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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려하지 않는 자

이봉주 |2009.01.21 16:21
조회 122 |추천 2


용산 철거민 참사와 관련된 기사들을 접하면서 난 숭례문 화재를, 촛불시위를, 미네르바를, 그리고 현 정권의 지도자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멀리서지만 지금 내가 접하고 있는 근례의 사건들이 정말 2009년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인지 달력을 볼 수 밖에 없었다. 보안통치와 강경진압과 화염병은 적어도 21세기엔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해하거나 원통해하거나 경악하는 건, 이 땅위에 셀 수 없이 뿌려졌던 젊은 피와 함성의 70~80년대를 거쳐 발전과 도약이라는 90년대를 지나 대망의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의 의견을 떳떳히 말할 수 있고 그들의 지도자는 신중히 의견을 들어줄 수 있는 민주(백성 民 주인 主) 국가에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니, 거기서 오는 막대한 배신감과 자기 착각에 빠졌던 우리들의 모습에서 오는 허탈함때문이다. 그래서 난, 정말 기가 막혀서 땅을 치고 엉엉 울어야겠다.

 

지난 번 촛불시위와 관련한 글을 쓸 때에 가장 통한스러웠던 것은 제대로 듣지 않는 현 지도자의 오만함이었다. 지난 번 버락 오바마의 승리 연설에 대한 글을 쓸 때에 가장 부러웠던 것은 듣겠다, 특히 의견이 다를 때 더욱 귀기울여 듣겠다하는 지도자의 포용감이었다. 행동이 없어도 좋다. 정치에 희망을 가지는 건 번번히 실망이 따라온다는 걸 아는 민중의 하나이기에, 진짜 행동이 없어도 좋다. 말만이라도 현명하게 할 줄 안다면, 진짜 행동이 없어도 좋다. 어찌 하는 말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국적이 의심스러운 의문이 들게하고, 어찌 하는 행동마다 '어느 시대 지도자인가?' 출생년도를 의심케하니, 오호라 통제로다.

 

듣는 것은 이해를 전제로 하는데 아예 듣지 않겠다는 것은 이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듣기 위해선 마음에 수용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전혀 듣지 않는 건 마음의 수용자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고,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반박하는 것은 마음의 수용자리가 여기까지 밖에 안되니 어서 나가라는 뜻이며,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마음의 수용자리가 상대방의 것과 비슷하다는 뜻이며,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은 후 경솔할 듯 싶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대신 오히려 미소나 포옹으로 반응해주는 것은 마음의 수용자리가 상대방의 것보다 훨씬 넓다는 뜻이다. 아예 듣지 않거나 잘 듣지도 않는 자, 마음의 수용자리가 아예 없거나 좁쌀만할 수 밖에 없겠다.

 

이 글은 현 지도자에게 역사에 남을 명연설을 남기라는 청도 아니고, 후세에 길이 길이 기억될 업적을 이루라는 청도 아니다. 그저 잘 들으십사 청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안해도 괜찮으니 그저 잘 들어달라는 청인데 만약에 그것마저 어렵다면, 그대 마음의 자리는 정말 없는가? 적어도 그대는 한 나라의 지도자 아닌가? 듣지 않는 지도자, 역사에 무엇으로 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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