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는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얼마 전 VHS의 종언을 알리는 기사를 보았다. 그 후 시사로 본 <비카인드/리와인드>. 미셀 공드리의 이 영화는 코믹하지만 비디오 시대에 대한 헌사이며 동시에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매체 혹은 도구들을 기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 뉴저지 주 파사익. 몰락한 듯 보이는 이 촌동네에서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는 엘로이 플레처(대니 글러버)는 착하지만 조금은 모자란 듯한 마이크(모스 데프)를 점원으로 두고 있으나 대여점이 들어선 건물이 곧 헐릴 운명이다. 마이크의 친구로 비디오 가게에 놀러와서 본의 아니게 갖은 물건들을 깨버리고 가는 제리(잭 블랙)와 단골 고객이 없었다면 그나마 근근이 꾸려가기도 어려운 비디오 대여점. 한 눈에 보기에도 대여점의 운명은 쇠락한 마을과 더불어 쓸쓸한 정경을 자아낸다.
천재 재즈뮤지션 팻 월러의 출생지라는 대여점이 들어선 건물. 실상, 팻 월러는 영화가 만들어낸 가공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뮤지션이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체격 때문에 팻 월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영화는 이 뮤지션에 대한 기록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도대체 이 기록물이 영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한참 뒤에야 밝혀진다.
마이크의 친구 제리는 일종의 피해망상증도 갖고 있는데, 어느날 발전소를 폭파시키려 했다가 인간 자석이 되고 만다. 제리 때문에 비디오들이 모두 다 지워져 버리게 되고 심지어 관객이 보고 있는 필름에게조차 영향을 미치는 인간자석 제리. 당장 저녁에 단골 중 한 명인 폴위츠 부인(미아 패로)에게 대여해 줘야 하는 비디오가 있는데 이를 어쩐담. 제리와 마이크는 폴위츠 부인이 전혀 공포물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을 이용, 조악한 세트를 만들어 그들만의 공포물 <고스트버스터즈>를 촬영한다.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고스트버스터즈>는 한 번 들으면 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라스무스의 주제가가 더 기억에 남는 영화다. 이반 라이트만 감독은.....<주노>를 만든 감독 제이슨 라이트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비카인드/리와인드>에서 제리와 마이크는 자신들을 주인공으로 한 또다른 버젼의 <고스트버스터즈>를 찍는데 그들이 타는 차량에 위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한들 대부분에게 낯익은 이미지다]
20분 안쪽 분량으로 촬영한 이 비디오에 동네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이들은 선주문 후제작 시스템으로 영화를 제작한다. 각종 영화들을 그들만의 주연으로 제작하는데, 급조한 이들의 세트는 감독이 <수면의 과학>에서 선보인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방송국 세트와 소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조악하지만 웬지 정겨워 보였던 그 물건들 말이다. 제리와 마이크는 세탁소 아가씨 알마(멜로니 디아즈)까지 동원하여 각종 영화들을 생산해 낸다. 이거 원, 에드 우드가 따로 없다. <러시 아워2>,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로보캅>, <맨 인 블랙>, <라이온 킹>, <반지의 제왕> 등등.
영화 속에서 이들이 첫 촬영한 비디오 <고스트버스터즈>가 더 재밌게 기억되는 건 카메오로 출연한 시고니 위버 때문이다. 시고니 위버는 여기서 대여점의 영상물이 저작권에 걸린다며 감찰을 나온 조사관으로 잠깐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1984년작 <고스트버스터즈>에는 시고니 위버가 출연했다. <에일리언>으로 더 유명한 그녀. 남자로 치면 엄청 빅 가이인 그녀다.
[오후 5시였나, 마봉춘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고스트버스터즈> 만화. 이 만화의 제일 유명한 캐릭터라면 당연히 먹깨비^^]
좀 모자라 보이는 이 두 콤비가 영화 속에서 <반지의 제왕>을 촬영했다는 것도 재밌다. 실제로 잭 블랙은 3분짜리 <반지의 제왕> 패러디물에 출연한 바 있기 때문이다. 제목하여 <피어싱의 제왕>. 사라 미셀 겔러가 아르웬으로, 잭 블랙이 잭 더 엘프로 나온다. 잭 더 엘프가 어디다 피어싱했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워낙 주문이 밀려드는 탓에 이제는 모든 영화의 촬영을 10분 안에 끝내기로 합의한 제리, 마이크, 알마. 그야말로 각 영화들의 엑기스만 뽑아 초고속으로 제작하는데, 화면에 열거되는 영화의 제목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낯선 것도 많다. 원제와 번역할 때의 제목이 달라서 그런 것도 있고 전혀 생소한 것도 눈에 일부 보인다. 영화광이라면 충분이 이런 유희들을 즐길 수 있으리라.
