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떻게해서든지 밤 12시까지 제출해야해서 미친듯이 급조한 글이다.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촛불집회에 대해 고민을 해야하는 만큼 (연구논문 20장 어쩔 -_-;;)
여기다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평가해주고 이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올려봅니당.
언론 매체의 '기호 남발'에 대한 나의 생각
언론정보학과 2007-10564 정승민
1. 필자가 보기에,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사이의 싸움은 일종의 ‘기호(記號) 싸움’이었다.
이번 촛불집회는 지금까지의 다른 집회들과는 달리 수많은 기호들이 탄생되고 활용되었던, 그야말로 ‘기호의 장(場)’이었다. ‘쥐박이’, ‘2MB' 등 현 사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아 인기를 얻거나 ’촛불소녀‘와 같이 많은 이의 공감을 얻어 후에 언론에서도 친숙히 사용되던 기호들이 적지 않았다. 그 때 당시 이러한 기호의 출현과 활용은 필자에게 큰 오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이 기호들을 공유하며 현실을 얘기하고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색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촛불집회의 규모가 커지고 정부와 국민의 갈등이 격해질수록, 이 기호들은 필자가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정치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특히 촛불집회에 대한 언론의 입장이 ‘보수’와 ‘진보’로 극명하게 갈리게 되면서, 이러한 기호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기호들은 진보 언론이 보수 언론을 지탄하는 대표적인 기호로 자리 잡게 되었고, 보수 언론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선동’, ‘배후’, ‘순수성 상실’ 등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기호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어떤 기호가 더 많은 국민에게 어필할 것인지가 그들의 승패를 좌우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 때 필자가 주목했던 대표적인 기호는 바로 ‘촛불소녀’와 ‘순수성’이었다. 진보언론이 집회 초반부터 현 정부의 비민주성을 효과적으로 규탄하기 위해 내세웠던 것이 ‘촛불소녀’라면, 보수언론이 집회 후반부터 촛불의 정치적 · 폭력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기호는 바로 ‘순수성 (상실)’이었다. 두 언론은 촛불집회를 사이에 두고 ‘촛불소녀’와 ‘순수성’을 내건 싸움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꺼림칙하게 여겼던 점은 바로, 보수이건 진보이건 간에 그 기호 자체에 대한 성찰과 고민의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언론 모두 이 기호를 사용하는 데에만 급급했을 뿐, 이 기호들을 정확히 어떻게 규명할 것인지, 기호 안에 내포된 의도와 목적은 무엇인지, 그 의도와 목적을 어떻게 현실로 이끌어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했다. 그저,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로서 기호를 사용만 할 뿐이었다.
2. 보수언론이 내세웠던 ‘순수성’, 알고보니 명확하고 논리적인 의미 규정이 불가능하더라.
필자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이어졌던 6월 초반 당시에는 ‘진보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동맹 휴업 투표를 주도하는 소수의 진보적 학생, 촛불집회에서 정치색 짙은 구호를 호소하는 소수의 진보 세력들을 보며 이명박 정권으로 인해 갈 곳이 없어진 진보세력이 촛불집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노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해 준 것이 바로 보수 언론이 내세운 ‘순수성’ 기호였다. 그들은 지금의 촛불집회가 진보 세력의 정치성 · 폭력성으로 난무하여 초기의 순수함을 잃었다며, 촛불 집회는 더 이상 시민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에 전적으로 공감한 필자는 신이 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촛불 집회의 순수성’이란 기호에 대해 찬양을 하였다. 촛불집회의 순수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진보 세력이 물러나고 시민만이 그 곳에 남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때 필자가 받은 반론은 다음과 같았다. “넌 시민과 진보세력을 구분할 수 있어? 진보 세력 또한 시민 아닌가? 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순수성’의 의미는 무엇이지?”
필자는 지금도 이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분명히 깨달은 것은, ‘순수성’이라는 기호는 함부로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이 기호가 정치성과 폭력성에 반대되는 의미로 쓰였음은 충분히 짐작은 한다. 그러나 정치성 부분에 있어서, 과연 어떤 시민이 정치성이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과연 어떤 진보세력이 시민의 자격을 포기하고 정치이념에만 순종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는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필자는 순수성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블로거들의 포스팅 혹은 진보언론의 기사를 참고해야했고, 보수언론이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파악해봐야 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 기호를 사용하던 보수언론 당사자들은 ‘순수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순수성’이라는 기호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그 기호에 오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했다. 그저 지금 자신들이 촛불집회를 반대하는 타당한 논리를 반영하는 기호로서 ‘순수’를 외칠 뿐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촛불집회가 순수했던 초반에, 그때에도 그들은 촛불집회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3. 진보언론이 내세웠던 ‘촛불소녀’, 기호로만 끝난 것 같아 아쉽다.
보수언론뿐만 아니라, 진보언론에서도 ‘촛불소녀’ 기호를 사용에 허점을 보였다. 필자가 촛불소녀 캐릭터를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점은,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자극적인 캐릭터라는 것이었다. 표정은 단호하였으나, 그 캐릭터는 분명 교복을 입고 있는 여린 학생이며 또한 여성이었다. 마치 사회적 약자가 정부에 대항하는 모습을 부각시켜 보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것만 같았다. 물론 촛불집회가 여중고생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기리기 위한 캐릭터였으니,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보 언론 쪽에서 ‘촛불소녀’라는 기호를, 국민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호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급급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다.
