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년 10월 12 일 - 2007년 9월 6일)
데뷔 : 1961년 레조 에밀리아 국제 콩쿠르 입상
이탈리아 모데나 교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의 가족은 가난했다. 아버지 페르난도는 빵을 굽는 사람이었고, 어머니 아델레 벤투리 파바로티는 시가 공장에서 일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교에서는 음악이 아닌,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교육자와 가수의 길을 모두 걸을 수는 없다는 아버지의 충고로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마추어 테너'로 평가받던 아버지와 함께 모데나 지역 로시니 말레 합창단에서의 가수활동으로 음악에 입문하였으며, 1961년 4월 29일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오페라에 데뷔했다.
같은 해에 당시 경제학을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던 아두아 베로니와 혼인하였으나, 이후 이혼하고 2003년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재혼하였다. 2006년 췌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2007년 9월 6일 모데나 자택에서 별세했으며, 장례미사도 모데나의 성당에서 집전되었다.
공연 :
성악가 조안 서덜랜드와의 미국공연(1965년)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공연(1972년,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사랑의 묘약〉공연(1988년,독일 오페라하우스) 런던 하이드파크에서의 대중음악가들과의 공연(1991년) 한반도 평화 콘서트(남북정상회담 기념공연,2000년)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이루고(Nessun dorma)"를 부른 것을 마지막으로 공연을 중단하였다.
공식 사이트
http://www.lucianopavarotti.com/
플라시도 도밍고 (José Plácido Domingo Embil, 1941년 1월 14일])는 스페인 출신
데뷔 : 1961년 멕시코시티 오페라극장 바리톤 가수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8세 때 멕시코로 건너간 도밍고의 부모는 스페인의 민속 오페라 사르수엘라 가수 겸 극단장이었다. 멕시코시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배우다 나중에 성악으로 전향한 그는 16세가 되던 1957년 사르수엘라 극단에서 바리톤 가수로 데뷔해 젊은 스타 가수로 인기를 모았다.
20세가 되던 1961년 멕시코 시티 가극장에서 역시 바리톤 가수로 데뷔했고, 같은 해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테너로서도 데뷔했다. 파바로티와 같은 해에 본격적으로 테너가수로 데뷔했으나 도밍고는 바리톤 활동도 병행했다.
1962년부터 1967년까지 텔아비브, 마르세이유, 뉴욕 등의 극장들을 전전하던 그는 1968년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가수였던 '프랑코 코렐리'의 대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오 역으로 데뷔해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후 베르디의 돈 카를로, 오텔로, 아이다의 라다메스 등의 역할과 푸치니 및 베리스모 오페라의 주요 작품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오페라(특히 '카르멘') 등에서도 빛을 발하며 메트로폴리탄과 빈 국립오페라극장,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등을 누비며 활약을 했다. 도밍고는 파바로티보다 레퍼토리 면에서 폭이 더 넓다.
미국의 팝가수 존 덴버와 함께 'Perhaps love' 라는 노래도 부를 정도로 장르를 초월하여 도전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는 어린 시절 잠시 공부했던 지휘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오페라뿐만이 아니라 교향악단의 지휘대에도 섰다. 1990년대 들어서는 '토스카', '라 보엠' 등의 오페라 지휘 중심으로 선회하였다.
1990년에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의 빈 국립오페라극장 무대에서 '로엔그린'이 공연될때 등장하여 바그너에까지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바그너로 선회한다는 것은 성악 역사상 드문 일로 마치 무슨 금기를 깨는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그는 의욕적으로 바그너에 도전하여 1991년 메트로폴리탄에서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하는, 그리고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홀스트 슈타인이 지휘하는 '파르지팔'에 출연했다.
급기야는 1992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해 레바인 지휘의 '파르지팔'에 출연했고, 계속되는 도전으로 '발퀴레'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까지 출연했다.
도밍고의 '오텔로'와 '돈 카를로', '아이다' 등은 수준급 이상으로 평가한다.
바리톤으로 데뷔했기에 파바로티보다 고음에서 조금 부족한 듯 하지만 레제로, 리릭, 드라마티코 거의 모든 테너 영역에 뛰어난 성악가이다.
