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에 관하여
할머니!
지금까지의 진실을 모두 알고 나서도 저는 곧바로 성당에 찾아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에서 들은 성모님에 관한 왜곡된 의문점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고마우신 주님께서는 그분 어머니에 관한 불필요한 오해와 의심을 말끔히 씻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1. 동정녀 마리아를 성모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분을 공경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할머니!
예수님께서 사시던 곳과 활동하시던 곳을 성지(聖地)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열 달동안 그분의 감실이었다가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를 성모(聖母)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성서에 나타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단순하고 완전한 신앙으로 받아들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수락하셨고 (루가 1, 38), 그렇게 하심으로써 신이요 인간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낳아 주셨습니다.
그 수락은 지금 생각하면 "온 백성이 마리아를 복되다"(루가 1, 48) 일컬어 영광스러운 일이겠으나, 그 당시는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생애는 침묵 속에 숨겨져 있지만 인간을 그리스도께 다가가게 하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셨음을 성서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웬일인지 마리아에 관한 한 부정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원래 성서에는 성모 마리아에 관한 한 대부분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는 말씀들만 쓰여져 있지요.
구약에 예언되신 마리아(창세 3, 15; 이사 7,14)는 우리 구원의 협조자로서 활약하셨고 (루가 1,30, 38), 십자가 아래서 사도 성 요한 을 대표한 우리의 어머니도 되시며 (요한 19, 26-27), 전 생애를 통해 볼때 교회의 모범이신 마리아이십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면 그분을 낳으신 마리아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는 마르틴 루터나 칼빈 등 소위 종교 개혁자나 또는 매우 열심하고 주님으로부터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애통해하고 통곡한다 한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직접 보시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만큼 애통해 할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모르면서 저는 개신교에 있을 때, 왜 그렇게도 그분을 헐뜯고 비방했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도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두분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할 때면 자주 쓰시던 말씀대로 제가 잠깐이나마 '마귀'에 씌었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기야 원래 무식한 녀석이 용감한 법이니까요...
지금은 무척 후회하면서 평생 통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은 성서에 성모님에 관한 말씀이 너무나도 많이 쓰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서는 성탄 때에 마지못해 읽는 탄생의 성서 구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시하거나 일부러 곡해하여 해석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개신교(특히 한국) 신자들도 아래의 말씀은 널리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구세주 탄생 예고 (루가 1, 26-28)에 "예"라고 답변하심으로써 당시 돌로 쳐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도 무릅쓰고 온전히 하느님 성부께 순명하셨으며 (루가 1, 38), 이 같은 동정 어머니의 순명과 협력은 성령으로 잉태되신(루가 1,35) 예수님을 지상 삶에 태어나시게 하였고 (마태 1, 18-25; 루가 2, 1-7), 성모님의 팔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성전에서 그분을 봉헌함으로써 그분을 만민에게 '계시'의 빛으로 드러내셨으며(루가2, 22-38),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 마음을" (루가 2, 35) 한 평생 맛보아야 했으며, 성모님의 엄마다운 사랑은 위험에 처해 있던 유년 시절의 그분을 날마다 보호하는 귀한 도움이 되었으니, 성모님이 지어준 옷을 입고 더 어릴때는 성모님의 품안에서 폭군 헤로데의 칼날을 피하였습니다. (마태 2, 13-15) 성모님의 침묵은 예수님의 말씀이 꽃피는 정원이었으며(루가 2,19) 한편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루가 2, 51). 성모님의 확고한 믿음은 그분의 신적 중재를 채촉하여 그분 사명의 때를 앞당기셨으니(요한 2,1-12), 우리의 성모님께 대한 전구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골고타에 오르시던 그분에게 힘이 되어 드린 것은 제자들마저 도망친 그 비통한 순간에도 어머님은 그분 가까이 계셨음이며 (루가 23,28) 십자가 아래에서 인류를 대신한 요한 사도와 함께 계심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요한을 대표한 우리 인규의 어머니임을 확인받으셨으며 (요한 19,25-27),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뒤에는 다시 동정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피를 씻기우시고 만민에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루가 23,53:피에타)
오직 '성경, 성경'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이 같이 중요한 성서 말씀들은 애써 의식적으로 왜면하면서도 그 어머니를 헐뜯고 비방한다면, 옛날 저처럼 크게 후회할 것이며 이 세상에서 참회의 기회가 주어지지 못할 경우 저 세상에서는 반드시 크게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 (마태 24, 51)입니다.
