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까? 육체를 위해서만 골몰하는 삶 인가요?
왜 우리는 침묵을 좋아하지 않는가? 왜 항상 떠들썩해야 하는가? 왜 항상 TV를 켜놓아야 하는가?
당신의 영혼은 바싹 마르고 비틀어져 겨우 숨쉬고 있습니다.
영성훈련 :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변화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을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 암음이니라.(고후 3:18..... 성화)
성화 : 구별되는 세 단계
하나님은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고 거듭 말씀하신다.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구별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처럼 구별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구별되는 데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우리의 죄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의식하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깨닫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남’이 없이는 누구도 구별될 수 없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 단계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마 3:8),
즉 ‘죄에서 돌이켜서 믿음을 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을 떠서 그분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우리 속에서 활동하신다.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처음으로 죄를 회개할 수 있다.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고, 결국 믿음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향하게 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주인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우리를 구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그분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결(거룩함,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과 친밀한 우정을 맺는 방법
: 영성 훈련은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느헤미야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고 말했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순종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성공적인 영적 훈련은 나의 소관사항이 아니고 그분의 일이다. 나는 그분께 충실하면 된다.
그 다음의 모든 것은 그분이 맡으신다. 그분이 맡으시는 것이 곧 은혜이다.
영성 훈련의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즐거워하기 위함이다. 경건의 훈련은 우울한 의무가 아니다.
우리는 이를 갈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친구가 되어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은 기쁨이다.
그분은 우리가 영성적 삶을 즐기기를 원하시는데, 이 영성적 삶을 가능하게 하고 재미있게 하는 것이
바로 경건의 훈련이다. 당신이 일단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큰 축복을 맛본다면,
이 축복을 또 체험하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들도 감수할 것이다. 이런 축복은 영광이요 천국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삶이며, 하나님께 집중하여 그분을 중심으로
삶의 모든 것들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신다.
겉으로는 아무리 선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뜻에 맞지 않으면 거부하는 삶이다.
1) 모든 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신 다는 믿음을 가져라.
신령한 생활을 방해하는 무서운 적은 바로 이기심, 즉 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으며,
그 성결이 가능하도록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제 그 능력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2) 숨기도 (전자렌지식 기도)
우리의 시간 관리에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3) 말씀 묵상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2-24)
"돈에 대한 태도"
돈은 ‘정사와 권세’(엡 6:12)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적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돈’이라는 우상을 이기지 못하면, 그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돈은 단순히 ‘물질의 교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곧 물질적 탐욕이 잘못된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들을 다 성취했다.
즉, 의(義),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를 모두 성취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모든 것을 제공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성결 곧 성화의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성화는 그들이 이루어야 할 일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고린도전서가 분명히 밝히듯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다.
나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것만큼 나를 낙심하게 만든 것도 없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긴다’는 말에는 확고한 내적 결심이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선택하셨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옛 본성에 대하여는 죽은 것이다.
나의 옛 본성에게 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된다. 나는 내가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거룩함을 향한 선택’은 우리를 압도하는 ‘위기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날마다 우리는 우리가 거룩함을 위해 선택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날마다 나는 이미 죽은 옛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기를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나는 새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한다.
4) 하나님께 솔직하자.(솔직한 감정표현: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기뻐하신다)
5)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자.(작은 일에서부터 차근차근)
집중적인 영적인 활동을 위하여 일상적인 것들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6)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공유하자.
하나님의 관심사 : 잃어버린 세계 걱정, 하나님나라의 확장 (마 6:33)
하나님이 소중히 하시는것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 정직, 겸손, 온전히 순종하는 순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 (엡 1:3-5)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
2) 하나님의 가족이 되며 (교제)
3) 하나님을 닮고 (제자도/성화)
4) 하나님을 섬기며 (섬김)
5) 하나님을 전하는 것 (선교/전도)
7) 잘못된(완고한/유전적인) 습관적인 신앙생활에서
첫 사랑의 열정을 품은 신앙생활로 바꾸자. 자기중심적인 마음(육욕에 지배되는 삶)에서
하나님을 나의 중심에 놓는 마음 (성령 충만한 삶)으로 변화를 받으라!!! (롬 12:2)
우리의 감정을 정직하게 살피고 바꾸어야 할 습관을 찾아내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이 당신의 다른 죄들과 문제들과 심지어 성격까지 처리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당신은 성령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했으며, 당신의 신앙은 더 확고한 기초 위에 세워진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볼 때 그분을 닮는 습관이 우리 안에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인격의 변화이다.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부주의, 죄, 타협에 빠져서 첫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8) 하나님과의 우정을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당신에게 행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라. 당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라.
