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21시경 도청 내에서 대학생 70-80여명이 있는 자리에서 재야인사였던 김성용 신부(46,12년형)는 광주사태의 본질을 매우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동안 우리 전라도가 얼마나 천대를 받았느냐, 모든 근원은 토지에서 나오는데 농촌을 얼마나 혹사했느냐 전라도는 농토가 대부분인데 농업정책에 실패하여 고생이 많았다. 이번 광주사태는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광주시민의 울분의 표현이다. 다 같이 노력하여 우리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켜라”계엄사 134쪽에는 광주소요의 가장 큰 원인을 “누적돼 온 지역감정과 시위를 부채질한 김대중 일당, 그리고 용공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재경극렬 문제 학생들의 선동 및 가세”를 들고 있다.
지역감정! 필자는 특히 광주교도소에서 많은 광주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이들이 한 결 같이 말하는 것은“전라도 푸대접”에 대한 한(恨)이었다. 전라도의 한은 주로 경상도를 향해 집약돼 있었다. 광주시위가 한창일 때 시위대는 경상도 차량들을 불에 태웠고, 경상도 운전수들에 몰매를 가해 살해했고, 경상도 사람이 운영하는 업소를 파괴했다. 전라도 사람들을 가장 화나게 만든 유언비어도 다른 지역이 아니라 경상도에 대한 증오의 표현이었다. 광주시민들에게 계엄군은 곧 경상도-군이었다.“경상도 군인들만 추려서 전라도 사람들을 몰살하러 왔다”“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여인의 유방을 도려냈다”
이처럼 전라도의 한과 5.18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恨)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슬퍼서 응어리진 마음”으로 표현돼 있다. 가슴에 맺힌 아픈 응어리라는 뜻이다. 전문서적들을 찾아보면 이런 응어리들은 사회적 불평등, 이루지 못한 열망, 비극적 경험 등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전라도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한”을 말한다. 어떤 것이 '한'이냐고 물어보면 대개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어느 지역에 가든 은근한 따돌림을 받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지역이 경상도 지역에 비해 정책적으로 천대를 받아 발전이 덜 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필자는 강원도를 거론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의 유행어가 튀어나왔다.“전라도는 푸대접, 강원도는 무대접”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강원도 사람이지만“강원도 무대접”이라는 말은 이들로부터 처음 들어본 말이다. 무대접과 푸대접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대접이냐고 물었더니“무대접”이라 했다. 결국 전라도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사는 푸대접에 대한 한은 경상도에 대한 경쟁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호남인들은 첫 번째로 대접받는 곳은 경상도이고, 두 번째 정도로 대접받는 곳이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는 9등으로 꼴찌라는 말도 한다. 전라도의 한은 9개의 광역 중에서 1등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2등으로 대접받는 데 대한 한인 것이며, 배고픈 한이 아니라 배 아픈 한이라는 생각이 든다. 광주시위가 경상도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하는 유언비어에 의해 확대되고 악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결론 중 하나다. 이러한 결론 역시 광주사태가 순수한 민주화 열정에서 폭발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게 하는 하나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광주소요의 본질은 김성용 신부와 정상용 전의원이 매우 효과적으로 압축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김성용 신부는 광주사태를‘전라도의 한’이 폭발한 것이라 했고, 정상용 의원은‘천대받던 기층세력의 한’이 폭발한 것임을 암시해 주었다. 광주사태는 결국 전라도의 한과 기층세력의 한이 복합하여 폭발한 일종의 ‘한의 사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제 호남인들은 그 한을 버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 호남은 2등지역에서 1등지역으로 상승됐다고 본다. 서해안 지역에는 중국의 발전과 맞물려 최근 10여 년간 많은 정부예산이 투입되어 바야흐로 서해안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5천년 역사를 통해 가장 못사는 거지의 나라를 11번째로 잘 사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대구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은 온갖 수모를 받고 있다. 문맹률이 90%를 넘던 조선 사람들에게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준 건국의 아버지라는 황해도 출신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은 어느 가정집 울타리 밑에 처박혀 있다. 그러나 호남의 영웅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대우는 파격적이다. 광주에는 초 매머드 급의“김대중 컨벤션 센터”가 있고, 해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 그리고 사계의 인물들이 민주화의 성지 광주를 찾아가 고개를 숙인다. 이것이 호남의 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호남주민들은 가슴에서 판소리에 잉태한 한을 도려내고 명실 공히 대한민국 1등지역으로 발돋움 한데 대한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
서울지검의 95년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93명이다. 민간인이 1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1982년3월15일에 육군본부가 작성한 “계엄사”375쪽에는 사망이 189명, 이 중 군인이 23, 경찰이 4, 민간인이 162명으로 집계돼 있다. 검찰 발표에 민간인 4명이 더 추가된 것이다. 군인 사망자 23명 중 12명은 부대 상호간의 오인사격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시민군으로부터 총을 맞아 사망한 군인은 11명인 것이다.
