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프리 파이널이 시작되던 12월의 둘째 주.
김연아를 사랑하는 팬으로서 TV만 틀면 나오던 김연아 광고와 인터넷 상의 각종 정보들, 넘쳐나는 기대감과 함께 넘쳐나던 기사와 토론, 블로그 글에 행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대회 참가 선수들의 소감대로 '환상적인 반응'이었다. 스포츠 뉴스의 1면은 단연 김연아의 사진으로 장식되었고, 각종 포털의 메인뉴스에도 어김없이 김연아의 입국, 연습사진이 빠지질 않았다.
그렇게 맞이한 그랑프리 파이널.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에서 선전한 김연아는 각종 악조건을(?!) 경험하면서도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4일에 있었던 갈라쇼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공연'으로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정말이 이번 갈라쇼 'Gold'는 말 그대로 'Gold'다. 보면 볼 수록 전율은 더해만 가고...)
그리고 맞이한 첫 월요일. 나는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발견했다.
아침에 본 신문에서 김연아의 기사를 찾아본 결과 그저 갈라쇼 사진만 덩그러니 올라와 있더라는 것. 스포츠 뉴스에서도, 물론 1면을 차지하긴 했지만 전 주 같지 않더라는 것이다. TV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잠깐 김연아의 광고 수입이 발표되긴 했지만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으로 3연패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연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잠잠했다. SBS에서도 특집방송 한번 할만한데.. 만들고 있는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느낌상 김연아가 2위를 차지하면서 '김 샌것' 같다(그러게 접근중계 작작하랬더니..쯧쯧쯧). 방송과 언론 뿐 아니라 몇몇 네티즌들까지 이제는 김연아가 포털 메인을 차지하는 것이 지겹다고 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음~ 이제야 거품이 빠지고 있네.'
일본 선수에게 진 선수에 대한 글, 이제 그만 올리라고 토론방에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김연아 신드롬'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과열 현상이 GP파이널 2위로 인해 주춤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들은 김연아 선수를 피겨 선수로 사랑하는 입장에서 참 '다행'스럽다.
GP파이널은 김연아 선수를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데리고 왔다.
그녀는 '김연아'이다. 그러나 김연아는 그저 자기 '자신' 이외의 많은 '상징'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의 피겨 인생은 '성공신화'였다. 엄청난 역경을 딛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영웅의 일대기 같은 그녀의 행보. 이는 사람들의 환상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그것이 그녀를 '극복'과 '희망'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김연아 선수가 수 많은 경제적 어려움, 환경의 어려움, 부상과 좌절을 맛보며 세계 최상급 선수로 거듭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외의 많은 것들은 어쩌면 사람들의 '허상'이 아닐까? 방송과 신문, 인터넷에서 그녀에 대한 언급이 대회 이후 급감한 이유(여전히 기사는 나오고 있지만 기사를 찾아 보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를 나는 이 '환상과 허상'이 깨졌다(내지 허물어졌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우리의 환상 속의 그녀는 '강심장'의 당찬 10대 소녀로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평정심을 되찾아 실수 없이 경기를 마무리 하는 선수이다. 그래서 이번 경기 결과를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SBS는 마치 이미 김연아가 우승한 것처럼 오프닝 영상을 만들었다. 우승하리라 장담하며 2위나 3위를 했을 때 보여줄 엔딩영상은 아에 만들지도 않았던 것 같다(중계를 그렇게 급 마무리 해야 했을 정도로). 피겨 퀸, 피겨 여왕. 그녀의 수식어에 맞지 않게 은메달을 따는 모습은.. 꾸준히 김연아를 응원해온 팬들이 아니고선 '의아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에? 이게 뭐야. 2위잖아?'
글쎄. 김연아가 왜 1위를 해야할까? 무엇을 위해?
나는 이번 대회에서 그 전 어느 대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커다란 짐'을 김연아의 두 어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넌 뭔가 해내야 한다는 '기대감'. 김연아는 그저 김연아만의 스케이팅을 할 수 있는 한명의 선수일 뿐. 그것이 1등이 될 수도 있고 2등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에 2등을 했다. 그것이 선수 김연아의 '진실'이다. 전에는 1위를 했고, 이번엔 2위를 했다. 다음엔 3위를 할지도 모르고, 그 다음엔 부상 당할지도 모른다. 돌연 은퇴하면? 팬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일테지만, 그것이 그녀의 선택인라면 우리가 무슨말 하겠는가. 이번에 긴장하고 울기까지 한 김연아가 우리의 환상 속 '강심장'의 진실이었다 한들 그녀가 무슨 죄이냐는 것이다. 김연아가 '이러이러 해야한다'는 생각은 다 우리의 허상이다. 우리의 거품이다.
해서, 이 전 포스트에도 썼지만 난 2등한 연아양이라 더 좋다. 이것이 슬럼프의 시작이되어 4대륙 대회, 세계선수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도, 난 그런 연아양이 좋을 것 같다. 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슬픈날도 있는 것이 인생이지.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은 GP파이널의 결과가 대중과 언론의 '영웅만들기' 프로젝트에서 한발은 빼 놓게 만든 것 같아서 기분 좋다 이거다.
우리는 연아양에게 무엇을 기대해야할까?
나는 한 한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연아양이 연아양 말고는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김연아 만의 스케이팅을 계속 하는 것. 말 그대로 '행복한 스케이터'로 행복한 스케이팅을 하는 것. 그 이외에 우리가 기대해야 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쇼트 경기 하던 날, 김연아가 1위를 했지만, 연아를 사랑하는 팬들은 가슴이 많이 아팠드랬다. 그녀가 힘겨워했으니까. 갈라쇼 때 행복해하던 김연아의 모습에는 반대로 2위한 김연아 였지만 우리 역시 행복했다. 아무런 짐도 기대감도 다 떨쳐버린 한마리 작은 새. 그녀가 날았고, 우리도 함께 날아오르며 행복했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녀의 행복을 나눠가질 수 있을 뿐이지 않은가. 난 오늘도 짜증낼 수 있고 떨 수 있고 울 수도 있는, 영웅도 요정도 퀸도 여왕도 아닌 김연아의 피겨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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