촛불소녀에 대한 첫인상의 찝찝함에서 벗어나고나 필자는 블로그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 촛불소녀 기호의 문제성을 지적하는 담론은 온라인상에서 블로거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었다. 학생의 인권을 외치는 촛불소녀 캐릭터가 학생인권의 억압을 상징하는 단발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고 있다는 점, 촛불소녀들이 ‘미성년자’로 분류되어 촛불집회 참여를 제한받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었고, 그런 측면에서 촛불소녀 기호가 얼마나 큰 모순 속에서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필자는 이 성찰에 전적으로 공감하였으나, 촛불소녀가 본질적으로 비판하는 소위 ‘미친 교육’에 대한 담론이 블로그에서도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에 대해 아쉬움을 가졌다. 진심으로 촛불소녀들의 교육권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면, 당시에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던 상황에서 교육 문제에 대해 더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국민의 투표율이 높았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전체 투표율이 심각하게 저조했던 점은, 촛불소녀 기호를 유행처럼 활용했던 우리가 그 기호의 이면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러한 평가는 진보언론 측에서도 피해갈 수 없다. 진보언론이 촛불소녀 기호에 관해 활성화시켰던 담론은 주로 ‘학생들의 자율성과 민주성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들은 여중고생들의 연설과 인터뷰, 그로부터 느낄 수 있는 학생들의 성숙함과 이에 대한 대견스러움, 여중고생들이 비 오는 날 맨발로 거리를 걷고 양초를 건네주며 고군분투하는 모습만을 필자에게 부각시킬 뿐이었다. 물론 학생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 즉 ‘미친 교육’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보고자 하는 노력도 미진하게나마 존재는 했다. 그러나 ‘현 이명박 정부의 교육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라는 결론 이외에는 진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진보언론 측에서라도 촛불소녀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대대적으로 현 교육제도의 심각성을 고민하고 이에 대한 전 국민들의 관심을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촛불소녀들의 노력이 이리도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왜 그들은은 기호를 사용하기에만 급급하였을까?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기호는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을 때 최대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경우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국민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향이란 정치적 이념의 방향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세력을 지재해줄 수 있는 기반세력을 확충하기 위한 방향을 의미한다. 한국 언론은 언론의 공정성보다는 그들의 정파성을 더 추구한다. 그러나 이 정파성도 신문을 읽어주는 독자, 즉 국민이 없으면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때문에 그들은 단 한명의 국민이라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한다. 사실 정치성을 뚜렷이 갖고 있는 국민들은 이미 보수 · 진보 언론의 오랜 단골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성이 없는 국민을 끌어들임으로서 자신들의 정파성을 확고히 다지는 일이다.
다수의 한국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이미 당연시되는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6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였고, 그 외에 다른 선거의 투표율도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이처럼 정치에 무관심한 다수는 특별한 의지 없이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문을 택하게 되고, 이는 곧 보수언론의 세력 강화로 나타나게 된다. 보수언론은 독자들에게 교묘한 논리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보수적인 정치이념을 심어주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진보 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진보 세력은 언론에서나 정치 활동에서나 대다수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이로 인해 보수언론은 어떤 정치 · 사회 문제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대부분의 국민들의 의사를 이끌어갈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광우병 문제로 인해 무관심했던 다수가 정치 ·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는데, 보수언론은 집회 초기에 그것을 미처 포착해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자신들의 의도대로 여론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민들에게 덜미를 잡혀 보수언론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연결되면서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이 다시 세력을 잡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바로, 국민을 촛불집회로부터 떼어놓아 옛날처럼 정치에 무관심한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이 아직 진보세력에 대한 반감을 완전히 잃지 않은 것을 이용하여, 국민들이 진보세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가 진보적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처럼 국민과 촛불집회를 이간질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기호가 바로 ‘순수성’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진보언론은 무관심했던 다수의 눈을 최대한 정치 · 사회적 이슈로 돌림으로서 그들의 지지기반을 마련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촛불소녀’ 기호의 호소성-여성을 넘어서, 자녀에 대한 애정이 강한 한국 부모라면 누구라도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인 학생이 갖는 호소력-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진보언론 측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촛불소녀 이미지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부각시켜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교육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담론을 형성할 시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5. 기호를 남발하기 전에
자신들의 정파성을 수호하기 위해, 기호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소홀했던 보수 · 진보 언론은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잘못을 반드시 되돌아보아야 한다. 기사와 칼럼 등에서 수많은 기호를 공정하게 다룰 책임을 가지고 있는 언론 매체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책임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파성에 얽매여 기호에 내포된 사회 현안들을 사회적 담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시켜버린 한계점을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국 언론이 ‘세상을 비추는 창’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겠는가.
이에 덧붙여, 향후 언론의 참된 발전을 위하여 한국 국민들이 정치 · 사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언론은 국민과 소통하는 존재이다. 이를 국민이 외면한다면 언론은 자기 이득을 챙기기 위한 이익 단체로 전락하고 만다. 언론에서 남발하는 기호에 현혹되지 말고, 이번 촛불집회에서 보여주었던 비판적 주체성을 앞으로도 유감없이 발휘하며 언론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은, 필자 스스로 이 에세이를 적으며 깨달은 반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