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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을 무력화 시킨 기술

배재희 |2008.11.29 21:21
조회 59 |추천 1

#왜 도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로버트 스키델스키’라는 영국의 노교수가 영국 지에 현 경제위기 상황에 대해 기고문을 보냈다. 그 중 짧은 한마디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금융위기는 도덕을 무력화 시킨 기술 탓이다.”


때론 짧고 단순한 용어 두어 마디가 현상을 보다 분명하게 직면하게 돕는다. 이 한 문장에 나는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맞다. 이 위기의 본질은 ‘도덕’의 문제였다. 그 동안 ‘수익률’의 현란함은 수학과 그래프의 세계였지, ‘도덕’, ‘올바름’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묻고 싶다. 현 금융위기의 문제에 대해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민 사람이 그 많은 기독교인과 개신교계의 리더 중에 몇이나 있었는가. 왜 도덕의 문제를 ‘종교인’이 아닌, 소장파 학자들이 먼저 제기하게 된 것인가.

 

#가치방관적 그리스도인


‘CDS, 키코, 부채담보비율, 통화스와프, 레버리지.. ’

무수한 실물 경제의 복잡다단해 보이는 개념과 용어들을 우리는 그 동안 복잡한 기술적인 문제들로 넘겼을 뿐이지, 정작 그러한 경제적 현상들이 ‘올바른’ 것인지 심도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그동안 현실 세계를 움직이는 ‘수익’의 세계에 대해 가치중립적이었다. 아니, 보다 명확히 말해 ‘가치 방관적’이었다. 전 세계경제를 백 년 만에 다시 파멸로 몰아넣은 전 지구적인 ‘부채’는 '레버리지'라는 듣기 좋은 말로 탈바꿈했다. 사실 경제운용에 있어서 보수적이고 꼼꼼한 편이었던 미국인들은 언젠가부터 ‘빚도 재산’이라는 그릇된 관념으로 스스로를 ‘세계최대의 소비 종족’으로 바꾸어 놓았다. 타짜들의 도박기술같은 ‘금융 상품’의 세계가 선진금융기법이라 칭송받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한 수 더떠, 이러한 ‘가진 것 없이도 뭔가를 얻을 수 있는’ 원더랜드의 신화에 두 발을 다 담궜다. 멀리 볼 것도 없다. 1억이 2억이 되고 2억이 5억, 10억이 되는 부동산의 세계에 대해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그 어떤 단일한 목소리를 내어본 적 있었는가.

 

#그들만의 잘못인가?


묻고 싶다. 경제괴멸을 유발한 현 사태가 그릇된 투자기법을 옹호하고 사람들을 눈멀게 만든 ‘그들’만의 잘못인가? 우리는 몰랐으니까 괜찮은가? 아니, 우리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혹시 돈 넣고 돈 먹는 폭탄 돌리기의 세계에서 남들보다 더 빨리 자금을 회수할 타이밍을 몰랐던 것 뿐은 아니었을까.


기독교 철학이든 기독교 세계관이든 누가 적극적으로 발언했던가. 혹시 되려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는 점잖은 사람들에게 ‘빨갱이가 어떻고’하는 식의 흑색 수사로 비난하지는 않았던가. 


#‘수익’의 세계를, 우리의 판단에서 외면하려하지 말자


역사책을 뒤져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전적인 피해자와 전적인 가해자는 결코 없다는 사실이다.

 

2차 대전을 일으킨 나치와 히틀러의 사악함을 성토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정작 평범한 독일인들은 이 괴이한 ‘살인명령’을 사무적이고 효율적으로 집행했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을 절멸시키는 기술을 개발한 공무원들은 ‘경영혁신’의 댓가로 호봉이 올라갔다. '수익'과 '편익'의 관점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20년대의 경제대공황 직전 미국에서는 구두닦이들도 버는 족족 천정부지로 오르는 주식에 돈을 쏟아 부었다. 땀 흘려 일하고, 저축하고 아끼는 보수적이고 청교도적인 생활태도를, 당시 미국인들은 마치 모스크바의 '인민'들이나 하는 행동처럼 조롱하거나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모든 '부도덕'에는 ‘이문’이 남는다.

 

모든 '부도덕'에는 '이문'이 남는다. 아니 악행일수록 고수익일 경우가 많다. 핸드폰 무역보다는 총기밀매나 마약거래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가급적 수익의 세계에 대한 도덕적 의문은 정치인도, 종교인도, 가정주부도, 학자도 그리 적극적으로 하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진짜 ‘깨끗한 부’를 말할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20세기 초반, 독일과 그 주변의 선진국들은 부자나라였지만, 淸副의 나라는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당대의 도덕적 판단은 당대를 살아가는 세대의 의무이다. 만일 우리 시대의 문제에 우리가 침묵한다면, 또 몇 수년이 흘러 후세대들은 우리 세대를 고통스러운 역사적 짐으로 부끄러이 여기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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