날짜별 사망자 통계는 이러했다. 5월18일에는 사망자가 없었다. 5월19일에는 노동자 및 양화점 점원 2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20일에는 7명, M-16 1명, 카빈 2명, 타박상 4명이다. 5월21일에는 61명, 카빈총 16명, M16 30명이었고 나머지 15명의 대부분은 타박상이고, 일부 기타 총상 및 자상이 있었다. 5월22일에는 29명, 차량사 5명, 카빈 5명, M16 16명 그리고 나머지 3명은 기타총상이다. 5월23일에는 20명, M16 14명, 카빈 1명, 타박 2명, 기타총상 3명이다. 5월24일에는 12명, M16 8명, 카빈 1명, 타박1명, 자상1명, 기타총상 1명이다. 5월25일에는 사망자가 없었고, 5월26일에 타박상 1명이 발생했다. 마지막 날인 5월27일에는 26명, M16이 22명, 카빈1명, 자상1명(윤상원), 기타총상2명이다.
카빈총 사망자를 날자 차례 별로 보면 0. 0. 2,16,5,1,1,1,0,0,1이고, M16 사망자를 날짜 차례별로 보면 0,0,1,30,16,14,8,0,0,22이다. 시내격전이 가장 치열했던 21일에 시민은 M16에 의해 30명, 카빈에 의해 16명이 사망했다. 시민군 총에 시민이 맞아 사망한 것이다. 5월21일은 양측 모두 이성을 잃고 감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이며, 군이 30명의 시민을 쏘는 동안 시민군도 16명의 시민을 쏘았다. 또한 5월21일에는 몇 정의 M16이 이미 파탈되어 있어 M16 사망자 모두를 군에 전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날 시민들은 61구의 시체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20% 이상은 차량사고에 의한 사망한 사람과 시민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체 기간 중 차량사는 12명, 카빈사는 26명이다. 이 38명(23%)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군이 책임질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엄군이 시내를 완전히 떠나 있었던 5월22일부터 26일 사이에 발생한 사망자 61명(37%)은 주로 시민군이 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이 37%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시민군이 져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과 판단이 끼어들 수 없는 급박한 전투 상황 속에서 총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위험한 작전지역에 나타나면 누구나 총구에 의해 오해를 받을 수 있고 피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5월24일(토) 09:55분, 호남도로 광주인터체인지(IC) 부근에서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96연대 3대대 병력(2/29)이 무장시위대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고속도로로 진행하던 중 이를 시위대로 오인한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오인사격을 가하여 96연대 소속 사병 3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2명과 군인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오후 효천역 부근에서는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동 중에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고, 이에 63대대가 응사를 하는 과정에서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듯 전쟁터에 배치된 총구는 한사람 한 사람의 신분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당했다는 말은 성립해도 계엄군이 일부러 광주시민만을 골라서 쏘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5월22일부터 26일에 걸쳐 시민군이 외곽으로 쫓겨난 계엄군을 일부러 쫓아가서 총으로 공격하다가 피해를 입은 이 61명에다 차량사 및 카빈사 38명을 보태면 99명(60%)이 된다. 전체 사망자의 60%에 대해서는 성격상 그 책임이 명백하게 시민군에 있어 보인다. 여기에 기타총상이 9명도 보태야 할 것이다. 기타총상이란 시민군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AR기관총, CAL50 기관총, M1소총 등 다양한 종류의 화기들이다. 계엄군에겐 오직 M16만 있었다. 기타총상을 여기에 더 보태면 군이 책임질 수 없는 죽음이 108명(66%)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 108명의 죽음에 대해 계엄군은 억울한 누명을 써온 것이다.
