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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전재윤 |2008.12.09 20:19
조회 62 |추천 0


[문화일보 2008.10.24]
출처 :  http://www.khc.or.kr/bbs/zboard.php?id=news3_3&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7
  

간도(문화일보 시론)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늑석위기(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

조선말 조선과 청나라간에는 국경선을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양국 대표는 숙종 38년(1712) 국경선 실측을 한 뒤 백두산에 올라 국경선을 획정하는 비석을 세웠다.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방 4㎞, 높이 2150m 지점에 세워진 높이 72㎝, 너비 55.5㎝로 알려진 ‘백두산 정계비’다. 청은 이 비석을 통해 조선과 인연이 많은 동간도(東間島)를 한국땅으로 공식 인정했다.

동간도는 백두산에서 시작, 북쪽 하얼빈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지류 오른쪽을 말한다. 중국 지린성 동쪽의 옌볜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한다. 동간도는 고구려나 발해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우리 영토였다. 고려시대 윤관의 9성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공험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청은 1881년부터 봉금령(封禁令)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정책을 펼쳤다. 양국간에 분쟁이 불가피하게 됐고, 국경선을 긋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양국 영토분쟁은 토문강이 어디냐를 놓고 재연됐다. 청나라가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 1885~1888년 청나라와 조선간 수차례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됐다. 그러던 중 일제가 대한민국의 국권을 강탈해갔다. 그리고 일본은 1909년 9월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선양다롄)을 보장받은 대가로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청나라측 해석을 그대로 인정하는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일제는 ‘백두산 정계비’마저 파손, 없애버렸다.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豆滿江)으로 둔갑한 채 간도가 오늘날까지 ‘빼앗긴 들판’이 되고 만 이유다. 수백㎞에 달하는 토문강 역시 이름없는 강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발음은 물론 표기부터 다르다. 중국이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 토문강과 압록강은 백두산 정상에서 지류가 시작된다.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60㎞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현재 중국이 투먼(圖們)이라 부르는 두만강 하류 지역 역시 옛날 명칭은 회막동(灰幕洞)이다. 일제가 투먼이라고 바꿔 부르면서 투먼시로 변했다. 투먼시 서쪽에 아직도 회막동이라는 이름이 있다.

2004년 9월에는 일본이 간도(間島)지역을 중국에 넘겨준 ‘청·일 간도협약’의 바탕이 됐던 ‘토문강 = 두만강’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지도가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조선총독부 도서’ 직인과 ‘아홉 번째 지도’라는 표시가 있는 이 지도는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고 명확히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레지 신부 등이 1718년에 강희제에게 헌상한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지리학자인 당빌(D’Anville)의 ‘새 중국지도(Nouvel Atlas de la Chine)’에도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훨씬 북쪽이다. 1740년 영국 왕실 지리협회 소속 지도제작자 이만 보웬이 만든 ‘아시아 전도(Modern Map and Chart;Asian Map)’에도 조선과 중국 사이 국경을 서쪽 선양에서 동쪽 러시아 접경까지 연결해 간도를 조선땅으로 그리고 있다. 최근 발해의 왕성급 유적이 발견된 연해주 일대까지 말이다.

국제법 관행상 조약이나 협정 체결 후 100년이 지나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고 한다. 2009년이면 청·일간에 맺은 간도협약이 100년이 되는 해다. 더구나 일제가 패망 후 강탈해간 영토는 원천무효가 됐다. 처칠과 루스벨트, 장제스 등은 카이로회담을 통해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합의했다. 내년 간도회담 100년을 앞두고 그동안 줄기차게 제기돼온 도도한 무효론에 일적(一滴)을 더해둔다.

[[오창규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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