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라포드의 전광판은 심플하기 그지 없다. 내년이면 개장 100년을 맞는, 증축과 재건설을 반복해 온 이 노(老)경기장의 운치에 리플레이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최첨단 전광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맨유 팬들이 전광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스코어와 시간뿐이다. 그리고 11일 밤, 이 심플한 전광판에 새겨진 스코어는 지난 수년 간 올드 트라포드에서 열린 어떤 경기보다 짜릿한 희열을 선사했다.
3-0. 이날 맨유가 상대한 팀은 웨스트 브롬이나 스토크시티 같은, 호날두의 득점왕 도전에 도움을 주는 승격팀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서 도전장을 던진 것은 리그 우승을 놓고 첨예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파란 사자' 첼시였다. 바로 그 첼시를 상대로 맨유가 거둔 스코어였다. 전반 종료 직전 터진 네마냐 비디치의 골부터 후반 웨인 루니,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의 확인 사살이 페트르 체흐가 지키는 첼시 골대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이기는 자와 패배하는 자, 그리고 승패에 관계 없는 자들까지 그 충격의 강도는 커져갔다. 양 팀의 감독과 선수는 물론 전문가, 팬, 심지어는 이날 1년 만에 첼시의 경기를 현장에서 관전한 주제 무리뉴 감독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냉철한 관리자가 보여준 '지장'의 면모
현지 시간으로 하루가 지났지만, 맨유의 첼시전 대승의 파장은 멈추지 않고 있다. 리버풀이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우승에 대한 미디어의 초점은 지난 네 시즌 동안 리그 타이틀을 양분했던 두 팀에게 여전히 쏠려 있었다. 특히 UEFA 슈퍼컵과 FIFA클럽월드컵 참가로 다른 팀보다 두 경기를 덜 치른 맨유에겐 첼시전 승리가 우승 경쟁을 위한 키였다.
그렇게 중요한 경기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변칙'을 택했다. 영국 일간지 < 타임즈 > 의 제임스 더커 기자는 경기 1시간 전 맨유의 선발 명단이 발표된 뒤 미디어들이 받은 충격과 의문을 이렇게 표현했다. " 경기 전 맨유의 출전 명단을 받은 뒤 프레스 룸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몇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마이클 캐릭이 아니고 라이언 긱스? 그것도 중앙 미드필더라고? 왜 상처투성이인 게리 네빌이 하파엘 다 실바를 대신한 거야? 얼씨구, 박지성은 왼쪽 윙? "
경기를 앞두고 기자들 모두가 충격을 받을 정도로 과감했던 퍼거슨 감독의 결단은 그만큼 위험 부담도 컸다. 만에 하나 패배할 경우 그 기자들 모두가 '이상한' 전술, 전략에 대한 비판을 속사포처럼 쏘아댈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난 뒤 알 수 있었고, 경기가 끝난 뒤 퍼거슨의 '이상한' 선택은 '완벽한' 지략으로 칭송받았다.
이날 전술의 포인트는 바로 중앙 미드필더 라이언 긱스, 왼쪽 날개 박지성, 힘이 떨어진 풀백 네빌에게 맞춰져 있었다. 긱스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첼시 미드필더를 혼란에 빠트렸다. 박지성은 왼쪽을 중심으로 변화무쌍한 스위칭 플레이를 펼치며 첼시가 자랑하는 좌우 풀백 애슐리 콜과 보싱와를 전방에서 상대했다. 네빌은 하파엘의 힘과 공격력 대신 영리한 수비로 상대 측면 공격의 맥을 끊었다. 아마 퍼거슨 감독의 입장에서는 가장 높은 평점을 주고 싶었을 세 선수다.
하지만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아야 할 이는 바로 퍼거슨 감독이다. 그는 첼시전 2주 전부터 긱스-플레쳐 조합을 맨유 선발 멤버로 내정한 상태였다. 최근 한달 째 부진에 빠진 첼시의 동맥경화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30년 감독 내공의 퍼거슨은 정확히 진단하고 있었다. 축구란 객관적인 경기력의 조합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때론 1+1이 3, 혹은 그 이상이 된다.
