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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더 잘할 수 없을까

김명옥 |2008.11.27 10:59
조회 192 |추천 2


'그릇'은 아무리 노력해도 '보배'가 될 수 없다.
'가치 있는 그릇'이 되는 길은 '보배'를 담는 것이다.

 

종종 지나친 자기성찰을

신앙의 본질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항상 ‘나는 왜 더 잘할 수 없을까’,‘

나는 너무 부족해’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친다.
그러나 변화되는 것은 없다.

기독교 신앙은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단순한 순종이 누적되다보면,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신다.

 

양은 생각이 없다.
목자가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목자가 먹으라면 먹는다.
양이 하는 일이란 그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뿐이다.

신앙의 성장이 빠른 사람들을 보면 특징이 있다.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날그날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등불로 인도하신다.
등불로는 10미터 앞을 볼 수 없다. 다만 1,2미터 앞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10미터 앞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내가 1미터 전진하면 등불도 1미터 전진하고, 내가 2미터 전진하면 등불도 2미터 전진하기 때문이다.

 

순간의 순종이 전진을 낳는 것이다.
말씀이 선포되면 기도하고 순종하라.
이런 걸음걸음이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간다.

 

기도로 변화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특징은 ‘수용성’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중심적인 신앙 세계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수용적인 존재로 변화된다.

성경은 인간을 ‘그릇’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그릇이라고 말씀한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보면,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그릇의 기능은 자기가 어떤 활동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아낼 수 있는가 하는 ‘수용성’에 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한다.

 

수용성이 곧 믿음이다.
수용성이 능력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한다.
믿음의 동의어가 ‘영접’, 즉 수용성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분을 나의 주님(Lord)과 구주(Savior)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릇이 변화되어 보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보배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릇의 가치는 무엇이 담겨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기를 전개하는 자아’가 아니라 ‘수용하는 자아’를 추구한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신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기도의 절정이다. 믿음이란 그렇게 철저히 의존적인 것이다.

 

하지만, ‘의존적’이란 말이 전적인 수동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의존성은 파이프가 아니라 가지를 말한다.
파이프는 생명 없이 액체를 그냥 통과만 시키는 관이다.

 

그러나 가지는 다르다.

가지는 나무로부터 수액을 공급받는 위치에 있다.
통로만이 아닌 생명이다.

수액을 받아들이고, 제 몸에서 열매를 맺는다.

즉,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포도나무 되신 예수께 공급받아, 나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는 기계적으로 구하고 얻는 거래가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크리스천은 기도를 통해 성장하고 변화된다.
기도는 크리스천을 성숙하게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 전병욱, 히스기야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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