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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_ 김도언

김선미 |2008.11.25 00:54
조회 136 |추천 0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김도언



으로 일약 파리의 젊은 세대 화가들의 중심적 존재로 부상한 쇠라는 일층 야심적인 두 번째의 대작을 준비하게 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이다. 모티프는 전작과 마찬가지인 밝은 야외의 인물 군상(群像)으로, 등장인물의 수도 한결 많아지고, 또한 땅의 부분에서는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콘트라스트를 강조하여 구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되는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 자뜨 섬에 나가 여러 인간상을 정밀하게 스케치했고, 오후에는 아틀리에에서 이들 인간상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고심하면서 장장 3년에 걸쳐 이 대작을 완성했다.
그는 분할주의를 최초로 적용하여 여러 가지 점묘화법에 의해 화면을 전부 색점으로 메웠으며 인물은 정면을 향하거나 옆을 향하게 하여 고대 조각처럼 움직임이 없는 엄숙함을 갖게 하고 있다. 또한 이를 밝은 색채와 서로 작용시켜 모뉴멘탈한 거대함을 실현시키고 있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본 이 그림에서 나는 휴지(休止)를 보았고 그 이면의 어떤 생동(生動)을 보았다.


프롤로그
나는 이제 “그 무렵에”라는 자못 회상적인 어조로 시작되는, 어떤 미심쩍은 글을 쓰려고 한다. 그것은 내 지나온 삶의 그리 많지 않은 질곡들 가운데서도 본의 아니게 가장 미화되기 쉽고 정당화되기 쉬운 어느 한 부분을 냉정하게 되새겨 보려는 의도의 소산이다.
여기에서 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간 나는 많이 망설였고 자칫 진부해지기 쉬운 이야기의 톤과 빛깔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예전에는 이런 고민은 나의 몫이 아닌 줄 알았었다. 확실히 나에게는 생소한 조바심은 첫 문장을 여러 번 지우는 수고로움을 내게 주었으며 그때 즈음에 나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빨리 끝을 내고 보자는 체념 비슷한 심사에 빠져 들게 되었다.
이제 내가 풀어내려고 애쓰게 될 이 이야기에 대한 나의 자세는 애정은 아니고 연민은 더더욱 아니며 그것은 차라리 부정에 더 가까운 것이다.


