세우타Ceuta를 제외하고) 전 지중해 해안에 대한 오스만의 힘에 따른 종주권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레판토에서 많은 숙련된 선원들을 잃은 것은 오스만 해군의 전투능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해로부터 오스만 함대가 크리스트교 함대와 교전을 최대한 피했다는 점을 볼 때 확인 할 수 있다. 역사가 파울 K. 다비스(Paul K. Davis)는 말했다.
"이 오스만의 패배는 지중해에서의 오스만의 확장을 저지시켰고, 서부의 주도권을 유지하였으며, 예전에는 저지할 수 없었던 오스만을 격퇴할 수 있다는 서방의 자신감을 신장시켰다."
게다가 신성동맹의 승리는 단순히 신성동맹군이 7500의 병력과 17척의 갤리선을 잃은 반면에, 동맹군은 투르크의 80척의 배를 침몰시키고, 130척의 함선을 나포하여 3만 명을 전사시킨 것(해방된 1만 2천의 기독교 갤리선 노예들은 포함하지 않았다.)뿐만이 아니라 지중해에서 오스만에 대한 우위를 만방에 선포했다는 데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종교적 중요성
신성동맹은 로사리오(Rosary)를 사용해 신에게 간청하는 승리를 중개하는 성모 마리아에게 승리를 빌었다. 안드레아 도리아는 그의 선실에 스페인의 필립 2세에게 받은 기적과 같이 신비스러운 우리 과달루페의 성모(Our Lady of Guadalupe)의 복제품을 안치하였다. 피우스 5세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현제 카톨릭 교회에서 동정성모축일(Our Lady of the Rosary)로서 경축되는 승리의 우리 성모(Our Lady of Victory)라는 카톨릭 축일을 설립하였다.
회화의 묘사와 문화
레판토의 중요성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도 영감을 끼쳤다. 이 전투를 묘사한 그림은 베네치아의 팔라초 두칼레 디 베네치아(Palazzo Ducale di Venezia)에 있는 두개의 대표작, 살라 델 콜레지오(Sala del Collegio)에 있는 파올로 베로네스(Paolo Veronese)의 작품과 1577년 화제로 불에 타 지금은 틴토레토(Tintoretto)의 레판토의 승리(Victory of Lepanto)로 대체된 살라 델로 스크루티니오(Sala dello Scrutinio)의 벽에 있는 안드레아 비센티노(Andrea Vicentino)에 있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것들이 있다. 마드리드의 프라도(Prado)박물관 티치아노(Titian)의 레판토 전투의 우화(Allegory of the Battle of Lepanto)는 전투의 배경으로 많이 쓰인다.
미국의 추상화가 키 팀블리(Cy Twombly)는 2001년 그의 주요 작품에서 이 전투에 관한 12개의 거대한 그림들을 참조하였다.
영국의 작가 G.K 체스터톤(G. K. Chesterton)은 1911년 처음 출판된 레판토(Lepanto)라는 시를 썼고 이때부터 무수하게 다시 출간되었다. 이는 전투의 다양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특히 크리스트교도의 지도자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에 대한 시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 시는 나중에 돈키호테(Don Quixote)에서 영원성을 얻게 되는 "마르고 멍청한 기사"와 함께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이탈리아 작가 에밀리오 살가리(Emilio Salgari)는 1910년에 출간된 그의 소설 일 레온 디 다마스코(Il Leone di Damasco)에서 레판토 해전을 언급하였다.
[출처] 레판토 해전 (Battle of Lepanto 1571)|작성자 격검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