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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淚之愛[비루지애-2화]

나비☆ |2006.08.16 16:41
조회 369 |추천 0

悲淚之愛 [2화-그대의 웃음을 봄바람에 묻고 떠나오니]

슬픈 눈물의 사랑_비루지애

 

 

 

해는 일찍 눈을 떴고, 밤을 일찍 찾아왔다. 먹빛의 깊은 밤하늘이 지나고 새들의 지저귐이 들리는 아침이 오면 서은은 무칸제국을 떠나 지한제국으로 떠나야 했다. 동경을 꺼내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서은의 손마디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단정히 머리를 묶고 창가에 기대서 무칸의 고요한 하늘을 응시했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고적한 봄의 밤과 어우러졌다. 서은은 산란한 마음을 다 잡으려 눈을 감았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을까. 방문을 열고 들어선 어린 여자아이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듣고 서은은 감았던 눈을 떴다.




“아씨, 부르셨어요?”




서은은 울적한 마음을 감추고 화사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 끝에 아직도 물기가 가시지 않은 걸 보니 또 울다 온 모양이었다. 서은은 제 시비인 명지의 손을 다정히 잡아 탁자 앞에 가 앉았다.



“어머니께 따로 말씀 드려 놓을 테니 걱정 말아라.”


“아씨,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소인을 데려가지 않으시려고요?”



되묻는 작은아이의 눈에는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서은은 명지의 고운 눈을 소매로 훔쳐 주며 말했다. 제 목숨도 위태로운 곳에 명지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초은이가 널 거둘 것이야.”


“싫습니다요. 소인 아씨 따라 갈 것입니다요. 날 적부터 아씨가 제 어미였고, 언니셨습니다. 전 아씨 따라 갈 겁니다.”


“명지야! 나는 그 곳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여 널 지킬 힘도 없다. 내 한 목숨도 하루를 갈지 한 달을 갈지 모른다구나. 내 네 나이 열여덟이 되면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해달라고 어머니께 부탁드렸다. 너도 혼인도 하고, 어여쁜 이가 되어야지.”


“다 필요 없습니다. 소인, 아씨 모시고 살렵니다. 아무도 없는 곳 인디, 저까지 아씨 곁에 없으면 우리 아씨 어찌 사십니까? 싫습니다. 아씨, 저는 무조건 따라 갈 것입니다. 아씨께서 싫다 하셔도 소인 이미 짐도 다 싸놨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는 명지를 서은은 안았다. 남겨두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이상 명지의 생을 제게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명지가 행여나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겁이 났었다. 허나, 이리 제 곁에 있겠다는 명지를 보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여 눈물이 터져 나왔다.






“고맙다. 고맙다. 명지야. 두려웠느니라. 무서웠느니라. 너마저 없이 떠나야 할까 막막했느니라.”





제 가슴에 있는 말을 꺼내어 말하며 우는 서은의 품에 안긴 명지는 눈물을 간신히 그치고 결연한 눈을 하였다. 무칸제국에서는 저가 아니더라도 무진왕자가 서은을 지켰지만, 이제 지한제국으로 가면 서은을 지킬 사람은 저 뿐이라고, 그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서은을 지켜내겠다는 다부진 마음을 명지는 이 밤 서은을 보며 가졌다.




“아씨, 걱정 마셔요. 소인 죽을 때까지 아씨 곁에 있을 겁니다. 아씨께는 명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웃으셔요. 소인이 아씨를 지켜드리겠습니다요.”





울음을 그친 두 여인은 금새 종알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같이 조용한 명지는 서은 앞에서는 활기 찬 어린아이였다. 여기저기서 주워 들어온 이야기들을 부풀려 서은에게 웃음을 안겨 주기도 했고, 또래의 여인들이 하는 낯 뜨거운 이야기들로 서은을 놀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려는 듯 무칸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상기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연신 입을 즐거이 놀리던 명지는 졸음이 오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이를 본 서은은 이만 돌아가 잠을 자두라며 그녀를 내보내었다. 서은은 열일곱 해를 살아온 제 방을 샅샅이 훑었다. 손때 묻은 서책들을 만져보기도 하고, 수수함이 미덕인 무칸의 여인네 옷을 만졌다. 검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무진이 선물로 준 단도를 가슴에 안아보았다. 떠나는 이가 미련이 남지 않아야 보내는 이들의 가슴도 덜 미어질 텐데, 미련의 자락이 싹을 트려했다. 서은은 이 밤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가져갈 장신구들을 살피던 서은은 제 방으로 들어온 사람의 인기척에 행동을 멈추었다. 오늘, 이 깊은 밤에 자신을 찾아올 이는 많고도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인기척을 낸 이는 성큼성큼 서은에게 다가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발길을 돌리려 부단히 애를 썼을 사람, 검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울었을 사람의 품에 그녀는 안겨 있었다.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녀를 강하게 안고 있는 남자의 팔을 서은이 떨궈 냈다. 힘없이 떨어지는 강인하고 굵은 팔이 애처로워 눈물이 났다.