1.
자기를 배반하고 부정하는 데 열중할 수밖에
없는 청춘은 얼마나 슬픈 것인가.
― 필립 솔레르스 中


그 무렵에 나는 어떤 지독한 예감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그 예감은 희뿌연할 뿐 냄새도 실체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만 같은, 누군가가 내 삶에 틈입하게 될 것만 같은 상서로운 예감이었는데 그 예감의 배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그 예감은 이를테면 밤에 정결히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막 잠자리에 누웠을 때,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다든가 아니면 오늘은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다든가 하는 식의 아주 사소한 예감과도 비슷한, 막연하면서도 점점 확연해지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거의 그 계절을 그 예감의 진원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예감의 실체와 조우하기 위해 종일 거리를 배회하는데 소비했다. 그러던 중의 어느 날 나는 집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 내가 어떤 연유로 그곳에서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는지, 내가 기다리고 있던 버스는 어디어디를 경유하는 버스였고 주로 어떤 승객들을 태우는 버스였는지 그리고, 그 버스를 타고 나는 어디를 가려고 했었는지 지금에 와서 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확실한 것은 그때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였고 따라서 우장(雨裝)을 갖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에 정류장 일대는 매우 혼잡해졌는데 우선 비를 피하려고 피아노 학원 ―그것이 피아노 학원이었는지 미술학원이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처마 밑으로 뛰어든 사람이 다섯이고 10미터 정도 떨어진 오락실로 뛰어 들어간 사람이 또 대여섯 정도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연찮게도 어떤 여자와 나만 원래의 자리에 남게 되었는데 그 즈음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빗줄기는 한결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때 아마도 나는 여호와가 미리 노아의 가족과 지상의 정결한 짐승 일곱 쌍씩을 안전하게 피신시키고서 나머지 부정한 생명들에게 가차없는 물세례를 주었던 창세기의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다.
빗줄기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세차게 쏟아졌고 방주에 올라 탈 기회를 알면서도 놓친 죄 많은 그녀와 나는 고스란히 그 비를 맞고 있었다. 그녀의 젊고 예쁜 얼굴, 예쁜 옷이 비에 젖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변변찮은 핑계에 지나지 않으리라. 아마도 나는 폭우 속에서도 몸을 피하지 않는 그녀의 자학이 궁금했을 것이다.
“왜 비를 맞지요?”
“당신은 그러면? ”뜻밖에 그녀가 반문했다. 믿진 않겠지만 나는 그 순간 나를 사로잡아오던 예감의 끈적끈적한 느낌에서 나의 몸이 스르르 풀려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버스가 곧 올텐데요. 뭐”
“비가 곧 그칠텐데요. 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그 다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아니면 누가 나를 속이는 사이 그녀에게 ‘나를 따라 와요’ 손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빗속에서 잠시 웃었을까. 내가 앞장서서 걷고 그녀가 말없이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이런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서도 나는 전혀 당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오랜동안 나를 괴롭혔던 예감 덕분이었을까. 그 예감이 나의 몸을 적당히 예열시켜 놓았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는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고 보도에 군데 군데 물구덩이와 물줄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소리 없이 뒤따라오던 그녀는 이따금 그것들을 이용하여 발로 물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미 모든 것은 젖어 있었으니까.
그녀와 나는 천변을 걸어서 내가 화실로도 쓰고 있는 자취방에 도착했다. 자취방 문으로 통하는 육중한 철계단을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텅, 텅, 공명음이 울렸는데 물 먹은 바지가 뻑뻑해져서 걸음을 옮겨 놓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치마를 입은 그녀가 자춤거리는 나를 앞질러 방문 앞 난간에 섰다. 계단은 스물여덟 계단이다. 그때 그게 내 나이였다.
“뭐 하는 곳이지요.”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제가 사는 방입니다.”
방문 자물쇠를 잡는 내 손에 녹물이 스며들었다. 시뻘건 녹물이 내 손바닥의 손금을 따라 집요하게 흐르는 것을 아마 그녀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빗속에서 잠시 찡그렸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
원래 이 방은 방이 아니라 골판지를 쌓아놓는 창고였었는데 골판지 공장이 다른 도시로 이주한 다음부터는 줄곧 무신경하게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가 이 곳에 방을 꾸며 살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나의 장형(長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젊은 형수와 세 달 정도 살다가 다시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그로서는 도대체 난방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고 두 돌 갓 지난 애기가 자꾸 기침을 해대서 가족의 위생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마침 하숙에서 밀려 나오게 된 나는 그 방의 넓디넓음에 반해서 장형에게 그가 빼내지 못한 전세금을 꾸는 것으로 하고 그 방의 주인이 되었다. 물론 그때부터 이미 나는 그곳을 화실로 꾸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막상 몇 달을 생활을 해보니 그 방은 장형이 불평한대로 그렇게 엉망이지만은 않았다. 물론 내 건성어린 눈이 살림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장형의 꼼꼼한 눈을 따라갈 수는 없었겠지만 나는 환풍기를 설치하고 창을 내고 장작 난로를 하나 마련하는 것으로 장형에 의해 지적된 그 방의 두 가지 난점. 즉 난방과 통풍을 거의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방을 기대했던 난로에서 시큼한 먼지와 연기가 피어오르고 환기를 기대했던 창문의 틈에서 쌕쌕거리는 찬바람만이 스며 들어와서 방에 먼지와 냉기만이 가득 차곤 할 때에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먼지가 잦아들고 냉기가 따뜻하고 훈훈한 온기로 바뀔 때까지 하냥 기다리는 멋쩍음을 맛보기도 했다.
그 방과 그 주위는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스물여덟 개의 철제계단의 공명음을 사랑했고 냉동창고의 그것 같은 육중한 문을 사랑했고 앞으로 흐르는 시내와 그곳 천변으로 지나다니는 여학생들의 재잘거림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림이 잘 안되어 심약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저들 중 하나를 데려다 같이 살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이런 사특함도 나에게 하루를 견디는 외면할 수 없는 힘이 되 주었다.
내가 어떤 막연한 예감 끝에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후일 이명이라고 이름을 밝힌 낯모르는 여자를 자취방으로 데려온 것은, 난간에서 담배나 피워 물며 지나다니는 여학생들을 바라보거나 철제계단의 텅 텅 거리는 공명음을 들으며 살면서 막 두 번째 10월을 맞이할 무렵이었다.


