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 처음으로 이라크에서 수메르 문자가 발견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기독교였다. 왜냐하면 가장 최초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겨져 왔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 오던 터에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등이 수메르의 토판 속에 그대로 그 원형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 그런데 슈메르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가 먼저 따먹는 다는 둥 그리고 홍수가 사람들이 다 죽는 데 지아슈드라는 의인이 있어서 배를 만들어 사람들은 구제한다는 둥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부터 성서학자들은 기독교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기독교 안에서도 성서의 역사를 다시 쓰자는 주장과 그것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장로교(기장)과 예수교 장로교(예장) 등이 갈라지는 이유도 바로 성서를 보는 이런 시각의 차이 때문이다. 기장은 고고학의 발견을 수용하는 입장이고, 예장은 그렇지 않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상황이었다.
지금은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역사유물 앞에서 역사를 왜곡하구 부정한다. 먹사와 창조과학회가 대표적이라 할수 있다. 전세계 역사학 고고학 학계에서 인정을 안하는데두 근거없이 사실인양 갖다붙이기식 역사를 조장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수메르의 유산을 성서의 한 유산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급문화 수메르에 대하여 히브리 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한다. 서양문명은 그리스의 합리적 이성과 히브리의 감성적 신앙이라는 두 물줄기로 이루어진다. 이 두 물줄기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 만난다.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우르 남무 왕국이 멸망하면서 슈메르 문명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신전의 원형이 수메르의 딜문 동산의 그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히브리인들의 정신적 유산은 그대로 수메르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