열왕기상 19장 11,12절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어떻게 나타나셨는지를 잘 말해준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하겠다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분은 세미한 소리를 통해 말씀하신다.
약해진다는 것은 자기 의를 다 깨뜨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것이다.
강함이 문제이다.
강함에는 자기 의와 자랑이 있고 사람을 찌르는 아픔이 있다.
자기 의를 깨는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1) 상실을 인정하며 산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며,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2)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광야의 길을 따른다.(광야란? 고독의 장소=기도의장소 ,낮아짐의 처소)
ex) 기도 : 나 자신의 의를 부정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금가고 깨진 항아리처럼 부족하게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언제나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일해
왔다고 생각하지만,자기의에 사로잡혀있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 그래서 나의 습관과 더 나아가 내 안의 나의 자아를 못 박히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은 것.. 이것을 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도록
하나님 인도해주세요...
9) 바쁘시간 일수록(사역하느라, 일상생활에서..바쁘기만하면 일에 매인 것일뿐 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시간을 갖자.
영적 훈련을 율법주의로 변질시키는 것은 ‘마음은 없이 몸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셈이다.
자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평생 영적 훈련을 실행한다.
“영적 훈련을 받은 영혼은 떠다니는 풍선처럼 매 순간의 은혜에 반응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미디어를 통해서 자꾸 다른 데로 생각을 돌리는 것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
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두려워서 자꾸 사람들이나
미디어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은 TV 소리,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속박되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 아침에 다른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잠에서 깬 사람은 자기의 침대에서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하루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시는 모닝커피 시간도 비록 짧지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도 나름대로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깐 밖으로 나가서 조용한 밤을 느껴보라.
이런 작지만 충만한 시간들을 놓쳐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시간들을 되찾아야 한다.
이런 조용한 내면의 시간들은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이것들은 비록 작은 시간이지만 우리의 현재의 의미를 놓치지 않게 해준다.
팔복(八福)의 말씀은 그분의 뜻을 분명히 드러낸다.
1]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영적필요를 인식하는자]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다.
2]애통하는 자 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자]
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성품이 온화한자 ]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인도를 갈망하는자]
5]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비로운 사람 남을 불쌍히 여기는 자]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하느님 앞에 깨끗한자]마음의 청결은 단순히 ‘불순한 생각들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마음이 둘로 나누어지도록 허락하고 악에 굴복할 때 죄가 생긴다.
승리의 신앙생활을 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7]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웃이나 모든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는자]
8]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겪는자]
9]사람들이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거스려 악한 말을 들을때 복이 있나니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박해와 유언비어 등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을 겪는자]
" 만일 너희가 목숨을 갖기 원한다면,그리고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갖기 원하면, 너희는 나와 아버지를 위하여 너희의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너희의 목숨은 너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믿음으로만 행하면 살리라. 그리고 너희가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믿으면 하나님께서 항상 너희와 함께 계셔서 그의 손으로 너희의 결단과 운명을 지키신다. 너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희생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배운 대로만 살아라."
★ 영적 성장이란?
성장의 과정은 많은 시간과 훈련과 인내와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성장을 외면하고 회심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것은 회심이 일순간에 도달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도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전도를 너무 강조하느라고 영적 성장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장’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성숙에 대한 언급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성장하였다고 말한다.
세례 요한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졌다”(눅 1:80).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셨다”(눅 2:52).
신약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공적(公的) 사역에 대한 기록들이 나타나기 직전에 제시되는
마지막 묘사는 바로 ‘자랐다(성장했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요한과 유일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성장한 후에 사역을 감당하셨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권할 때 ‘성장에 관한 어휘들’을 종종 사용했다.
그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할 때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범사에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엡 4:14,15).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이 성장한다고 칭찬하였다(살후 1:3).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 3:18)고 권했다. 그들을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비유하면서 또한 그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말했다.
성장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에 동참하라고 권하는 몇 가지 비유들에서 기본적 은유로 나타난다.
가장 극적인 성장의 은유는 요한복음의 중간쯤에 나타난다(요 12:24).