2.
너를 보면 세계의 비밀이 보인다.
― 이영진 中


실내는 침침했다. 그녀는 낯이 설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바닥의 슬리퍼들과 붓통과 이젤들에 발이 자꾸 걸리었고 화판의 모서리에 팔을 긁히기도 했다. 그녀는 비틀거렸고 그 바람에 그녀의 더운 몸 냄새가 훅 나에게 끼쳐왔다. 그녀와 나는 침침한 어둠 속에서 몸을 닦고 말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밑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먼지들은 그녀와 나의 몸에서 튕겨지는 물방울들로 인해 어지럽게 엉키며 공중으로 흩어 올랐다. 그녀는 나의 트레이닝복을 입었고 나는 헐렁한 면바지와 남방으로 갈아입었다.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안이 환해지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녀의 눈매는 깊으며 그윽했고 눈썹의 선이 가늘고 길었다. 물기가 남아 있는 새까만 생머리는 뺨 근처에서 찰랑거렸고 발톱은 가지런하게 반짝였다.
트레이닝복의 현란한 색상과 그녀의 단아한 하얀 팔, 목, 얼굴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 대조로 인한 느낌은 함부로 범하지 못할 어떤 위엄 같은 것을 내뿜고 있었는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이 느낌을 잊지 못하였다. 나는 바닥을 정리하고 나서 그때까지도 관상수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그녀에게 의자를 권하였다.
“이쪽으로 앉아요”
“…….”
그녀는 내가 내미는 의자에 순순히 앉으면서도 고맙다거나 하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고 그 말없음이 그녀에겐 썩 잘 어울린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홍합으로 국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나의 등 뒤에서 화구(畵具)들과 정물들과 캔버스들이 가득 들어찬 방의 모습을 똑바로 혹은 곁눈질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주방가의 창문 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그 빗줄기가 그녀를 나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게끔 하는 어떤 절대자의 강력한 계시거나 그 시현처럼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어서 괜실이 흥겨워지기도 하였다. 그것이 정말 계시였는지 어쨌는지 홍합국물을 같이 떠 마신 그날부터 그녀와 나는 같이 살게 되었다. 환풍구가 있고 스물여덟 개의 철제계단이 있는, 옛날에는 골판지를 쌓아 놓는 창고였던 화실에서 그녀와 나는, 우리는 가끔 홍합 국물을 끓여 마시며 같이 살았다. 우리는 곱게 해지는 녘의 천변을 산책하기도 했고 철제난간 위에서 지나다니는 여학생들을 함께 내려다보기도 했으며, 책 대여점에서 서로의 책을 골라주기도 했고 어느 날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살바도르 달리나 앙리 루소의 화집을 보며 키들키들대기도 했다. 우리는 행복한 듯 보였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녀에게 나를, 그녀는 나에게 그녀를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와 나는 그것에 대해서 그러나 별반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으므로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고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으므로 서로를 잘 모를 뿐이었다. 실제로 서로에 대한 무지가 우리생활에 불편하게 생각된 적은 없었다. 여전히 우리의 관계는 철제 난간 위에서 내려다 본 지나다니는 여학생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만큼이나 평화로웠으며 서로의 것을 인정하는 암묵(暗黙)과 고요와 묵계(黙契)의 영역은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우호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우리의 동거가 평이하고 단조롭고 고요한 안일 속에서 두 달 정도가 지나서 계절이 겨울로 접어든 어느 날, 아침 일찍 외출했다가 해질 녘 쯤에 돌아온 그녀는 외투의 눈을 털어내며 아주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은 그 겨울의 첫 눈이 오기도 한 날이었다.
“저 내일부터 출근해요.”
나는 그때 예의 홍합으로 국물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나서 ―국물에 조미료를 치고 마른 미역을 잘라 넣고 손을 닦은 다음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야 그녀의 뜻밖의 말을 받았다. 그 의도적이랄 수도 있는 태연함을 나는 일찍이 나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당황의 극점에는 오히려 어떤 평정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 하는 곳인데요?”
“아주 큰 미용실이에요. 미용사만 열두 명이나 돼요. 2층은 미용학원이구요.”
“미용 기술이 있었어요?”
“이명이가 할 줄 아는 것은 그것뿐인걸요.”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명’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들었다. 그것은 정말 이명(耳鳴)처럼 들렸다.
“이명……?”