진압 직후의 계엄사 발표로는 교도소 전투에서 사망한 민간인이 28명, 부상자가 70명이라 했다. 계엄사측은 또“시내버스, 군경 차량 등을 마구 탈취한 폭도들이 시위를 선동하는 과정, 무기탈취를 위해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음주운전 및 과속운전 등으로 인한 전복이나 충돌하는 과정에서 3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탈취한 소총, 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으로 인해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라남도 인들을 위해 계엄군이 지켜주던 도청 그리고 전남대로부터 살인적인 공격을 받다가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병력을 향해 총격을 가하다가 사망한 무장시위대들에 대해서도 계엄군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피해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필자는 80% 이상의 사망자들에 대해서는 성격상 그 책임을 군에 물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억울하게 피해를 본 시민들도 많이 발견된다. 이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계엄군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 44개월간 참전했던 필자로서는 시각이 좀 다르다. 누구나 전쟁터 가까이에 가면 유탄을 맞게 되고, 오해를 받아 피해를 보게 되어있다. 전투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신원을 조사할 틈이 없다. 전투를 탓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 낸 병사들에게 대해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필자가 광주시민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주유소에서는 묻지 않고 휘발유를 주었기 때문에 어느 한 광주시민이 타이탄 트럭으로 휘발유를 네 번째 집으로 가져 가다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총탄에 맞아 숨졌다고 한다. 그의 유족 역시 보상금을 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총알아 날아다니는 혼란기에는 억울한 사연들이 무수하고 다양하게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책임은 충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본인은 누구인가? 검찰과 법원과 그리고 이른바 5.18정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장본인이 전두환과 정호용 등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김대중, 복학생들, 재야세력, 유언비어를 퍼트린 세력,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광주시에서 계엄군을 잘못 지휘한 윤흥정과 정웅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의 주장에 동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독자의 몫인 것이다.
여기에서 숫자가 틀리고 맞는 것은 둘째 문제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계엄군과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피해를 전부 계엄군이 다 뒤집어 써왔다는 사실, 계엄군이 수세적 방자였고 시위군이 적극적 공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계엄군이 처음부터 광주시민을 싹쓸이 하려고 무자비한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매도되어 온 사실, 그리고 카빈소총 등으로 시민들을 쏘아죽인 사람들에 대한 정체에 대한 것이다.
언론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광주학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망자 수는 결코 한쪽 만에서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충돌과 쌍방교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부상자 수를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 진다. 민간인 부상자 수는 377명, 군인 부상자수는 117명, 경찰 부상자수는 148명이다. 군경을 합치면 265명이다. 부상자 수의 비율은 민간 대 군경이 1.4: 1인 것이다. 쌍방이 엇비슷한 것이다. 이를 두고 군경이 일방적으로 시민을 공격하였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숙제로 남는 것은 사망한 사람 중 13명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5.18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중 상당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 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으며, 또한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소총 등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뒤에서 쏜 조직적인 세력이 바로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아닐까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만을 쏘았다고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오발사고도 더러 있었지만 이는 극히 소수였다.
한편 23명의 계엄군 사망자는 5월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명,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1일 전사자는 3여단 16대대의 정관철 중사로 계엄군의 차량에 깔려 즉사했고, 21일 및 22일의 전사자 6명은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의 사격을 받아 발생했고, 24일의 11명은 교도대로부터 오인사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사자는 광주시 재탈환작전에서 발생했다.
무등갱생원의 M-16무장 36인조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17권 69-95쪽에는 윤영규(당시 42세, YMCA이사)가 “살육의 낮과 밤”이라는 제하로 쓴 글이 들어있다. 그는 광주사건으로 1년6월의 징역형을 받은 후 1987년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 초대회장, 1989년에는 전교조 초대위원장을 지낸 사람으로 긴급조치9호 위반 등 화려한 운동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들어있다.
