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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몽.

이승윤 |2009.01.11 17:14
조회 52 |추천 0

 한충석. 자기계몽.

 

 

 

1월 8일

 

역시나 도착시간을 잘못 알아서 한 시간이나 일찍 히드로 공황에 도착했다. 어떻게 매번 도착시간을 잘못 알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덜렁댄다. 1시간 정도 기다린 후 샌디 아줌마를 기쁘게 만났고 오늘은 아줌마네서 하룻밤 잔다. 이분들의 은혜를 언제 다 갚을까 정말 감사하다. 출발 전에 콩순이가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언제 그렇게 컸는지. 참…보고 싶다.

 

1월 9일

 

감기가 너무 심해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들처럼 요란하게 기침을 해대고 있다. 사랑스런 창이 있는 내 예전 10번 방으로 복귀하려고 다 준비되었는데 갑자기 방이 16번 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공원이 내다보이는 대신 옆 건물 사람들의 사생활이 훤히 보인다는 점 빼고는 꽤 괜찮은 방 같다. 마틴과 앤나가 없는 기숙사라 썰렁하지만, 그래도 앤나가 매일 이곳 도서관에 와서 공부하겠단다.

오후에는 교수님들과 바로 미팅을 했다. 콜먼 교수님께서 나를 한참 쳐다보시더니 “You’ve cut your hair!”라고 소리를 질렀고 이어 내가 “Yes, very short, to save money. I don’t have to spend money on it for a very long time”이라고 했더니 두 분은 경제위기가 소피아의 머리를 강타했다면서 킬킬거리셨다. 그리고 오바마가 지금 케인즈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냐 아니냐, 자본주의, 막시즘과 케인지언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다 이윽고 날 바라보고, 미안, 네 머리 얘기는 이제 그만할게-라고 하셨다. 그리웠던 그들의 유머.

 

점심과 저녁은 칼리지 친구들과 먹었다. 나를 반기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하다. 너무 피곤하고 몸이 안 좋아(딱히 잠이 오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기계적인 노동 같은 것으로 새해의 유학생활을 재작동시켜야 할 것 같다. 내일은 김치 좀 담그어 봐야겠다.

 

 

1월 10일

 

점심 즈음 현태가 용케 기숙사로 찾아왔다. 겨우 이삼일만에 본 것인데 그가 오니 내가 갑자기 한국에 돌아간 것처럼 반갑다. 쌀 및 이것저것 장거리를 샀는데 현태가 모두 날라주는 강한 서비스 정신을 발휘했다. 어둑해진 오후 우리는 인간관계 및 ‘소속’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강박관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누룽지를 끓여먹고 김치까지 모두 담그고 방으로 돌아오니 완전 녹초가 됐다. 몇 시간만 더 버티다 자려고 애쓰고 있다. 빨리 시차적응도 되고 감기도 나았으면.. 내일부터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할 텐데 말이다.      

 

 

 

 

1월 11일

 

두둥. 드디어 재가동의 에너지가 생긴 것 같다. 새벽 6시. 일기부터 쓰고 오늘을, 이번 학기를, 이 작은 이국 도시에서의 2009년을 다시 시작해보련다. 사실 지난 1월 1일, 한가지 큰 결심을 했는데 2009년을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해로 남기기로 다짐했다. 올해가 아마도 내 박사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해가 될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서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봤다.

1)    커피는 하루 한잔 이상 마시지 않기

2)    잠은 반드시 하루 7시간 이상 자기

3)    조깅은 하루도 빠짐없이 하기

4)    논문과 무관한 독서 및 글쓰기는 하루 1시간 이하로 제한하기(식사 중 읽는 시간은 제외)

5)    일주일에 하루, 오후 2-3시정도 이후 시간은 교과 외 공부하기(순서대로 종교, 정치경제, 근대철학, Secessionism과 현대미술 등을 공부 해볼 작정), 혹은 친구 만나서 놀기.

6)    온라인 글 읽기는 하루 30분으로 제한.(이명박정부 들어선 후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기사들이 너무 많아졌다. 이제 자제를 좀 해야겠다)

 

  온라인 글쓰기에 대해서는 일단의 자기검열을 하고 가야겠다. 소위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어 글을 써본 것이 아직 일년이 안되었다. 사실 시작은 내 유학생활의 모든 것을 나중에 콩순이에게 엮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굳이 공개로 해본 것은 맞춤법 및 한글표현에 있어 적당한 긴장감을 줘서 글쓰기 연습자체에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은 불특정다수와의 소통이 목적도 아니고 다만 자체발광 신호 정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겠다. 나르시즘, 뭐 부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목적이 원체 커서 부질없는 쾌감 및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지금의 취미를 그만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실 내 글에 특별한 애정을 느낀 적도 없어 글이 분해되어 그 조각들이 제각각 따로 떠돌아다니는 상황이 되어도 별로 상관이 없다. 또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내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으로도 나는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나와의 대화인(현재로서는) 이 ‘적어두기’ 취미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또 하나 공부하면서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 것은 ‘상식의 위대함’이다. 내가 하나를 더 알아감에 있어 그 하나를 알기 전의 나를 무시하지 않기를, 그래서 또한 내 분야의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도 나만큼 혹은 나보다 이미 더 많이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겸손함을 늘 잊지 않겠다. 더불어 나의 ‘앎’을 모순적으로 항상 의심해봐야겠다. 상식의 위대함은 사실 이명박 덕분에 많이 느끼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 각종 토론 프로그램 및 정부정책들을 보니 상식에 반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저 사람들이 상식을 무시해서 저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자신들이 다 알고 있으니(착각이든 실제이든) 그저 시키는 것에 따르기나 하라는 거만함에서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이 발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거만함이라는 시험의 유혹은 강해진다. 나는 학문적 상아탑에 들어앉아 평화로운 햇살이나 쬐고 있는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늘 명심해야겠다.

 

다시 한번,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2009년, 더없이 맑은 숨결로 최선의 것을 이끌어 내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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