퍼거슨 감독은 캐릭의 활동량과 밸런스, 공격 가담보다 긱스의 경기 운영과 볼 소유 능력, 예리한 킥이 첼시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것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분석 후 고민 없이 결단 내렸다는 것이다. 올 시즌 거의 가동된 적 없는 긱스-플레쳐 조합을 시뮬레이션 하고, 2주 간의 시간을 줌으로써 첼시를 상대하게 만든 힘. 냉철한 관리자이자, 수 많은 트로피를 쓸어 담은 지장 퍼거슨의 진가는 바로 그것이었다.
첼시전 승리를 지휘한 '현자' 긱스
그라운드 밖에서 퍼거슨이 승리의 퍼즐을 조합했다면, 경기장 안에서는 그의 수제자가 승리를 지휘했다. 긱스는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그의 마법에 대한 위대함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줬다. 긱스의 마법은 첼시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첼시는 이전의 기계 조직 같던 미드필더와 수비의 꼼꼼함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스콜라리 감독은 미켈의 기동력과 공격적인 네 명의 미드필더(데쿠-발락-램파드-조 콜)를 세워 그 문제를 감춰보려 했지만 긱스의 노련한 터치는 첼시를 마치 홀딱 벗겨진 여인처럼 만들었다. 말 많은 데쿠, 발락의 공존은 이날도 어떤 협업을 보여주지 못했고 조 콜의 천재성이란 언제나 그렇듯 큰 경기에선 평범한 것이었다. 동료의 움직임과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날려대는 램파드의 중거리 슛은 공갈포였다. 더군다나 스콜라리에겐 이들의 침묵을 깨울 과감한 한 수도 없었다.
조화의 힘이 없는 붕괴된 첼시 중원을 '달인' 긱스는 유유히 휘젓고 다녔다. 그의 패스 한번, 계산된 페인팅 한번에 첼시의 느슨한 미드필드는 틈을 벌렸고 공은 금새 맨유 전방과 좌우 측면으로 배달됐다. 공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의 수 싸움에서도 발락, 데쿠는 긱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첼시전은 박지성과 나니, 혹은 캐릭과 안데르송이라는 대체자가 있는 데도 퍼거슨이 긱스를 놓을 수 없는 이유를 알려줬다. '현자의 지혜'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빅매치, 왜 박지성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박지성은 언제나 그렇듯 '이보다 더 근면할 순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경기 중 세계 최고의 풀백을, 그것도 좌우를 오가며 두 명을 상대하는 박지성의 기동력이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공격 가담력과 기동력을 갖췄다는 첼시의 보싱와와 애슐리 콜을 박지성은 그 이상인 세계 최고의 기동력으로 멈춰 세웠다. 최근 부진 속에서도 측면에서 활로를 연 둘 덕에 패배를 면하던 첼시는 그나마 꺼낼 수 있는 체스 말마저 막히자 여지 없이 대패했다. 퍼거슨 감독이 왜 박지성을 빅 게임에 선호할 수 밖에 없는 지를 알려주는 이유다.
한국 팬들은 이제 박지성의 기동력에 대한 찬사를 식상해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박지성의 기동력은 여전히 경외시 된다. 긱스는 경기가 끝난 뒤 " 중앙 미드필더로 뛰는 건 낯설지 않다. 게다가 내 옆에는 박지성과 플레쳐가 나의 또 다른 다리 역할을 해준다 " 며 자신의 기동력 부족을 메워준 파트너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표현을 하지 못했겠지만 호날두 역시 자신의 천적들을 녹아웃시켜 준 박지성이 고마웠을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박지성이 근면함이라는, 자신의 틀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반 43분 나온 호날두와의 2대1 패스를 통한 침투에 이은 왼발 슈팅, 2분 뒤 나온 인터셉트 후 호날두에게 밀어준 패스는 박지성이 근면함 위에 감각적이라는 새로운 기둥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줬다.
맨유가 첼시를 3-0으로 이겼다고 해서, 박지성의 평점이 더 높았다고 해서, 박지성이 램파드, 발락, 데쿠보다 더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일 맨유가 첼시를 누르고 리그 3연속 제패에 성공한다면 그날 밤 박지성의 보여준 플레이는 위대하다고 평가 받아야만 한다. 박지성이 지닌 가치의 위대함이란 개인의 지표인 공격 포인트가 아닌 팀의 성과를 결정짓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때 빛나는 플레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