혹자는 성모 마리아 공경이 지나치면 하느님의 질투와 노여움을 일으킨다는 말도 하지만 이는 당치도 않은 유치한 소리일 뿐입니다.
사람도 자기 자녀를 질투할 아비가 없습니다.
또 자기 재능으로 설계하고 세운 대성전을 매우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사람을 보고 질투하고 노여워할 건축가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살아 있는 성전이신 마리아는 대건축가이신 하느님의 걸작품이 아닙니까? 성모님께서 지니신 모든 것은 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를 경애하고, 공경하며, 찬미하는 것은 곧 그의 아들 예수님께 대한 지극한 애정과 충성의 표현이며 주 예수님의 탄생과 구속의 은혜를 영원히 기념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을 공경하지 않고 또 누구를 공경해야 한단 말입니까?
2.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이십니다.
저는 개신교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실 때만 동정녀라고 배워 왔고 그분들은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은 우선 성서에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고" (마태 1,25)라는 구절을 들어 마리아에게 예수님 말고 또 다른 자녀들이 있는 양 추측하고 또 다른 성서구절 (마태 12,46)을 들어 이를 단정해 버립니다.
먼저 마태오 복음 1장 25절에 나오는 '까지'라는 한정사는 결코 마리아와 요셉과의 정결한 동거 상태가 예수님 탄생까지만 계속되고 그 후에는 변경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사야 예언자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이사야 7,14)라는 예언이 적중되었음을 명시하는 말씀일 뿐입니다.
이는 개신교 신학자 후커(Hooker)도 마태오 복음의 '까지'를 곡해하여 성모 마리아의 존엄성과 동정성을 욕되게 함을 통탄하면서 "어떤 일이 어떤 사건이 발생 될 때까지 존재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그 후에 필연적으로 존재하였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Book V ch Xiv).
성서의 다른 곳에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2사무 6,23)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미갈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두었다는 말이 아니며,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하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시편 110,1: 마르 12,36)라는 말씀은 그 원수들을 정복한 뒤에도 늘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마태 22,44:마르 12,36:루가 20,4)
다음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맏아들'이라고 했으니 필경 다른 자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다 풍속에는 처음 태어난 아들을 그 후 다른 자녀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맏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법이 있었으므로(출애 13,2:34,19) 외아들보다 맏아들이란 법률적 용어를 쓰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독생성자', 즉 외아들이시지만 (요한 1,14-18)히브리서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히브1,6)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둘째, 셋째 아들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구약 시대에 하느님이 택하신 백성은 '이스라엘' 뿐이었지만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출애 4,22)라고 하시었습니다.
또 성서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이 있어 마리아에게 또 다른 자녀들이 있다는 말은 성서를 깊이 또 자세히 그리고 신중히 읽지 못한 데서 오는 추측과 잘못된 자유 해석에서 오는 오해입니다. 성서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말씀은 마태오 12장 46절, 13장 55절, 마르코 6장 3절, 요한 2장 12절, 7장 3-5절, 사도행전 1장 14절, 갈라디어 1장 19절, 고린토 전서 9장 5절 등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라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은 자세히 읽어보면, 성모 마리아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 다른 마리아가 낳은 자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서의 기초가 되고 초기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성전(聖傳)을 내버렸으니 부득이 이를 성서로 증명할 수밖에 없겠군요.
성 마태오는 십자가 밑의 여인들은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마태 27, 56) 라고 기록하였고, 성 마르코는 "그들 가운데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마르 15, 40) 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바로 이 마리아가 야고보와 요셉을 낳은 다른 마리아입니다.
