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여자_
점심으로 먹은 라면 냄비를
막 물에 담그려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 옵니다.
하루에도 몇 통씩 메시지를 보내던
것에 비하면
이번 전화는 아주 오랜만이었죠.
몇 주 전 그녀가 내게
친구 커플과 같이 휴가를 가자고 했을 때
난 그게 무슨 뜻인지 빤히 알면서도
모른 척했거든요.
“그냥, 친구들끼리 가.
내가 거길 왜 가냐, 니 애인도 아닌데..”
그 말에 금세 조용해지던 그녀.
이 전화는 그 후에 걸려 온 첫번째 전화죠.
“어디니? 휴가는 간 거야?”
그랬더니 바닷가랍니다.
“거기서 뭐 해?
다 커 가지구, 바다에서 물장구라도 치는 거야?”
그 말에 그녀는 그냥 파도 소리 들으며 바다에 발 담그고
콜라 마시고, 그러고 있다구요.
“그래, 바다는 그러고만 있어도 좋지.
잘 놀다 와라.”
그녀의 마음은 알지만 나는 그 마음과 다르니까.
이렇게 전화를 받아 주는 정도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니까.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원망을 뒤로 하고
혹시라도 우리 사이에
다시 부담스런 말이 오가기 전에
난 설거지물을 받으며 서둘러 전화를 끊습니다.
그남자_
이 곳까지 기어이 그가 따라 왔습니다.
저만큼에서 걸어오는
안경을 쓴 남자는 모두 다, 그 사람이죠.
그 때마다 아닌 걸 알면서도
기어이 그 남자 근처까지 걸어가는 나.
가까이 가 보면 당연히 그 남자는 그가 아니죠.
‘너는 지금 뭐 하니?
나 혼자 이 곳에 오게 하고 너는 거기서 뭐 하니?’
마음속으로 백 번쯤 묻다가
결국 전화를 겁니다.
무얼 하고 있냐는 질문에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그 사람은 말하네요.
바다에서는 그렇게만 하고 있어도 좋다고.
나는, 속으로 대답합니다.
‘나는 니가 있는 데가 그랬어.
너하고 있기만 하면 다 좋았어.’
그러곤
휴가 잘 보내란 말과 함께
전화가 채 끊어지기도 전에
저쪽에서 들려 오는 수돗물 소리.
어서 전화를 끊고 세수하고 싶은 거겠죠.
나는 행여 그의 한마디를 놓칠까
이 뜨거운 날 핸드폰을 들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지금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있을 그와
이 뜨거운 전화 부스 안의 나.
우리 마음의 온도가 딱 그만큼 다른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