“제 이름이에요……. 이젠 그렇게 불러도 돼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살며시 웃기까지 하였다. 웃었을 때 살짝 드러난 그녀의 윗니가 차갑도록 맑게 느껴져서 나는 순간 온 몸이 으시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난로가에서 몸을 좀 녹이고는 주방으로 가서 끓고 있는 홍합 국물의 맛을 보고 그것과 여러 안주들을 식탁에다 올려 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녀가 가지고 온 비닐 봉지 안에서 마지막으로 꺼내 놓은 것은 두 홉들이 소주 네 병이었는데 우리는 ―이명이와 나는 그날 밤 그것을 다 마시고 말았다. 돌이켜 보건대 이명이와 내가 나눈 유쾌하면서도 음유적이며 광란적이면서 한없이 시니컬했던 그 밤의 술자리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그런 분위기를 주도했고 나는 그것에 주저 없이 휩쓸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물어주지 않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일컬어지지 않아도 생활을 하는데 그닥 불편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 자신도 자기의 이름을 잊고 살았었다고 얘기했다. 그녀의 성(姓)은 유(劉)였다. 유 이명(梨明).


3.
밤이 밤의 창을 때리는구나 ― 김수영의 中


그 밤 기분이 흐느적거리도록 취한 우리는 철제 난간 위에서 축포인양 쏟아지는 하얀 눈을 맞으며 건배를 했고 소리를 질렀고 서로의 얼굴에 술을 끼얹졌고 담배를 던졌다.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지도록 깔깔댔고 나는 눈을 뭉쳐 칼칼해진 목을 적시고 노래를 불렀다. 그때 아마 나는 나 같은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우리는 맥주를 더 사다가 흘려가며 엎질러가며 마셨고 밤새 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장중하게 텅, 텅, 울리는 공명음을 들었고 ― 그것을 무슨 성덕대왕신종의 신성한 종소리인양 여기며― 눈 쌓인 천변을 걸으며 함부로 떠들고 노래했다. 나는 주차해 놓은 카고 트럭을 엄폐 삼아 눈밭 위에 방뇨를 하면서 그 자국을 보고 ‘눈꽃이야.’라고 소리치기도 했는데 그것은 오래 전 읽었던 천승세의 아름다운 소설 에서 연상되어 나온 행위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 눈 내리던 밤의 대취와 광가난무는 확실히 요란스러운 것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그녀와 나 사이에 혹시 잔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기분 나쁜 일말의 불안이나 의심, 혹은 불편 같은 것들을 일소해버리는 어떤 거룩한 고해성사와 그로 말미암은 일종의 거듭남의 의식정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때의 내 생각만은 그러했다. 방에 들어오기 위해 계단을 오를 때 철제 계단의 공명음은 더 이상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어지간히 취해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명이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면서 혹시 간밤에 내가 그녀를 천변에 버려두고 혼자서만 들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오싹하기도 했지만 분명히 철제계단을 같이 오르던 기억이 나고 또 세탁 봉지 안에서 간밤 그녀가 입었던 옷가지들을 발견하고서 나는 금방 마음이 편안해졌다. 실내가 갑갑하다고 느꼈고 머리가 무거워서 나는 솜잠바 하나만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지난 밤 내린 눈들은 아직 소복하고 탐스러웠지만 그녀와 나의 광기어린 손길과 발길이 미친 곳은 아주 너저분하게 이지러져 있어서 그것은 마치 찰과상을 입은 소녀의 하얀 팔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나는 오랜만에 찬찬히 나의 화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스무 평 남짓한 그 건물은 이미 여러 번 말했듯이 예전에는 골판지를 쌓아놓는 창고였는데 그 즈음에는 젊은 화가 지망생과 이 도시의 미용사가 홍합 국물을 떠 마시며 살고 있었다. 그 젊은 화가 지망생은 근 석 달째 캔버스를 마주 보지 못하고 있었고 이 도시의 미용사는 간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 일찍 출근했다. 나는 천변을 한 바퀴 돌면서 거무튀튀한 흙 빛깔로 흐르는 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그 풍경에서 엉뚱하게도 쇠라라는 화가가 그린 라는 그림을 떠올렸다. 그 그림 속의 풍경은 실제 내 눈 앞에 펼쳐진 천변의 덧칠을 한 듯한 무겁고 우중충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화창하게 맑은 일요일 오후 잘 정돈된 물가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을 밝게 묘사해 내고 있는 것이었는데 퇴락한 겨울 날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천변 앞에서 난데없이 산뜻한 그랑 자뜨 섬을 떠올린 내 엉뚱한 심사를 되짚어 보며, 나도 이제 그림을 그릴 때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막연한 생각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만큼 단정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그랑 자뜨 섬에서는 언뜻 이명이의 얼굴도 보였다.


