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촛불은 평화다. 조용히 불타올라 제 몸을 사르는 고귀한 희생이다. 연약한 몸짓으로 어둠을 깨우치는 각성이다. 교회수련회 시간마다 캔들파이어가 빠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터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에게 촛불은 필경 상처다. 아픔이다. 지워지지 않는 악몽, 내면에 깊게 각인된 트라우마다. 지금 하는 짓들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촛불'에 얼마나 크게 데였으면 유모차부대 엄마들까지 잡아 넣으려 할까.
아마 이 대통령은 할 수만 있다면 그의 기억과 뇌리 속에서 '촛불'이란 단어를 깨끗히 삭제하고 싶을 게다. 방미 직후 부시 미 대통령에게 조공하다시피 바친 쇠고기협상 때문에 전국 방방 곳곳에 촛불이 켜지고 덕분에 취임 100일만에 지지율 7%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작성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래서였을 게다. 촛불정국에서 기사회생하자마자 이 대통령이 '촛불 죽이기'와 자기합리화에 나선 것은. 촛불 앞에 두 번이나 머리를 숙여야 했던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아니 가는 것도 아니다. 손상된 권위를 보상받자면 어쩔 수 없었겠지. 설치류 수준으로 추락한 이미지를 내심 회복하고 싶었을 테니까. 나아가 자기가 몰리는 상황을 어떻게든 역전시키고 싶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도 없지만, 암튼 이 대통령은 이후 친위언론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변명에 나섰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남탓'이란 딱지를 붙이는 작업으로 표출됐다. 이를테면,
1. 'PD수첩 탓'.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문제로 나라를 이처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전적으로 MBC PD수첩의 악의적 오바 때문이다. PD수첩이 광우병 위험을 앞장서서 나팔불지 않았더라면 촛불시위가 이렇듯 대대적으로 촉박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검찰이 특수팀까지 구성해서 대대적으로 PD수첩 수사에 나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조치다.
2. '노무현 탓'. 이른바 '설거지론'이다. 문제가 된 쇠고기 협상은 실은 전임 노무현 정권이 물려준 것을 뒤치다꺼리 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명박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억울하다. 따라서 협상이 굴욕적이고 잘못 됐다고 욕을 하려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해야 한다.
3. '인터넷 탓'. PD수첩의 잘못된 보도가 청소년들에게 광범하게 유포되고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인터넷 때문이다. 인터넷을 잘 이용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된다. 인터넷 공간을 거짓정보와 유언비어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본인확인제 등 특단의 종합대책을 강구.모색해야 한다.
4. '시민단체 탓'. 불법.과격으로 변질된 촛불집회 배후에는 반미.친북.좌경 시민단체가 있다. 이들이 광우병종합대책위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면서 반정부시위를 선동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이들 불온단체들을 엄단하는 한편, 차제에 비판적인 다른 시민단체들까지 수사를 확대하여 감시.관리토록 해야 한다.
5. '교과서 탓'. 공부에만 전념해야 할 초중고 학생들이 '이명박 OUT'이란 팻말을 들고 거리로 뛰쳐 나온 것은 좌편향에 물든 교과서 때문이다. 따라서 뉴라이트측이 제안한 대로, 교과서를 전면 뜯어 고쳐 대북 반공의식을 고취하고 건국 60년 한국현대사에 대해 자랑스럽고 긍정적인 내용만 기술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남탓' 리스트를 대강 기억난 대로 적은 것만 해도 이 정도다. 낱낱이 검색하면 그 분량은 이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입만 열면 계속 '남탓'만 읊어댔으니까. 조중동으로부터 '남탓의 달인'이라고 끊임없이 비판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 대통령에 비하면 게임이 안 될 게다.
도대체 이 대통령은 어쩌자고 이런 짓을 반복하는 걸까? 이런다고 지난 상처가 말끔히 치유되고 새살이 돋기라도 하나? 그렇지 않다는 걸 본인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애꿎은 유모차부대 엄마들에게까지 눈을 부라리며 유치한 책임전가와 촛불죽이기에 매달리는 걸 보면, 확실히 촛불의 내상이 크긴 컸던 모양. 그렇지 않고서야...
이 대통령에게 고언한다. 부인하고 변명하고 잡아 가두는 건 아픔을 치유하는 올바른 해법이 되지 못 한다. 온전한 사람은 꾸중을 들었을 때, 겸허히 잘못을 인정하고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인다. 설혹 억울하게 당했다고 생각하더라도 '나를 연단시키는 과정이러니' 하고 감사히 받아들인다. 신앙인이라면 더더욱 그리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부디 더이상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이제 그만 촛불로부터 자유하시라. (2008.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