아까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것 중 하나가 배우의 기용인데 <고스트버스터즈>가 나오고 이에 출연한 바 있는 시고니 위버가 카메오로 출연하는 걸 보니 혹시나 대여점 주인 플레처 역에는 모건 프리먼이 물망에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비카인드/리와인드>에서는 모자란 듯한 두 콤비가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찍는데 실제 출연했던 제시카 탠디 여사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치고 그의 운전수로는 모건 프리먼이 나오기 때문이다.
[<비카인드/리와인드>에서 <로보캅>으로 분한 제리. 이들은 이미 마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저작권 문제로 대여점의 선주문 후제작 비디오물이 폐기처분되고 대여점이 들어선 건물도 헐릴 날짜가 임박해 오는 등, 잘 나가던 그들에게 갑자기 시련이 닥친다. 마이크는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재능을 살려 마을의 자랑인 팻 월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마을 사람들의 인터뷰부터 시작해 그에 관한 일화들을 재현하여 촬영하는데, 이때에도 세트 급조의 노하우가 십분 발휘된다. 완성된 영상물을 상영하는 날, 비디오 가게 고객들은 대여점 안에 모여 그들이 함께 참여하고 제작한 팻 월러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한다. 창문에 커텐을 쳐 스크린을 만들고 모두가 다 같이 촬영에 참여한 영화를 마을 주민들은 추억으로 간직하며 재밌게 본다. 이제 곧 그 영화가 끝나면 건물은 헐릴 것이고 비디오를 빌려보던 일은 기억 한 켠에만 존재하게 될 텐데....
기적. 영화는 기적을 만들어 낸다. 정말일까? 건물은 결국 헐렸을까?
그들이 촬영한 영화는 한 편에서는 무성영화로 상영되고 있었다. 대여점 안에의 유성영화. 커텐에 투영된 영상은 바깥에서도 볼 수 있지만, 소리없이, 화면은 좌우가 바뀐 채로 상영되고 있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 모두가 발길을 멈추고 영화에 열광하며 웃고 있었다. 5센트만 내면 볼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영화관, 니켈레디온.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 그 비디오 상영회는 쇠락한 마을에 한 줄기 희망을 전해 주었는데.....
실제로 비디오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 우리 집에는 별로 쓰지 않은 VCR 한 대는 그저 잠자고만 있다. 집에는 녹화한 비디오가 좀 있고 비디오로 출시된 영화도 몇 편 있는데, 먼지만 쌓여간다. 테이프가 씹혔다는 말도 이제는 과거의 용어로만 남을 것 같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즐겨찾던 비디오방의 추억도 매체의 종말과 함께 기억 저 편 먼 곳에 두어야 할지도....개인은 시대를 살아갈 뿐인데, 시대는 개인에게 뭔가를 강요한다는 느낌도 든다. 감상적이긴 하지만, 익숙했던 것들을 추억거리로 남겨두는 게 기술의 발전이라고 한다면 그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대여기간 1박 2일, 반납할 때는 되감기 해주세요. 이젠 이런 말을 지워야 할 때가.....ㅠ.ㅠ]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를.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 우디 앨런 감독의 전처. 누구? 미아 패로.
그녀는 <비카인드/리와인드>에서 약간은 신경질적으로도 보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폴위츠 부인으로 나오는데, 나의 기억 속에서 살고있는 미아 패로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알아보지 못했다.
[잘 찍은 영화는 아니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가 출연한 <위대한 개츠비>(1974)를 꽤 어릴 적에 보았던 기억이 난다. 위는 <피플>지에 실린 미아 패로의 젊었을 적 모습인데, <위대한 개츠비> 때 찍었던 커버다. 내가 기억하는 미아 패로의 모습은 바로 이것이다.]
위 영화로부터 <비카인드/리와인드>까지의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배우의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하게하고 추억 속의 이미지도 깨버리는 것인지.....비디오 시대도 저무는 지금 훗날 비디오가 뭐였지라고 나 자신에게 되묻지나 않을까. 훗날엔 '맞아, 예전에 비디오라는 매체가 있었어. 근데 그게 뭐였더라....' 이럴까봐 걱정이다. 그러기 전에 집에 있는 VCR의 먼지부터 닦고 비디오로 소장하고 있는 영화 몇 편 챙겨 볼란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을 비디오, 그에 대한 따뜻한 환송과 헌사. <비카인드/리와인드>는 그런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