4.

훗날 감옥에서 석방되듯 지나온 풍경을 돌아볼 때
‥‥ 중략 ‥‥
내 흔적의 희미한 線들이 있기나 할까
― 최승호의 中


직장을 갖게 된 이명이는 즐거운 듯 보였다. 미용실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그녀는 밤 열 시를 전후해서 방에 들어왔고 그보다 더 늦어지는 날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잦은 편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 들어 왔는데 그때 마침 잠시 나와 철제난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나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늦은 귀가를 고스란히 문 밖에서 기다려내고 있었던 것으로 그녀에게 여겨져서 그녀를 감격시키기도 하였다. 그런 사소한 미혹(迷惑)조차도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편의에 따라 일방적으로 나는 그녀에게, 그녀는 나에게 읽혀지곤 했다. 그러면 그것으로 우리는 잠시나마 행복했었을까. 또한 지금 나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까. 그 우매한 듯 했던 미혹은 기실 우리가 그것을 의식했건 의식하지 않았건 간에 혹 그녀와 내가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서로에 대한 사련을 확인하는 우회적인 기술이 되어 주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상대에 대한 위엄과 경계를 간단히 희화(戱化)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 냈다.
그 전화들만 아니었다면 아마 우리는 그런 식으로 백 년이라도 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명이가 미용실에 다닌지 대략 보름정도가 지났고 내가 천변과 그랑 자뜨 섬에서 힌트를 얻은 작품 구상을 거의 매듭지을 때쯤이던 어느 날 저녁, 그 첫 전화가 걸려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전화 속의 낯선 남자는 이명이를 찾고 있었다. 그는 다소 불량스럽다고 느껴졌다.
“이명이 좀 바꿔줘요. 옛날 친군데….”
“……........”
“여보세요. 잘 안들려요? 이명이 좀 바꿔 달라구요.”
전혀 얼굴도 모르면서 늘 전화를 걸어 왔던 투로 말하는 그의 여유로움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부아가 나서 “그런 사람 없어요.”라고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곧 내 속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이리 저리로 텅텅 튕겨지며 울울대는 기분을 느꼈다. 그 전화는 내 방에 맞게 걸려 왔으면서도 나를 찾지 않은 최초의 전화였고 또한 가장 무례한 것이었으므로 나에겐 일종의 분노 같은 것까지도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 같은 것은 비록 순간이었지만 그 낯설고 불량스러운 목소리가 찾았던 이명이에게로 치달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그렇게 부아가 치밀 일은 아니었다.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남자와 동거에 들어간 지 이제 석 달이 거의 다된 이명이로서는 자기의 지인들에게 자신의 근황과 연락처를 알려 주는 것쯤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제는 그런 것에 분해하고 가슴 떨었던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참괴심(慙愧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날 이명이는 아홉 시가 조금 넘어서 귀가를 했다. 나는 뺨이 붉그스레해진 그녀를 난로가에 앉히고 큰 컵에 따뜻한 녹차를 가득 부어 주었다. 그녀의 언 몸이 녹고 표정이 평화로워지자 ―굳이 그러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저녁에 걸려왔던 전화 얘기를 했다.‘옛날 친구라고 했는데 내가 그만 잘못 걸려온 전화인 줄 알고 끊어 버렸다. 다음부터는 메모를 잘 해놓겠다. 중요한 것인지도 모를 전화를 함부로 받아 미안하다.’나는 정말 반성하는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얘기했다. 이명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의 손을 살며시 잡고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으로 그녀는 나를 용서했다. 용서를 받은 나는 썰물때의 바다처럼 마음이 허전해져서 울고만 싶어졌다.
그 밤 막 자정이 지났을 때쯤 그 두 번째 전화가 왔다. 나는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고 이명이는 침대 위에서 자신이 사온, 지금은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패션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로 위에서는 커피물이 끓고 있었다. 그 평화스러운 고요를 깨는 전화 벨 소리에 나는 움찔 놀랐고 이명이가 전화를 받았다. 그것은 이명이에게 온 전화였다. 이명이는 조용했지만 유쾌하게 전화 속의 상대방과 한담을 나누었다. 이명이의 입에서는 “브리티쉬 (그것은 시내의 락카페이름이다) …… 포르쉐를 타고 …… 젊은 애들 …… 지난 토요일 밤 …… 너 참 웃긴다 …… 뭐 끝내주는구나 …… 물이 좋아서 …… 너무 촌스러워 …… 놀기도 귀찮어 …… 철 좀 들어라 …… 그건 구미가 당기는데 …… 언제? 크리스마스 이브?”등의 말들이 점묘화처럼 현란하게 쏟아졌다. 나는 발랄한 희언(戱言) 같은 많은 말을 이명이가 구사한다는 것에 대해서 적지 않게 놀랐다. 끝 무렵에 이명이가 한 말은 상대가 남자임을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이었다.
“넌 군대 안가니?”
이튿날엔 세 통의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각기 다른 남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이명이와의 통화를 원하고 있었다. 그 중에 운이 좋은 두 사람이 이명이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이명이는 전화기를 들고 마냥 히히덕거렸고 생각없는 인형처럼 하르르르 웃었다. 내가 듣기에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명이는 무었이 그리 신나는지 줄담배까지 피워가며 그것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러면 나는 점차 답답해져서 메탈리카나 딥퍼플의 음악 같은 것을 들어야만 했다. 그 장엄한 울림으로 내 속의 어떤 간지러운 것들을 긁어내고 싶었다. 그 간지러운 것들은 이명이가 전화 속에서 남자들과 깔깔대며 헤무른 농지거리 같은 것들을 주고 받을 때쯤부터 내 속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증상은 생각보다 심해서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려고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서 쿵쿵 울리는 음악을 들어야 했지만 이명이는 하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 놓았다. 그러면 그 광경은 얼마나 희극적이었을까. 한 남자는 웃음을 참아내며 침대에서 구르고 있고 그 옆의 여자는 한없이 높게 웃으며 전화를 받고 있는 어쩌면 처참했을 광경.
나의 속이 간지러운 증상은 이명이가 통화를 마치고서야 겨우 없어졌다. 그 다음 날 또 다섯 통의 이명이를 찾는 전화가 왔다. 이명이는 예의 그 특유의 하르르르 웃는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줄담배를 피웠고 전화통에 빠져 들었으며 숨이 가쁠 정도로 즐거워했다. 그럴 때면 또 여지없이 나는 속이 간지러워져서 배를 움켜쥐고 음악을 듣거나 그래도 안되면 밖에 나가 철제 난간 위에서 찬 바람을 들이 마셔야 했다. 이명이를 찾는 남자들의 전화는 그후 며칠 동안 계속 이어졌고 이명이에겐 퇴근 후에 두 시간 정도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했다. 물론 나에겐 속 간지러움증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 무렵, 어느새 그해의 성탄과 세모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 사이의 며칠, 그 시기적 특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숱하게 걸려온 전화와 무슨 연관이 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이명이는 점점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자주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피곤함을 이유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 들어온 날은 그런 이유마저 필요하지 앉았지만―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나를 외면하고 잠을 서둘렀다. 또 아침에는 일어나기가 무섭게 출근을 했으므로 나는 좀처럼 그녀와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 막연히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지는 못하고 허둥 대기만 했다.