공식 사이트 http://www.placidodomingo.com/196/intro.php호세 카레라스 ( 스페인어: José Carreras Coll, 카탈루냐어: Josep Carreras i Coll, 1946년 12월 5 일~ )
데뷔 : 소프라노가수 몽세라 카발리에 등의 주선으로 런던에서 데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호세 카레라스는 6세 때 마리오 란자가 출연한 이탈리아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전기영화 를 보고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아리아를 배우고 연습했다.
2년 후 스페인 국립 라디오방송에 출연해서 베르디의 에 나오는 아리아 ‘여자의 마음’을 부름으로써 대중들 앞에서 처음 노래를 하게 된다. 카레라스는 열 한 살 때 바르셀로나의 유명 오페라 하우스인 리세우 대극장에서 마누엘 드 파야의 에 출연하면서 오페라 무대에 첫 데뷔를 했다.
카레라스는 소년 해설자 엘 트루지만 역을 맡았고, 이 역할은 당시 보이 소프라노가 소화하기엔 너무 어려워서 주로 성인 메조 소프라노들이 부르던 배역이었다.
카레라스는 처음엔 프란시스코 푸이(Francisco Puig)로부터 성악을 배웠고, 나중엔 후안 루악스(Juan Ruax)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카레라스는 루악스를 ‘나의 예술적인 아버지’라고 이야기한다.
변성기가 지나면서 그는 성악 공부를 계속하며 오페라 무대의 작은 배역들을 맡아 활동하던 중 당대의 유명 성악가 몽세라 카바예의 눈에 띄게 된다. 카바예는 이 젊은 테너를 자신의 매니지먼트사에 추천했고, 카레라스는 매니지먼트에 발탁되면서 몽세라 카바예가 출연하기로 되어 있던 도니제티의 에서 카바예의 상대역인 제나로 역을 맡게 된다. 이로써 카레라스는 명실상부한 테너로서의 첫 주역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로도 몽세라 카바예는 카레라스의 ‘예술적인 어머니’ 역할을 하며 그를 이끌어주었다.
두 사람은 많은 공연을 함께 했고, 15개가 넘는 오페라 레코딩에서 함께 주역을 맡았다.
카레라스는 1972년에 미국 무대에 데뷔했는데 뉴욕 시티 오페라가 공연한 푸치니의 에서 핑커톤 역을 맡았다. 또한 74년에는 의 알프레도 역으로 영국 코벤트 가든에 데뷔했고, 빈 국립 오페라 무대에는 의 만토바 공작 역으로 데뷔했다. 같은 해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의 카바라도시로 출연했고, 75년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의 리카르도 역으로 출연하면서 세계 4대 주요 오페라 극장 무대를 차례로 밟았다.
많은 오페라 가수들이 겨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쯤인 스물 여덟 살 때까지 카레라스는 24개의 서로 다른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고, 세계 4대 오페라 하우스에 모두 데뷔하는 기록을 세웠다. 1976년에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르디의 에 출연해 명성을 더했으며, 이어서 레너드 번스타인, 주빈 메타 등 당대의 명지휘자들과 함께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82년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메조 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와 함께 비제의 을 공연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7년 카레라스는 파리에서 영상촬영을 하다가 백혈병으로 쓰러졌다. 살아날 확률이 10%도 안된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완쾌하고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ᆞ폐회식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1990년 로마 월드컵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세계 3대 테너 콘서트’를 시작해 전세계 수억 인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카레라스는 50개가 넘는 오페라 전곡 레코딩을 비롯해서 수많은 콘서트 음반, 오페라 아리아 음반, 다양한 스타일의 크로스 오버 음반, 비디오 등을 녹음했으며, 비디오로 제작된 그의 전기 ‘라이프 스토리(A Life Story)’는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에 그는 오페라 출연을 1년에 한두 작품으로 줄이고, 콘서트와 리사이틀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상당 부분을 ‘호세 카레라스 국제 백혈병 재단(The José Carreras International Leukeamia Foundation)’에 쓰고 있다. 월드컵 때의 ‘쓰리 테너’ 공연, 200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정책 철폐 5주년 기념 공연, 6•25 전쟁 발발 50주년 2001년 한국공연 등 세계 각국을 무대로 규모 큰 공연들과 독창회 등을 의욕적으로 펼치고 있다. 유시 비욜링, 주제페 디 스테파노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음색과 섬세한 표현으로 세계 최정상의 리릭 테너로 손꼽히며, 파바로티, 도밍고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