“항쟁 6일째 되는 날이다. 계엄군은 끊임없이 교란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계엄군 손에서 벗어난 광주는 계엄군에 의한 잔악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여학생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젖가슴과 음부가 칼로 난자된 시체였다. 얼굴 등이 칼에 찢겨져 알아볼 수 없어 교복에서 나온 학생증으로 신원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에 그을린 시체도 여러 구가 발견되었다.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공수대들이 있다는 것을 서방지역에 있는 시민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지만 화염방사기의 사용이 사실로 목격된 것이다.”(85쪽)
“무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힘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 회수된 무기는 카빈총을 비롯하여 권총 M16소총 등 약 2천5백여정이었다. 도청 수습위와 학생 수습위 일부는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며 무기를 회수할 것을 통정적으로 애원했던 것이다.”(88쪽)
“그러나 유일하게 총기가 회수되지 않은 곳은 기동타격대와 36인조 무장조였다. 36인조 무장조는 일종의 비상대기조였는데 이들은 수류탄, 대검, M-16자동소총으로 무장되어 함께 행동하고 함께 움직였다. 기동타격대는 시위 외곽순찰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무기 회수가 어려웠지만 무장조는 도청 민원실 강당에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민원실로 갔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들어가자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오게 된 취지를 설명하자 그들은 긴장한 채 물끄러미 처다 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들 중 한명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선생들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 . .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일어났다. ‘우리는 무등갱생원에서 나온 사람들이오. 당신들은 총을 반납하고 돌아갈 집이라도 있소. 그러나 우리는 총을 반납하고 나면 돌아갈 집은커녕 밥 한 끼 얻어먹을 데도 없소. 그런데 이제 끝났으니 느그들 돌아가라 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당신들도 아시다 시피 갱생원은 공수대 포위선을 넘어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총을 가지고 있어야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오갈 데 없는 우리에게 총을 달라는 말은 죽으라는 이야기 하고 같습니다. 차라리 죽으면 싸우다 죽겠습니다.’”(93-94쪽)
이상의 글은 5월23일 광주시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우선 광주세무서는 5월20일 밤 11시경에 어린 아이들이 방화하는 것을 공수대원들이 우연히 발견하여 아이들을 쫓아버린 후 21일 새벽 2시에 공수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또 다시 방화됐다. 그런데 그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여학생이 잔인하게 죽어 있었고 불에 그을린 시체들이 여러 구 있었다는 것은 공수대원들의 소행으로 보기 매우 어렵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불순분자들이 저질러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워 광주시민을 분노케 한 심리전(모략)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5월23일에는 기동순찰대원들이 가동되던 때였다. 기동타격대는 그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기동순찰대는 몇 명 단위로 팀을 짜면 1조, 2조 하면서 인정해 주었고, 강경파 김종배가 시민군 지도부를 장악한 이후부터는 기동타격대가 운용됐다. 기동타격대란 낯선 사람들이 모여 5-6명씩 조를 짜서 1개 팀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기동타격대는 모두 7-13개 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교조 초대 회장이었던 윤영규가 말한 36인조는 분산되지 않고 36명 단위로 줄곧 함께 행동했다고 한다. 이는 시민조직이 아니라 특수 조직인 것으로 생각된다.
시민들은 모두 낯선 사람들끼리 조를 짰고, 1개 조라 해봐야 낯선 사람 5-6명이 모인 조직이다. 그건데 이들은 36인조이고, 줄곧 함께 움직이고 함께 행동했다고 한다. 당시 광주에는 무등갱생원이 있었으나 규모가 아주 작았으며 2003년10월20일에 광주희망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한다. 수용자들은 18세 이상의 지체부자유자, 버려진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이 알콜중독 등으로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라 하며 지금 현재 이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가 남녀 합해 10여 명 정도 있다고 한다. 광주희망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니 1980년 당시에는 그 규모가 아주 작았다고 한다. 이런 갱생원에 36명씩이나 되는 전투인력이 존재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이며, 갱생원을 팽개치고 36명씩이나 광주전투에 동원될 수도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까지 계엄군이 탈취당한 M-16은 불과 7정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수류탄, 대검, M-16으로 무장돼 있었다 한다. 5월23일은 모두가 공수부대를 이겼다는 기쁨에 도취되어 차들을 타고 총을 흔들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거리를 질주하던 때였다. 