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 거부한 교사 7명 파면 및 해임 사건에 대하여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한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이라는 영화가 있다. 인간의 감정을 약품을 통해 말살시킴으로써, 인간의 감정으로부터 유발되는 모든 분쟁과 같은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여 평화를 유지시킨다는 미명 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 이야기이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들이 중징계를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어째서인지 이 영화가 문득 떠오르게 되었다.
지난 10월에 시행되었던 일제고사 형태의 학업성취도 평가 대신 일부 학생과 학부모의 동의를 얻어 체험학습을 한 교사 7명이 파면 및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당했다. 이에 대해 ‘항명죄’ 및 학생을 볼모로 하여 자신의 고집을 표출시켰다는, 그러므로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런 단순한 논리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우선 다른 정황을 떠나서 이러한 징계 수위가 정해진 기준이 모호하다. 파면은 물론이고 해임도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공직 복귀를 사실상 불가능케 하는 사형 선고와 같은 중징계이다. 웬만한 비리에는 눈도 꿈쩍 않는 지금까지의 서울시 교육청의 태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매우 파격적(?)인 조처이다. 또한 이는 비리 혹은 반윤리적 처사도 아니고, 일제고사의 부당성을 학생과 학부모에게 설명한 후 그들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소신껏 수업을 진행한 것이다.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도록 학생과 학부모를 종용했다는 시 교육청의 주장은 사실 관계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소신을 지킨 행동에 대하여 ‘괘씸죄’를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일제고사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혹자는 경쟁 없이는 발전도 없으므로 경쟁을 독려하는 측면에서 일제고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이다. 상호간의 더 큰 발전을 위해 경쟁은 필요하다.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경쟁하는가이다. 일제고사는 결국 답 찍는 능력을 확인하는 시험이고, 내가 좋은 등수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친구들을 반드시 찍어 눌러야만 한다. 답을 얼마나 잘 골라냈느냐에 따라 학생의 능력, 심지어 가치마저 점수화된다. 점수를 잘 받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다른 건 포기하고 부모의 경제력을 등에 업고 비싼 학원 및 과외 수업을 받으며 교과서와 교재 내용을 달달 외워 답 찍는 연습만 하면 된다. 종종 하게 되는 깊이 있는 생각이 필요한 논술과 면접은 나중에 월 수백만원씩 들여 논술, 면접 학원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암기해 가면 된다.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 이것이 즐거울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소수의 학생들도 대부분 특정 과목에 관심을 가질 뿐이지 모든 과목을 그렇게 즐거이 하지는 못한다. 정규 과묵을 이렇게 치열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어는 기본으로 해야 한다. 부가적으로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하며, 태권도 같은 투기도 배워두어야 한다. 적성을 찾고자 하는 활동이 아니라 남들이 하니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것이다. 공부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만지는 경험은 없다. 교과서와 교재, 문제집을 통한 죽은 경험이 전부이다. 자기 생각이라곤 더더욱 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다. 자신의 가치조차 알지 못한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그저 사회가 요구하는 소위 ‘스펙’이라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데 급급하다. 무엇이 잘 된 것인지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할 시간이 없으니 그저 기존의 모든 것들이 맞는 것이고 옳은 것이려니 생각하며, 혹여라도 기성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목소리가 들리면 귀를 닫고 있거나 오히려 비난을 한다. 정규 교육과정 내내 지겹도록 문화 상대주의를 배우고 다양성의 가치를 배운 학생들이 아무 생각 없이 타문화를 비난하고, 장애인을 피하고 희롱하며, 동성애자를 욕한다. 말하고자 하면 끝도 없다. 헛똑똑이들이다. 고소(苦笑)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순상들이라도 점수만 잘 나오면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리더가 되고 인재가 될 사람들로 떠받들어진다. 이게 한국의 현실이다.
이런 식의 교육을 위한 경쟁이 그리도 필요한 것인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찰과 대책은 생각도 실행도 하지 않으면서, 마치 기존의 교육 현실이 문제될 것도 없고 문제가 있어도 대책이 없으니 이를 더 강화시켜야 한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이 아닌가. 그리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행위로 치부되어 회생불가능한 징계를 받는 것이 제대로 된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이번 사건을 정치적 문제로 결부시키는 목소리도 있다. 전교조 내의 분파 갈등이 이러한 구체적 사건으로 드러난 것이며, 아무것도 모르고 억지로 끌려나가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학생들만 애꿎은 피해자가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물론 교사가 조합 내 계파 싸움의 일환으로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이라면 그것은 비난받을 일이다. 그러나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와 학생, 학부모의 의지가 그러한 명확하지 않은 편향된 주장으로 호도되어서는 안 된다. 교사들은 괘씸죄로 인하여 뻔히 받게 될 불이익을 감수하며 현교육실정의 문제와 일제고사의 불용성을 인식하고 이를 학부모에게 알렸으며, 학부모들은 이를 보고 소신껏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의 소중한 가치를 정치적 문제와 연계시키면서 어린 학생을 희생시킨 악독한 행위로 몰아붙이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논리이다.
오랜 세월 동안 교육은 언제나 우리 사회에서 이슈의 한가운데에 자리잡아왔다. 교육 자체의 중요성도 그렇지만 여태까지의 교육 정책은 너무나 무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유능하고 무능한 것을 떠나서 교육 당국의 확고한 일방통행 식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국가의 장래에 어떠한, 그리고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당국의 정책들을 신중하게 선별하여 선택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교권의 자율성이 더더욱 중요해진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교권의 자율성을 박탈함으로써 획일성을 종용하는 행동이다. 가뜩이나 교과서 문제, 왜곡된 역사 동영상 배포 등으로 교과부, 특히 서울시 교육청을 보는 시선이 결코 곱지 않다. 더더욱 정신 차리고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