좀더 설명한다면 성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 글에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글레오파는 알패오라고 도 불리는 사람인데, 이는 마태오가 레위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오로로 불리는 경우와 꼭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우라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태 10,3: 마르 3,18;루가 6,15)요, 타대오(마태 10,3)는 야고보의 아우(마태 13,55; 루가 6,16; 사도1,13)이므로 이 야고보 형제의 아버지는 성 요셉이 아니라 알패오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들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고 다른 마리아, 즉 알패오라고 하는 글레오파의 아내인 마리아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마리아는 성모님의 아우인 즉 예수와 야고보, 타대오는 예수님의 외가 쪽 4촌 형제인 것이며 이 같은 사실은 기원 후 1500년까지는 아무런 의심없이 믿고 내려오던 평범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6촌, 8촌, 고종, 이종끼리 서로 형님, 동생하는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보고 즉시 친형제 사이라고 속단하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그는 한국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마치 요새 일본이 그들의 역사 교과서를 왜곡(歪曲)하듯이 남의 족보마저 왜곡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우리와 비슷한 실정임은 온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또 성서에는 이 '형제'라는 말이 더 넓은 의미에서 쓰여지고 있음을 우리는 찾아볼수 있습니다. 친척을 형제라 부르기도 하고 (욥기 19,13) 숙질간, 당숙-당질간, 이숙-생질간에도 형제하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 형제라는 말은 레위기 10장 4절, 창세기 11장 27-31절, 13장 8절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 한국어판 개신교 성서에는 이를 모두 '골육', '친족', '조카' 또는 '생질'이라고 옮겨 놓았으나 원전에는 모두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머니!
가톨릭 교회에서는 동정 생활을 매우 귀중하게 평가합니다. 십 수세기를 거쳐 오면서 교회 안에는 수많은 동정 남녀들이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또한 수많은 동정 부부도 있어 왔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신유박해 때 (801년) 전주에서 동정 부부로 치명 하신 전주 이씨 가문의 이순이 (누갈다)와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요한) 부부가 그 좋은 예이며 이들의 무덤은 1914년 전주에 있는 치명자산으로 이장되어 우리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는 국내의 순례지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 왕조 실록(순조대왕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머니, 예수님 탄생 전후 시대의 환경으로서는 나이 든 처녀가 동정 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으며 아니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그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의 생활이 안전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도 이런 동정 동거 생활이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생아 대우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성모 마리아가 부정한 여자로 몰리어 율법의 제재, 즉 돌로 쳐죽임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초대 교회때 부터 일치하여 인정되어 오던 바입니다.
성 야고보 사도로부터 전해 오는 기도문에는 "우리 지극히 영화로우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고 쓰여져 있습니다.(Bibliotheca Max Patrumt 2p.3). 또, 이미 4세기 성 에피파니오는 말하기를 "동정 성모 마리아라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다. 성모는 영원히 동정으로 계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평생 동정이심을 부인하는 분들의 주장대로라면 30대 초반인 예수님에게 누이들과 친동생들이 그렇게 많고 또 믿지 않는 동생들도 있고, 심지어 열두 제자 중에도 둘씩이나 있었다(야고보, 다태오)는데 왜 하필 나이가 가장 어렸다고 알려진 친척도 아닌 사도 요한에게, 당신 어머니를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유언으로 맡기셨으며 그 제자는 왜 자기 집에 모셨겠습니까?
어느 모로 보든지 성모 마리아는 평생 동정을 지킬 수 박에 없으셨습니다.
성부의 최대의 사업, 즉 성자를 낳고 가르시는 거룩한 일을 맡길 여자는 가장 온전한 "은총을 가득히 받은...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된 이"(루가 1,28)라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반대자들의 말처럼 성부의 아들 예수님을 낳으신 후 한 평범한 여자로 돌아갔다 합시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를 미리 모르셨을 리도 없고 또 아시고서도 당신 아들의 어머니로 택하셨을리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어느 성덕 높은 분을 의형제 (義兄第)로 삼으려 할때 만일 그가 머지 않아 범부(凡夫)로 전락할 것을 미리 안다면 아예 그와 결의를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엄숙히 동정을 밝히신 성모 마리아로서는 허원 (許願)한 그의 동정을 파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보존된 그 동정을 헌신짝처럼 버렸을 리도 만무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성령)을 감싸"(루가1,35)정결을 보전하여 주신 마리아의 속화(俗化) 주장은 곧 하느님과 외아들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성령을 모독하는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원죄에 물듦이 없이 태어나셨습니다.
할머니!
이런 말씀은 너무나 생소한, 아니 어쩌면 처음 들어 보시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죄에는 원래 원죄와 본죄가 있습니다.
원죄는 최초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을 거슬러 지은 죄로서 그 이후 모든 인간은 태어 날때 뿌터 원죄에 물들어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태어난 이후 짓는 죄를 본죄라 하는데, 원죄와 본죄는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깨끗이 사하여 지고 그 이후 짓는 본죄는 고해성사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는 경우 통회(상등)로써 사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실 그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또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으로 말미암아 털끝만치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전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모님은 예정되어 있기에 우리와 달리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미리 구속되셨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상경지례를 드립니다.