5


그 착한 울음 가득하다, 내 저녁, 허수경 中


이명이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방으로 들이닥친 것은 성탄을 사나흘 정도 남겨 놓은 날이었던 것 같다. 친구는 예상 외로 모두 여자였다. 그들은 이미 한 잔씩들 걸쳤는지 한결같이 술냄새들을 풍기고 있었는데, 다들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는 인상이었다. 나는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어쩌면 이명이의, 어떤 세계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소개랄 것도 없는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이의 없이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난로의 장작불이 세어서 넓은 방 안이 제법 훈훈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취기를 빨리 오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나도 몇 잔을 힘겹게 비우고는 곧 취기를 느꼈는데 그런 중에도 내 옆에 이명이가 있고 또 그 옆에 이명이의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날 취해서는 안 되었다.
이명이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종종 내게 의도적으로 말을 붙이고 내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몇 순배의 잔이 돌자, 곧 그들은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명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저 없이 제게는 친숙할 친구들의 언어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들은 캔버스와 이젤이 있고, 정물과 붓이 있는 방에서 베네통 잠바와 샤넬의 향수, 그리고 가수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것은 아무런 거침이 없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려는 내 마음은 그러나 나에게 무척 낯설은 것이었다. 설마설마했던 속이 다시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연거푸 술잔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훅훅, 그들 몰래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언어는 견결했다. 그날따라 장작난로는 왜 그렇게 뜨거웠을까.
나는 제법 취기가 올라서, 샤넬의 잠바인지 베네통의 향수인지가 헛갈리기 시작했다. 술은 같이 마셨으니까 취한 것은 정녕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명의 친구 중의 하나는 담배를 아주 익숙하게 피워물고는 비스듬히 누워서, 내가 붓을 빠는 물통에 재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 게슴츠레한 눈빛속에 들어있는 그 여자의 편안함을 나는 노골적으로 시기했다. 속은 간지럽고 머리는 핑핑 돌았다. 상황은 내게 불리했다. 내가 이것을 참아낼 수 있을까. 아, 그런데 그때 술이 다 떨어진 것이 나의 눈에 띈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갈 구실을 찾아냈던 것이다.
“술 좀 더 사올게요. 얘기들 계속 하세요.”
나는 손에 잡히는 외투를 걸치고 내가 모르는 언어들이 가득한 방을 나왔다. 내가 모르는 언어들이 가득한 이상 그 방은 내 방이 아니었다. 잔뜩 어두운 날씨에 진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내 창자의 구비구비를 다 들추어내는 것처럼 상쾌하게 느껴졌다.
실내등이 환한 편의점 하나를 그냥 지나쳤다. 술을 사기 위해선 다시 돌아서거나 다음 편의점이 있는 곳까지 1㎞ 정도를 더 걸어야 했다. 나는 계속 내쳐 걸었다. 방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이 서늘하게 편안해졌다. 그러나 방에서 멀어질수록 편안해지는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또 다른 불편함이기도 했다. 아마 2㎞는 좋이 되는 천변을 그날 나는 끝까지 걸었던 것 같다. 시간도 그 거리만큼은 흘렀겠지. 진눈개비도 그 거리만큼은 내렸을 것이다. 나는 이명이의 친구들이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마지막에 하려고 아껴둔 생각이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조급했다. 처음에 지나쳤던, 방에서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맥주 몇 통과 밀감을 샀다. 나는 이명이와, 어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도 진작에 친구들을 보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방을 정리하고 세수까지 했을지도.
철제 계단을 오를 때 그 공명음은 어느 때보다도 청명하게 들렸다. 육중한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커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러나 술에 취해 얼굴들이 울긋불긋해진 세 명의 여자들이 제각기 흉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자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그들은 나를 기다리다 못해 술을 직접 더 사다가 마신 모양이었다. 쓰러져있는, 아직 열지 않은 술병이 이명이의 다리 밑에 깔려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기도 했다. 작업 중인 내 캔버스에 ‘먼저 잘게요’ 라고 그들의 몸처럼 널브러진 글씨를 남긴 것이었다. 도대체, 오늘의 이곳은 무엇일까. 진눈개비는 길게 내렸다. 나는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6.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내가 보고싶다.
― 천양희 中

