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3부작으로 나눈 <20세기 소년> 중 '강림' 편이 개봉했다. 꽤 긴 러닝타임에도 그리고 만화를 전혀 보지 않은 상태에서 관람했는데 꽤 볼 만했다. 어릴 적의 왕따 친구가 커서 복수한다는 몇 글자로 요약되는 이 스토리에는 황당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은 '세계정복'의 음모가 도사린다. 스스로 그 자신을 '친구'로 칭하며 초등학교 때의 상처를 이렇게 거대한 복수로 승화시킨 이 인물이 누구인지 영화 속 켄지를 비롯해 그의 동료들은 궁금하기만 하다. 만화를 다 본 사람이라만 '친구'의 정체가 누구인지를 당연히 알 것이고, 다만 이들의 관심사는 원작을 얼마나 충실히 스크린으로 옮겼냐는 것일 거다.
초등학교 때부터 락을 들었던 켄지는 꽤 음악적으로 조숙했던 모양이다. 70년대부터 2015년까지를 아우르는 시대의 스펙트럼에, 초등생 켄지는 70년대에 이 음악을 튼다. T.REX의 '20th Century Boy'. 노래 제목이 바로 만화제목이요, 영화제목인 셈이다. 나는 여태까지 이 노래를 Placebo 의 노래로 알고 있었다.
내가 가진 CD 중에 위 곡이 수록된 CD가 있었단 말이다. 노래도 Placebo 가 불렀다. 그건 바로 늘 보고 싶어하던 영화 <벨벳 골드마인>의 사운드트랙이었다. 유완 맥그리거-근육의 수축과 이완이 아니라 현지 발음상 유완이 맞댄다-의 목소리를 <물랑루즈>에서도 들을 수 있지만 그보단 그가 락을 부르는 걸 듣고 싶었다.
그런데, 초등생이 글램 록이라니.....켄지도 꽤나 조숙했던 모양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초등학교 시절 켄지가 만들었던 기지의 멤버들이 자칭 '친구'라 하는 자에 대항하기 위해 뭉치는데, '세계정복'이라는 '친구'의 목표가 만화가 원작이어서 황당하게 보이지도, 또 영화가 상상력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목표에 개연성을 부과하고 우리 앞에 억지스런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진정 세계를 움직이는 조직은 존재하는가? 프리메이슨부터 빌더버그 클럽에 이르기까지, 세계 고위층 인사들의 비밀회동, 그리고 이 뒤에 일어나는 일들. 국가의 정책에 깊이 관여하며 세계를 결국은 자신들의 뜻대로 단일정부화 하기 위한 시도들. 위의 책들은 어느 정도 이런 음모론들이 허황되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책들이다.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런 조직이야말로 만화에서만 보던 그런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요새 <빌더버그 클럽>을 읽고 있는데 정말로 이런 조직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뒤에서 모든 걸 꾸미고 조종하고 있을 테고 이들의 꿈인 단일정부가 실현되는 날 우리들은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보여준 혜안에 감탄하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모른 채 그냥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세상 편하다고 느끼는 이도 꽤 될 것이다.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건 누굴까?
그들 중의 하나는 지구촌 미디어를 장악한 세계 5대 미디어 재벌일 수 있다. 이들은 현실을 비판하지 않으면서 회사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방송과 매체를 통해 유포시키고 있다. 이들이 내는 잡지, 신문, 방송 등은 회사의 이익을 대변하지 결코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진실을 보도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거대자본을 이용해 언론사를 산 뒤 편집장을 교체하는 방법으로 이들은 세계의 미디어를 장악해 왔다. 세뇌는 긴 세월을 통해 이루어진다. 고객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고객이 맞춰가도록 조작한다. 우리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듣고 그 말에 수긍해 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나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20세기 소년>의 '친구'는 사이비종교 집단의 교주로 매도하기에는 그 세력이 너무 크다. 일찌감치 공권력과 미디어를 장악, '시민의 벗' 이라는 뜻의 우민당을 창당하고 쉴새없이 자신들이 시민들의 벗임을 강조하는 광고를 내보낸다. 일종의 세뇌인 것이다. 여기에는 이들에게 매수된 재벌들의 자본도 한 몫 했다. 위의 말들이 황당하게 여겨진다면 현실에서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같은 이가 가진 영향력을 따져보기만 해도 이런 일이 꼭 만화에서만,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릴 적 켄지와 친구들이 구상한 얘기가 '친구'라 하는 자에 의해 현실이 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인류 멸망의 날이 시작되는 것도. 여전히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무감각함을 탓하겠다. 심심찮게 터지는 개인정보 유출사고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다면 더 할 말 없다. 만약 엄청난 고객을 보유한 대한민국의 모 은행에서 한 직원의 실수로 고객들의 정보가 유출되었다면? 멍청한 직원은 실수라고 곧이곧대로 밝힐 수도 있겠지만 나쁜 쪽으로 짱구가 돌아가는 이라면 금방 알아챌 것이다. 이것이 고객들의 명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복수와 세계정복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친구'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은 않다.
그런데, 원작자는 이 사실을 알고 만화를 그렸을까?
정부라는 기구도 '친구' 같은 존재다. 시민들의 알 권리를 무시하면서 독립언론을 비롯한 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매체들을 탄압, 그리고 공영미디어 장악 시도 등. 현실이 더 만화 같고 더 무서운 세상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야 인류멸망, 세계정복 등을 꿈꾸는 과대망상광은 없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