성모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은 창조, 구원, 성화의 구세사적 과정을 통해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이 넘치는 사랑을 나누시고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존재속에 당신의 본질인 선성 (善性)을 부여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범죄와 그들의 자유 의지 남용으로 암흑과 죄의 권세 속에 빠지게 되었고 여기에서 뱀인 마귀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징벌이 선언됩니다.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15). 이 말씀에 등장하는 여인은 성모마리아요, 그 후손(아들)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독사 뱀은 마귀(사탄)입니다. 이것은 제 주장이 아니요, 고금의 성서학자들(개신교 포함)의 일치된 해석입니다.
한편 사랑의 하느님게서는 첫 인간의 범죄(원죄)로 인해 죄악의 권세속에 헤매고 있는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시고자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갈라 4, 4-5)
마귀는 예수님께도 성모님께도 모두 원수입니다. 그 원수 관계는 절대적이요, 영구적 성질의 것입니다. 그런즉 성모님께서 혹시 잠시라도 원죄에 물들었다면 이는 곧 성모님께서 마귀의 종이 되셨다는 말이 됩니다. (더불어 뱃속의 예수님까지도).
범죄와 구속에서 볼 때 창조 이래 인간의 범죄의 장면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마귀' 세 주역이 등장합니다. 또 한편 인류 구속사업의 장면에는 성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제 2의 아담인 '구세주 예수'와 제 2의 하와이신 '성모 마리아'그리고' 대 천사 가브리엘'의 세 주역이 등장합니다. (루가 1, 26-27).
그런데 제 2의 아담에 예수님은 첫 번째 아담에 비해 무한히 초월하시고, 대천사 가브리엘은 악신 마귀에 비해 그리고 성모님은 하와에 비해 훨씬 탁월하십니다. 그런데도 성모 마리아가 원죄에 물들어 잉태되셨다면 성모님은 하와에 비해 훨씬 비천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와는 적어도 창조 당시(아담,하와)에는 원죄가 없는 존재였기때문입니다. 살인자 카인의 어머니 하와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 마리아보다 우월하다고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한없이 정결하신 하느님께서 비록 한순간일망정 사탄의 노예가 되었던 여인을 어머니로 삼는다는 것은 곧바로 하느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그의 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심에 있어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미리 원죄에 물듦이 없이 만들었다고 해서 죄 많은 인간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닌것입니다.
공식 예절에 쓰이는 기도문은 가장 권위있는 경전입니다. 그중에도 성 야고보 사도로부터 유래하는 전문(典文)에 성모님께 대해 "지극히 거룩하시고 무구(無垢, Immaculata)하시고, 지극히 영화로우신 평생 동정이신 천주의 성모 마리아" (Biblitheca Max Patrum t 2 p.3)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마로나이트 전문(典文)에는 "우리 거룩하시고 찬양하올 무구(無垢)의 여인" 이라고 불렀으며 성 바실리오의 알렉산드리아 전문(典文)에도 성모를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영화로우시고 무구(無垢)하신이" 라고 하였습니다. 성모의 무구(無垢)는 곧 성모의 원죄에 물들지 않으심으로 이해한 말이며 이는 초대 교회 이래 확고하고 불변한 이해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어머니 없는 교회에서 외로이 헤매던 저에게 어머니를 찾아 주신 그분의 손을 꼭 잡고 안심하고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해 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4.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께 기원함은 옳은 일인가?
물론 옳은 일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할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전구(轉求)를 요청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은 사도신경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에서 말씀드린 바 그대로 입니다.