바로 그때 이들 36명은 계엄군이 지키다 버리고 간 도청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 심각하게 의논하고 있었으며 모두가 환호할 때 그들은 고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6명 단위로 시내에서 함께 움직이고 함께 행동한다면 시내에 깔린 정보원들에 의해 금방 발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들 M-16 36인 무장조가 광주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외부인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총을 내놓지 않기 위해 순발력을 발휘했고, 그 순발력은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들의 말에는 어딘가 품위가 들어있다. 김종배나 박남선 등과 같은 과격파 젊은이들이었다면 막말을 하거나 총알을 장전하거나 총으로 때리는 등 폭력을 썼을 것이다. 간단한 언행에 나타난 그들은 훈련된 사람들이고 훈련된 특수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5월27일 광주시 재진입작전 시에 사살된 시민들 중에는 이들에 어울리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없다. 집단으로 5월27일 이전에 자취를 감추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들이 북에서 온 특수요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광주세무서 여학생 난자 사건이나 시체를 불에 그을려 놓은 행동은 공수대원들이 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광주시민들이 저지른 행동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제주도 4.3사건에서 공비들이 보여준 끔찍한 살해 방법과 똑 같은 방법이며, 그래서 필자는 이 36인무장조가 고도의 심리전 차원에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18민주화투사 윤기권의 월북사건
1991년3월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3월4일, 광주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 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는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광주의 열사 윤기권의 월북사실을 보도했다. ‘월간 말’도 1991년 5월호 “5.18 특집기사”에서 “윤기권은 1980년 5.18당시 광주 대동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광주 5.18유족회 회장 전계량씨의 아들 전영진(사망)과 동기 동창이었다. 윤기권은 월북 전까지 광주시내 모 극장에서 선전간판 그리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월북하기 위해 광주를 떠나기 전 당국에서 2억여 원의 광주보상금까지 수령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는 5.18과 북한이 보이지 않게 연결돼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5.18단체 건국60년 개념 배척사건
국가보훈처와 대한민국건국6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강영훈 전총리 주도)가 건국 6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국민화합을 도모키 위해 2008년8월9일부터 31일까지 대표적 민주화 성지인 ‘서울4.19민주묘지’와 ‘광주5.18민주묘지’에서 “2008 국립묘지 설치예술제”라는 대규모 예술제를 동시에 마련했다. 경건한 추모 분위기가 강조되던 국립묘지의 이미지를 바꿔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탄생케 하자는 뜻도 담겼다 한다. 4.19묘지에는 경내 입구, 연못, 잔디광장에 무궁화와 태극기 등 한국의 상징물과 색깔을 이용한 대형 설치작품들이 전시됐고, 5.18묘지에는 추모, 치유, 조화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통해 희망, 염원, 민주의 바람을 선사했다고 한다.
4.19 묘역을 찾은 시민들은 신선한 충격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8월23일의 뉴스를 보면 5.18단체와 일부의 광주시민들이 5.18묘지에 건국60주년은 수용될 수 없다며 심하게 반발했고, 보훈처는 예술품들을 철거한다고 했다. 논란이 되는 작품은 중앙통로에 설치된 김해곤 섬아트 연구소장의 ´치유´라는 작품인데, 치유와 안정을 상징하는 2개의 깃발에 각각 ´건국´과 ´60년´이라는 글자가 노란색으로 크게 쓰여져 있다 한다. 이 "건국 60년"이 싫다는 것이다. 5.18단체는 "광복과 건국에 대한 논쟁을 떠나 5.18 영령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마련된 5.18묘지에 이 같은 성격의 작품을 설치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에 강력 항의했고, 이 지역 시민들과 광주시 민주당도 공식적으로 반발했다.
4.19와 5.18은 분명히 다르다. 4.18 묘역은 이번 건국60주년 기념 및 국민화합 예술제를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5.18묘역은 건국60년이라는 개념이 수용될 수 없다며, 거금을 들여 예술가들을 동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여 만든 예술작품을 철거하라 한 것이 다른 것이다. 이는 4.19와 5.18이 비록 같은 민주화 명찰을 달긴 했지만 이념의 스펙트럼에서는 정 반대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만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5.18묘역은 분명 국립묘역이다. 국립묘역은 누구나 가서 참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5.18묘지는 사람을 선별하여 입장을 시킨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는 곳이 바로 5.18 묘역인 것이다.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별도의 해방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5.18묘지를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면 국가시책에 따르는 것이 의무일 것이다. 국가시책에 따르기 싫으면 국립묘지로 지정하지 말고 비정부 단체 명의로 관리해야 할 것으로 본다. 관리비용은 국민이 대고, 묘지를 관리하는 단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어디가 잘못돼도 많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여기에도 5.18단체의 이념적 정체성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2008.9.25.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http://www.systemclu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