그 해의 성탄 전날 나는 방 안에 처박혀 있다가 뜻밖에도 이명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미용실일을 끝마치고 그 부근의 커피숍에 있다고 했다. 성탄 전야라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로 했는데 나보고도 같이 어울리자고 했다. 그녀는 며칠 전 일에 대해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과를 했다. ‘며칠 전에 정말 죄송했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오늘 같이 있는 친구는 며칠 전의 그런 친구들과는 다르거든요.’ 그 전에 없이 공손하고 부드러운 말투는 견디기 힘든 유혹과도 같았다. 그녀는 ‘눈이 내리는 걸 아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시간까지 밖을 나가지도 내다보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내리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함박눈이 내린다고 말했다. ‘창 밖을 내다보세요’라고 속삭였다. 아, 그녀의 때묻지 않은 요설(妖說)이 내 가슴을 쓸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달려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 곳이 어디예요?”
“여기는 시드니예요. 시드니 하늘 위에 눈이 내리고 있지요.”
“시드니?”
“커피숍 이름이예요. YMCA 건물 뒤편에 있는...... …오실 거죠. 친구들도 기뻐할 거예요.”
나는 친구들도 기뻐할 거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나는 공연히 조급해지고 있었다. 감청색 털 스웨터를 입고 그 위에 카키색 오버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체크무늬 목도리를 둘렀다. 아! 길게 자란 수염. 친구들도 있다는데. 나는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전기면도기를 찾느라고 부산을 떠는 바람에 정물을 하나 박살내고 말았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매끈한 턱을 가진 아그리파 석고상이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나는 커피숍 시드니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이명이 까지 모두 넷이었는데 남자가 둘 여자가 둘이었다. 그들은 모두 담배들을 물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들은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고 남자들의 머리는 한결같이 짧고 빳빳했다. 희뿌연 조명 때문에 처음엔 몰랐지만 개중엔 가죽 잠바를 입고 머리를 누렇게 물들인 축도 있었고 거기에 맞게 여자의 화장은 팔색조의 무늬처럼 선명하고 진했다. 그런데, 그들과 어울린답시고 나온 내 입성이란 죽죽한 구식 오버에 유행과는 무관한 목도리. 꺼칠한 수염. 거기에서부터 나는 다시 어떤 망단감(望斷感)에 사로잡혔고 이명이만 아니라면 도저히 그것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자들 중 그래도 순해 보이는, 얼굴이 동그란 남자가 “이쪽으로 앉으세요.”라고 말하며 나를 향해 찡긋 웃었다. 그가 권한 자리는 둥그런 테이블에서 이명이와 또 다른 여자의 사이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나는 부러 웃음을 띤 얼굴로 간단히 이름만 밝히며 인사를 했다. 그들도 내게 인사하며 웃었다. 그러자 잠시 고답적이던 분위기는 어떤 절차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마뜩한 방향으로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행히도 늦게 출현한 한 사람에게 관심을 베푸는 듯한 요량을 부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저들끼리 웃고 말하고 웃고 침묵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에게 그 자리의 나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태도는 여하튼 버릇없는 것이기는 했으나 외려 나에게 묘한 편안함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명이는 일행과 뿌듯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조용히 차를 마셨으며 생각난 듯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내게 묻기도 했다. 이명이의 표정은 설레이도록 밝았고 혹은 쓸쓸했다. 얼마 후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눈은 하늘 가득 차있어서 그 한 단면이 무너지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단면들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다. 일행은 환호성을 질렀다. 분주한 성탄 전야의 거리는 처참하리만큼 아름다웠다. 한 편의 거리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폭죽을 터뜨렸고 끊임없이 흘러드는 차들은 부단하게 클렉슨을 울려댔다. 그것들 모든 것은 이 날 만큼은 하늘로부터 면죄를 받아낸 것 같았다. 나는 그 풍경을 청회색으로 가득 발라 놓고 싶었다. 풍경뿐만 아니라 그 모든 파득거리는 소리까지도 그것에 어울리는 한 색깔로 발라 놓아서 풍경과 소리를 정지시켜 놓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일행은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끌어내었다. 그 차는 은백색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외산차였다. 운전은 머리를 누렇게 물들인 가죽 잠바가 했는데 그는 일행 중 가장 표정이 없는 축이었다. 일행은 우회도로를 꽤 달려서 도시의 다른 한편에 형성된 유흥가로 접어들었다. 그 유흥가는 가로등 조도들이 현저히 낮아서 전체적으로 어두침침했고 건물들도 낮고 조용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까지 자아냈다. 오가는 사람들도 대체로 표정이 굳어 있었고 그들 위로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기도 했다. 거기에다 스노우 체인을 감은 택시들이‘촤르르 촤르르’소름끼치는 금속성 소리를 내며 지나가서 그 음산한 분위기를 한결 돋워 주었다. 내가 쓸데없이 ‘이곳에는 아직 성탄의 소식이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라고 속으로 중얼거릴 때쯤 일행은 어떤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거의 올랐을 때쯤 위 쪽에서 스피디한 전자 기타의 음향이 들려왔다. 일행은 음향이 흘러나오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브리티쉬’라고 했다. 그 이름을 나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내는 예의 어두침침했고 강렬한 비트의 락음악과 담배연기만이 가득했다. 일행은 유영을 하듯 스물스물 어두움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맥주를 마셨다. 음악이 재즈 섹스폰의 나른한 블루스로 바뀌자 실내의 조도는 한겹 더 낮아졌고 남자와 여자들이 취한 듯 하나 둘 일어나서 음악 속으로 미끄러졌다. 처연하고도 도발적인 여자들의 몸짓은 그것을 이끌어냈던 재즈 곡 만큼이나 끈적끈적거렸다. 나에게는 모두 놀랄만한 것이었지만 그 광경을 다소 시시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누런 머리 가죽잠바가 일어서서 이명의 어깨에 손을 얹졌다. 이명이가 그 손을 받잡아 일어났고 둘은 곧 한 덩어리가 되어 몸을 부벼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섹슈얼한 춤이었다. 가죽 잠바와 이명은 몸이 떨어지지 않은 채 테이블 주위를 빙글 빙글 돌았다. 그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나에게 어떤 자세를 미리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하체는 서로에게 깊숙히 묻혀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동그란 얼굴을 가진 남자와 동행한 여자가 ‘산타!’를 연발했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 위대했을까.
가죽 잠바에 의해 이명이의 허리가 뒤로 휙 꺽여졌다. 그리고 한 손이 와서 이명이의 목과 가슴과 둔부를 어루듯 쓸었다. 이명이의 몸은 가죽잠바의 한 지체와 같이 느껴졌다. 거기까지 본 나는 갑자기 싸―한 현기증을 느꼈다. 집 앞 천변의 어두운 풍경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눈자위가 확 달아오르며 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캄캄해진 눈 앞에서는 그러나 천변의 쓸쓸한 풍경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7.
나의보조는斷續된다.언제까지고나는사체 이고자하면서사체이지아니할것인가.
― 이상 中