유다 지방 가나라는 작은 마을 잔치의 술이 떨어지는 것까지 염려하시는 성모 마리아께, 우리의 영혼 사정을 위한 전구와 우리 육신의 사정마저 대신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며 옳은 일입니다. 개신교 신자들도 어려운 일이 있을때 목사나 장로 또는 열심한 신자 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여 서로 도울 수 있거늘, 즉 죄인인 우리도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서로 도울 수 있거늘, 모태에서부터 찬사들의 노래 가운데 싸여 영광스러운 승천시까지 한결같이 결백하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부탁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으며 또 그 기도의 힘은 우리보다 얼마나 더욱 크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권을 주신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주겠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루가 22, 29-30) 라고 말씀하셨고 또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천사들까지도 심판하실 것을 모르십니까?"(1고린 6,3)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사도들이 하느님의 권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같이 식탁에 앉을 수 있다면, 가브리엘 대천사의 말씀대로 '은총이 충만하신 마리아'인 성모님께서 어찌 하느님의 권위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시면서 그의 아들들인 우리의 대언(代言)자로서 주님 앞에 서지 못하겠습니까? 사도들이 예수님의 심판권을 조금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무서운 권위를 지니셨다면 어찌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아들의 지존하신 대언(代言)권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으시면서 대언자 노릇을 할 수 없겠습니까? 심판관의 직권은 대언자의 직권보다도 더 큰 것입니다.
제자인 사도들이 심판권을 갖는 것에는 놀라지 않으면서도 그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가 대언권을 갖는 것에는 시비를 걸려 한다면 이는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이사 49,15). 비록 성모님께서 하늘 나라의 영복속에 계실지라도 당신 아들을 따르는 우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며,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심은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또한 이것이 2000년 동안 사도 전래로 이어오는 성교회의 확고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닌 유명한 시인 애드거 알렌 포오도 하늘의 성모님께 기도 드리기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와 함께 기도하시기를 좋아하시며, 우리가 선과 사랑과 성덕의 길을 걷는데 필요한 모든 은총을 청하는 전구의 어머니이십니다.
평생 동정이신 어머니는 죄중에 있는 그분의 자녀들이 회개로 마음이 변화되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은총을 얻어주시고, 온갖 고통과 병든 그분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모든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 그것을 유순히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봉헌토록 도우십니다. '주님의 뜻'에 대한 자녀다운 신뢰와 순종으로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게 하는 은총을 얻어주시며, 그분의 선량한 자녀들을 위해서는 선에 항구하는 선물을 얻어 주십니다. 그분의 모성적 임무는 또 지금도 세상에서 자행되는 엄청난 악에 대해 보상을 바치는 임무입니다.
거룩한 미사가 봉헌될 때마다 그분 자신도 제관과 일치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 아들의 보배로운 피를 바쳐 드립니다. 그분 아들 예수님의 피만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온갖 죄악과 증오와 불순결과 불의를 전부 씻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의 여정에서 거두어들인 모든 고통을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에 결합 시키십니다.
실제로 성모 마리아께 도움을 청하여 얻어진 역사적 사건을 한 가지만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중세 십자군 시대의 일로서 막강한 터키의 이슬람군은 비엔나를 포위 공격하면서 그리스도교국 전체를 침략, 파괴하려 위협하였습니다. 숫적으로나 화력(무기)으로나 이슬람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때 허약한 그리스도교측 군대는 오로지 성모님께 도움의 기도를 청했으며 군기(軍旗)에 마리아의 이름을 써서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분의 전구에 힘입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교 세계를 이슬람의 파괴로부터 기적적으로 구하시고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9월 12일을 '마리아의 성명(聖名)축일'로 제정하고 오늘날까지 그날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그분의 전구와 이를 허락하신 하느님게 감사의 제사를 성대하게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동구 공산권의 몰락은 1917년 포루투갈의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의한 온 세계 신자들의 기도의 응답임은 그분을 공경하는 모든 신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현실입니다.
할머니, 저는 할머니께서 존경하던 목회자들께 아래와 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존경하는 목회자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르며 사역에 종사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다면 이제 이렇게 주님을 찬양해 보십시오.
"야훼여, 이 몸은 당신의 종이옵니다. 당신 여종의 아들인 당신의 이 종을 사슬에서 풀어 주셨사옵니다."(시편 116,16) 라고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p.g.250~269
-주님 저를 가톨릭교회로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김 안토니오 지음, 동진 A.(안토니오)TNP(출판);
천주교로 개종한 삶의 체험을 서술하는 형식을 통해 가톨릭 교회의 정통교리를 공박하는 개신교의 문제점과 허구성을 정확히 지적함으로써 체험기를 뛰어 넘어 신자들의 재교육용으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천교구장 나 굴리엘모 주교
Nihil Obstat:
Rev. Paul Gyun
Censor Librorum
Imprimatur:
William J. McNaughton, M.M.
Episc. Inchon
2001.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