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남선 - 해에게서 소년에게
2. 김소월 - 진달래 꽃
3.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4. 김동환 - 산 너머 남촌에는, 북청 물장수
5. 김동명 - 내 마음은, 파초
6.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7. 정지용 - 고향, 향수
8. 유치환 - 생명의 시, 울릉도
9. 이육사 - 광야, 절정
10. 윤동주 -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11. 박두진 - 해
12. 조지훈 - 승무
13. 김현승 - 가을의 기도
14. 김수영 - 풀
15.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강
16. 한용운 - 님의 침묵
17. 이장희 -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18. 이병기 - 난초
19. 이은상 - 소경 되어지이다 (양장시조)
20. 김광균 - 와사등
21. 박목월 - 나그네
22. 박인환 - 목마와 숙녀
23. 홍사용 - 나는 왕이로소이다
24. 박용철 - 떠나가는 배
25. 이 상 - 오감도 제 1호
26. 서정주 - 화사, 자화상, 추천
27. 고 은 - 눈길, 문의 마을에 가서, 상구두쇠
1. 최남선 - 해에게서 소년에게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2. 김소월 -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3.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4. 김동환 - 산 너머 남촌에는, 북청 물장수
산(山) 너머 남촌(南村)에는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북청 물장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5. 김동명 - 내 마음은, 파초
내 마음은
내 마음은 호수(湖水)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玉)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파초(芭蕉)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女人),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6.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7. 정지용 - 고향, 향수
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8. 유치환 - 생명의 서, 울릉도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새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9. 이육사 - 광야, 절정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募)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티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절정(絶頂)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0. 윤동주 -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른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언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의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1. 박두진 -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너머 산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소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12. 조지훈 -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기렁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13. 김현승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국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14. 김수영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5.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강(江)
마음도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 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겄네.
16. 한용운 -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을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며으이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原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은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7. 이장희 -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18. 이병기 - 난초(蘭草)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꽆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19. 이은상 - 소경 되어지이다 (양장시조)
뵈어려 안 뵈는 님 눈 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20. 김광균 - 와사등(瓦斯燈)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기인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서을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기일개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21. 박목월 -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22. 박인환 -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23. 홍사용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지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하!'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섦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는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에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날 밤, 맨재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기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이로소이다.
24. 박용철 -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25. 이 상 - 오감도(烏瞰圖) 시 제1 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26. 서정주 - 화사, 자화상, 추천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 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애미의 아들.
갑오년(甲오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간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추천사(추韆詞)
-춘향(春香)의 말(1)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겟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27. 고 은 - 눈길, 문의 마을에 가서, 상구두쇠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膜)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상구두쇠
조선 철종 때
한양성 밖 장단 지경에
김구두쇠가 있었것다
그가 장 구두쇠네 집에
아들 시켜 장도리 빌리러 보냈것다
빈손으로 돌아왔것다
안 빌려준대요 못질하면 장도리 닳는다고
그러자 김구두쇠
에이 그놈의 영감 구두쇠로군
하는 수 없다 우리집 장도리 꺼내어 오너라
안방 벽장 왼쪽 안구석에 있다
고조할아버지때부터 내려온 장도리다
장단에서 더 가면
개성 구두쇠
거기서 더 가면 해주 구두쇠
개성 구두쇠는
오줌 팔 때 오줌에 물 타는데
해주 구두쇠는
그 오줌 살 때
손라락으로 오줌 찍어 맛보고
물 탔나 안 탔나 보고 사간다는 것이렷다
이런 구두쇠 여러분에 의해
조선 상업이 이루어져 왔나니
그 구두쇠 온데간데 없다니 나라 기우는 것이렷다
암 그렇고 말고
구두쇠도 정기여 민족정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