그날 그곳에서 가죽잠바와 이명이가 벌인 한 바탕의 질펀한 난무는 어떻게 끝이 났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떻게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옆에 앉아있는 이명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녀의 표정은 춤을 추던 때의 요기는 싹 가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자약한 것이었다. 실내 조명도 몇배는 밝아 졌으며 음악도 언제 그랬었나 싶게 조용한 발라드풍의 팝과 클래식 소품이 흘러 나와서 그 분위기는 좀 전의 기괴하고 악의적이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암전(暗轉)이었다. 어떤 생동의 격렬함이 끝나고 다시 태초의 고요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재즈블루스에 조금전까지도 미친 듯 열광했던, 일행을 비롯한 그곳의 사람들은 이제는 휴식을 취하려는 듯 조용히 웃으며 그들끼리 낮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은 밝고 산뜻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나에게 또 하나의 풍경, 그랑 자뜨 섬의 풍경을 떠오르게 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곳까지 나를 따라온 천변 풍경과 그랑 자뜨 섬의 풍경사이의 알 수 없는 단속은, 그리고 이곳 브리티쉬에서 일어난 마술과도 같은 암전의 단속은 나로 하여금 잠시 스스럼없는 사고의 흥분에 젖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하면 어떤 깨달음의 징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게 심상하지 않게 다가온 그 단속(斷續)의 의미를 풀어내야만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의 끈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천변의 세계와 그랑 자뜨 섬의 세계는, 그리고 브리티쉬의 암전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는 일종의 끊어짐(斷)과 이어짐(續)의 세계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긴장과 이완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휴지와 생동의 세계이다. 그들은 어떤 합일의 정점에서 완성되는 충일함을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각 편의 세계를 욕스럽게 탐닉하며 끊임없이 거래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데 섞여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합일의 정점에 다가갈 수록 그 경계는 확실해진다.
여기 육상 장거리 선수가 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와 지구력이라는 어떤 합일의 정점이다. (오래 달리면서 스피드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그 합일의 정점에 다다르기 위해 가령 이런 훈련을 할 것이다. 먼저 400M 트랙 한 바퀴를 온 힘을 다하여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그것은 400M 전문 주자의 달리기를 방불케 한다. 한 바퀴를 전력질주한 그는 다음 한 바퀴는 마치 조깅을 하듯이 아니 차라리 걷듯이 천천히 돈다. 그것은 휴지이다. 그것을 마치면 그는 또 아까처럼 전력으로 트랙을 달린다. 이때 몸은 긴장된 근육으로 꿈틀꿈틀할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또 온 몸의 힘을 빼고 여유롭게 트랙을 돈다. 이런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면 이것은 아마 백년 동안이나 계속될까. 이런 훈련을 전문적으로 가리켜 인터벌 트레이닝이라고 한다. 백년 동안의 인터벌 트레이닝을 통해 그는 완전한 장거리 육상선수로 태어난다. 결국 그는 스피드와 지구력이라는 어떤 합일의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구구한 생각의 끄트막에서야 겨우 나는 어떤 깨달음의 환한 희열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머리가 맑아지는, 막 세수를 하고 난 것처럼 기분 좋은 것이었다. 그것은 막연한 예감 같은 것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도 했다.
나는 저 오래 전의 어느 한 때를 생각하는 것으로 그 깨달음의 일각을 내게 이입했다. 그 때는 이명이가 나의 세계에 등장하기 이전의 시절이다. 그 시절은 고독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 나는 장형의 가족이 석 달간 머물다간 골판지 창고에 새 둥지를 틀었다. 페인트를 칠하고 환풍구를 내고 난로를 들여 놓았다. 그 모든 것을 혼자서 했다. 혼자서 맞게 된 그 첫 겨울에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난로에 집어 넣으며 나는 캔버스를 마주 보고 살았다. 손이 시려워서 항상 목장갑을 끼고 살았으며 그것이 유화물감에 삭아서 바삭바삭해질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 그 시절의 세계는 나에게는 전력질주의 세계였을까. 그러면서 1년쯤 지났을 때 뜻하지 않은 예감과 함께 나의 세계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내가 데려온 여자였다. 그 여자의 이름은 이명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알 수 없는 사이에 나를 이완된 휴지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것은 헤무르고 처진 세계이기도 했다. 처음엔 느끼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점차 길고 지루해 졌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살면서 내가 향유한 모든 것은 새로운 전력질주를 위한 육상 선수의 휴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첫눈 내리던 밤의 광가난무와 …… 예고 없는 그랑 자뜨 섬의 몽상과 …… 그녀와 같이 내려다 보던 등하교길 여학생들의 재잘거림과 …… 같이 떠마시던 따뜻했던 홍합 국물과 …… 같이 들은 스물여덟 개의 철제 계단의 공명음과 …… 지루했던 그녀의 전화 통화와 …… 그로 인한 내 속의 간지러움과 …… 진눈개비 내리던 날의 방황과 …… 바로 오늘 이곳 브리티쉬에 와서 락과 재즈의 마율(魔律)에 취해 춤을 추던 방금 전의 이명이의 모습과 …… 그것에 내가 현기증을 느끼게 된 것까지 이 모든 것은 생동의 전력질주를 위한, 그것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이완된 휴지(休止)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브리티쉬의 조도가 다시 낮아지는 듯 싶자 발라드풍의 완만한 음악이 잦아들고 다시 예의 그 끈끈한 재즈블르스 곡이 뱀처럼 실내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눈빛이 살아난 가죽 잠바가 일어나 이명이의 어깨에 다시 손을 얹졌다. 이명이도 스르르 일어났다. 그들로서는 이제 그들의 휴지를 끝내고 전력질주를 시작하려는 참이다. 여기에서 나의 역할은 없다. 가죽잠바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던졌다. 이명이는 가죽잠바의 품으로 거의 쓰러지듯 안겼다. 줄곧 동행한 여자가 내 사타구니께로 손을 더듬어 왔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것은 감미로운 유혹임에 틀림없었으나 나는 이미, 그녀의 전력질주에의 동참이 내게는 곧 지루한 휴지의 연장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 삶의 전력질주나 휴지의 방식이 어떤 막다른 입지나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그 갑갑한 이완의 세계를 탈출하였다. 그리고는 400M 주자처럼 눈 내리는 성탄 전야의 거리를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에필로그
“그 무렵에”라는 자못 회상적인 어조로 시작되었던 어떤 글은 이제 끝이 났다. 미화와 정당화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내 지난날의 한 부분을 냉정히 되새겨 보려했던 원래의 의도대로 이글이 서술되었는지에 대해선 스스로 의문이 많다.
이제와서 내가 고백할수 있는 건 그때 전력질주를 시작했던 ―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 내가 또 언제쯤 이완된 휴지(休止)의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나 스스로 몹시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나에겐 또 어떤 극적인 예감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그 지루한 휴지의 추억을 부정하면서도 혹은 그리워한다. 사람은 언제까지고 전력질주만을 할 수는 없는 것일 테니까.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시간이란 어차피 적절한 단속(斷續)에 의해서 흘러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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