여기서 예수님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성장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전체는 성장의 은유가 나타난 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성장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이다. 요한에 의하면, 우리의 성장의 목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부분들이 예수님의 삶의 모든 부분들을 닮는것이 성장이다.
성장이 고통일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의 교훈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 성장은 당연한 결과로 주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자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때때로 어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평생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만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 지도자들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행위를 중단하고 성령님께서 활동하시도록 길을 연다면 성장이 시작되고,
신자들은 그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님의 은사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때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아무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행동이 동참할 때 비로소 성장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장의 과정에서 우리는 고통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든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에는 어려움과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운동선수들은 훈련을 시작하면 근육에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할 때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 노력을 해야 하고, 따라서 그것이 고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형벌이나 고뇌 때문에 생기는 고통과는 다르다. 성장을 위한 고통은 우리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이나 노이로제가 아닌 건강을 가져다준다.
대부분의 성장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된다. 이 점에서는 생물학적 성장과 영적 성장이 서로 유사하다. 이런 성장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가 눈에 보일 뿐이다. 더욱이,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런 성장들을 몰라보게 된다.
성장 그 자체는 신비로운 것이다. 성장과 관련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성령님의 일이다.
그분이 성장의 방향과 형태를 결정하신다. 때때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신자의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혼란과 불편 때문에 불평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의 성장을 보면서 놀라움의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영적 성장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을 자꾸 들여다보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다.
자기의 영적 체온을 자꾸 재보는 것은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
왜냐하면 성장은 말없이 조용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건강한 영적 성장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즉 형제, 자매, 목회자, 교사를 필요로 한다.
교만한 마음 때문에 고립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두세 사람은 서로를 건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성장의 방법들을 허락하신다. 예를 들면 기도, 성경, 침묵, 고독, 고난 및 봉사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방법은 공적(公的) 예배이다.
혼자 고립된 상태에서는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적 성장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은밀한 문제가 아니다.
영적 성장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관심을 가질 때 나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게 된다.
낙심의 때를 지나 신앙의 성숙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과정이 평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낙심이 성장을 위한 한 고통임을 깨달을 것이다.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누구나 낙심의 때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낙심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다.
우리의 삶을 평가하되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도록, 그분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그 일을 하시도록 그분께 맡겨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의 계획표를 그분 앞에 내민다. 우리는 우리의 스케줄에 따르기를 시도한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판단하면 교만과 자기만족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분은 도와주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일이 꼬여서 우리가 낙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럴 때 낙심은 우리를 성장 정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극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낙심은 마치 찌르는 막대기처럼 작용하여 우리를 자꾸 성장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 쾌활한 표정으로 낙심을 감추거나 오락거리 등으로 도피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우리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분개하거나 아니면 그 상황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속일 때 사탄은 교묘하게 파고들어 우리를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성령님의 훈련 과정이라고 믿고 환영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성장을 거부하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시작하시려는 일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
내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었을 때,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성령님이 나를 영적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신 능력이 나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데,
이는 심지어 지금도 나로 하여금 영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통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든 다른 능력들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꿇게 만든 능력이 역시 나의 삶 속에서 모든 적대적 세력을
내 발아래 꿇게 만들 수 있는데,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면서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결을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은 단순히 “네가 성결해지도록 너를 선택했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내가 너의 성결을 샀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 나는 네게 거룩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네게 주었다”라고 말씀하신다.
날마다 우리는, 성령님이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를 죄의 무덤에서 일으키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땅에서 들어올려서 하늘의 보좌에 앉히신 것처럼 또한 성령님은
우리를 땅에서 끌어올리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신다.
성령님이 모든 능력들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꿇게 하고 그분을 승리자가 되게 하신 것처럼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적들을 우리의 발아래 꿇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오늘’은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승리의 날이 될 수 있다.
극심하게 시험(유혹)을 당하지만 내 안에 그것을 이길 힘이 없음을 깨닫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그 능력이 지금 나를 죄의 무덤에서 살릴지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 우편에 앉히신 능력이 지금 나를 하늘의 영역으로 옮길지어다.
그리스도를 승리의 통치자가 되게 한 능력이 지금 나를 승리자로 만들지어다”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이 영광스러운 진리들을 붙든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으며,
그 성결이 가능하도록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제 그 능력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