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휴 약속을 미룰까 그냥 주말에 만나자고 그럴까
이유없이 잠을 설친 지난밤에 터져나가는 지하철 2호선의
아침에 맛없는 구내식당의 점심에
그리고 이제는 이유도 궁금하지 않은 최선배의 신경질에
저녁도 되기 전에 이미 지쳐버린 하루
그녀를 보고 싶지만 이 피곤한 몸을 끌고 어디로 가는게 엄두가 나질 않아서
일단 전화를 한번 걸어봅니다
있잖아 오늘
그런데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귀신같이 내 마음을 알아맞힙니다
많이 피곤하면 우리 주말에 볼까? 난 그래도 괜찮은데
이러는 그녀를 어떻게 만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화장실에 가서 푸푸 세수를 하고
열심히 일한 회사원 티내려구 넥타이도 적당히 풀고
막히는 도로를 피해서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갑니다
저만치에서 반짝반짝하는 그녀의 웃음
폴짝거리면서 뛰어와서 내 옆구리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팔짱
밥 먹었어?
안 먹었지 오빠랑 같이 먹으려구 우리 뭐 먹으러 갈까
음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오늘 우리 회사 밥 진짜 맛 없었어
뭐였는데?
시금치국
그거 몸에 좋은건데 다 먹지
야 너도 군대갔다와봐
그녀가 내 팔에 매달렸는지 내가 그녀의 웃음에 업혀가는지
우리는 오랫동안 메뉴도 정하지 않은채
점점 어두워지는 길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네요
길을 걷다 말고 떨어진 낙엽을 주워서 시집에 끼우겠다는
그녀의 어이없는 낭만 같은거
내 어깨에 뭉친 피로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그녀의 앵앵앵 잔소리 같은 거
내 고단한 가을 속에 보석같은 거
고맙습니다 그대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사랑을말하다
-푸른밤,그리고성시경입니다
-사진:Kjersti Andreassen "Color confu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