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밀양

김윤호 |2009.01.17 01:29
조회 75 |추천 0

  잉마르 베리만의 역작 <제7의 봉인>에서 죽음과 마주한 블로크는 '어딘가에 반드시 계셔야만 하는 하느님'을 찾지만, 그는 끝내 신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한다. 죽음은 가깝고 영생은 멀다. 이 말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제7의 봉인>에서 신은 대답하지 않지만, 신의 부재를 함부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죽음을 피해 새 삶을 얻은 광대 가족을 통해, 신의 존재와는 별개로,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영화라는 것이 세상에 나온 이래로 수없이 많은 영화들이 신을 논했다. 신의 존재를 확신하던 작품들도, 부정하던 작품들도 많았던 가운데에서, <제7의 봉인>같은 영화들은 절망과 도탄에 빠져 더이상의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는 주인공을 내세워 인간의 구원은 과연 가능한가 하고 끈질기게 묻곤 했다. <밀양>도 그런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영화라고, 나는 믿는다.

 

  남편을 잃고 그 흔적을 찾아온 밀양에서, 신애는 내 몸처럼 여기는 아들마저 잃는다. 모든 것을 잃은 신애가 찾는 것은 신이다. 신의 전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음을 내맡기면서 신애는 잠시 평온을 되찾는다. 그래서 아들 죽인 유괴살인범을 용서하려 한다. 살인범을 구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자신이 구원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신은 엉뚱한 대답으로 신애의 구원 요청을 완벽하게 배반한다. 자신을, 신이 배반하고 조롱했다고 여긴 신애는 온몸으로 운명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저항은 번번이 실패하고 그럴 때마다 신애는 자신을 더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신에게 복수를 한다(고 여긴다). 이런 방식으로 신의 뜻을 거스르려 한다는 생각의 저변에는, 신의 의도가 생명의 연장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신이 인간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엔딩 시퀀스에서 간신히 머리카락이나 쓸고 지나가는 산들바람, 사람과는 무관하게 내밀히 내리쬐는 햇볕이, 신애의 생각을 착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착각이, 복수가, 신애가 손목을 그을 때까지 이어진다. 하늘을 응시하며 의기양양하게 손목을 긋는데, 이 때 하늘을 보는 것은, 복수하는 것을 똑똑히 보라는 의미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해달라는, 일종의 구원 요청의 의미도 담겨 있다. 이전부터 저질러왔던 신애의 모든 복수행각은, 실은 절실히 구원을 바라는 행위다. 그러나 자신의 요청에 대답이 없자, 신의 심복을 망가뜨리고(교회 장로인 약사 남편을 유혹), 존재 자체를 부정하다가(목사의 설교에 '거짓말이야' 노래 삽입), 끝내는 일부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점점 더 격렬한 방식으로 바꿔간 것이다. 물론 신애는 끝까지 아무 답도 얻지 못한다.

 

  그런데 영화 끝에서야 뒤늦게, 이 난제를 풀 실마리가 보인다. 그것은 사람이다. 신애가 밀양에 처음 발을 들일 때부터 나른하게 걸려있던 햇볕이 내내 그녀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더니, 끝내 마당의 구석에 가 걸렸다. 그 때 종찬이 걸어 들어온다. 은밀히, 그러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햇볕과 종찬이 이 지점에서 동일시된다. 눈치도 배알도 없어서, 그저 바라만 보는 이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 따라 종교 같은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갈아타는 이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신애를 바로 보게 한다(거울을 드는 행위). 어쩌면 사람을 구원해줄 이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절망도 구원도 전적으로 사람의 몫인 것이다.

 

  영화가 내내 지지부진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밀양>을 신의 존재에 관한 공방전 쯤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면만 두고 본다면, 영화는 신애가 손목을 그을 때 끝나버렸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은, 영화가 신의 존재 여부보다는 다른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따져 보았을 때, <밀양>은 사람의 문제이고, 절망과 구원의 문제다. 신이 언급됐으나, 단지 정답이 다른 곳에 있음을 말하기 위해 가져다 쓴 것일 뿐이다. 이것은 <제7의 봉인>에서 블로크가 광대 부부에게 구원이 되는 과정을 위해 신을 빌어다 쓴 것과도 같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신애'라는 이름의 의미가 궁금했었다. 아무래도 신애는 神愛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의미의 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늘상 갈구하는 신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고, 존재 자체가 신의 사랑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 중의적인 의미로서의 신의 사랑일 수도 있겠다. 다만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곧 신의 사랑이고, 신의 사랑을 행사하는 것도, 신의 사랑에 작용하는 것도 모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신을 찾으면서도 사람은 잊고 산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범죄다. 신을 믿거나, 신을 안 믿는 것이 범죄가 아니고 말이다.

 

  지금,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추천수0
반대수0

묻고 답하기베스트

  1. 어떻게 해야할까요댓글1
더보기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