“오라버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총명하고 검은 눈을 무진은 담고 담았다. 세상의 혼탁함을 담지 않은 선연하고 맑은 두 눈동자는 물기가 가득 차 더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이 눈동자에는 자신만을 담을 줄 알았다. 허나, 이 눈동자 안에 무진을 담는 것은 오늘밤만 허락이 되었다. 해가 뜨고 지한제국으로 서은이 가버리고 나면 서은이 무진을 담는 것도, 무진이 서은을 그리는 것도 죄가 되는 것이다.


 



서은은 무진 곁에서 한 발자국 물러 서 매무새를 갖추었다. 더 이상 눈물을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리고 허리와 무릎을 굽혀 정성을 다 해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부디 성군이 되옵소서. 소녀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옵니다.”


 



무진은 제 발 밑에 엎드려 절을 하고 일어서며 태연한 척 하는 서은의 모습에 분노가 일었다. 그를 위하여 사지로 가는 그녀의 마음을 왜 모를까. 그 또한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 하나 버리는 것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앞에서까지 끝끝내 슬픔을 감추는 서은이 서운했다. 무진은 잔뜩 인상을 쓴 채 조급하게 물었다.





“진정 원하는 게 내가 성군이 되는 것뿐이더냐?”



무진의 물음에 서은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한제국에도 봄은 있겠지요? 이 곳만큼 아름답겠지요? 봄을 기다리며 살 겁니다. 제게 오라버니는 봄입니다. 봄이 오면 오라버니가 오신 것이라 그리 여기고 살터이니 심려 거두세요. 봄바람이 오라버니 소식 하나를 들려주면 그 해는 웃겠습니다. 성군이 되셔서 무칸과 백성을 아껴주세요. 그리고... 초...초은이를 부탁드립니다.”




말을 뱉는 서은도, 전해 듣는 무진도 수없이 많은 생채기가 가슴에 흠집을 내었다. 자신은 한낱 사내가 아니라 이 나라 무칸의 왕이 될 사람임을 확인시켜주는 서은이 미웠다. 더욱이 그녀를 보내고 초은을 왕후로 삼아달라는 의미가 담긴 말을 꺼내는 그녀에게 살의마저 느껴졌다. 순간의 울컥함에 무진은 서은을 거세게 벽 한 쪽을 몰아 붙여 입을 맞추었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그의 행동에 무서움을 느낀 서은이 충격으로 그를 떼어내려 밀치고 저항했다. 서은의 숨결을 오래도록 마시고 제 숨을 나누어주던 무진은 날카로운 무언가가 서은의 목 언저리에 걸쳐진 것을 느끼며 놀라 몸을 떼었다.



 

서은은 무진의 절박한 입맞춤과 숨결에 이대로 눈을 감고 싶었지만 자신이 여기서 멈추면 무진의 목숨이 위태로워짐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멈추기 전에 그를 멈추게 해야 했다. 조금 전 방을 정리하다 소중히 품은 그에게서 받은 단도를 들어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저항과 반응 모두가 수그러들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무진이 그녀에게서 몸을 떼고 서은을 바라보았다.


 

“서은아!”



서은은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무진에게서 좀더 멀리 달아났다.



 


“움직이지 마셔요. 오라버니. 이제 서은이는 없습니다. 오라버니의 작은 새 서은이는 이제 없어야 합니다. 돌아가세요. 끝내 보낼 수 없으시면 죽여주셔요. 소녀를 오라버니 손에 죽게 해주세요. 소녀 목숨 오라버니께 달렸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라버니 손에 있습니다.”


“어찌 그리 잔인 하느냐!”



“아무 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렵니다. 소녀 오라버니가 성군이 되시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니 괴이치 마시고 가셔요.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나듯, 사랑도 그런 가 봅니다. 오라버니 사랑을 너무 과히 받아 제가 탈이 났나봅니다. 괜찮을 것이니 저 같은 것은 한시라도 빨리 잊으시고 행복하셔요. 오라버니가 행복하시면 봄바람이 따뜻해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슬픈 봄 풀벌레 소리가 울음을 터트렸다. 혼인을 치를 여인의 마음을 대신하여 풀벌레는 시끄럽게 울어댔다. 무진은 무릎을 젖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진의 노한 울음과 숨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서은은 주먹을 쥔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가 일어서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또 한참을 바라보며 돌아섰다.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댄 무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낮은 음성으로 서은에게 말했다.



“내일 해는 외면할 것이니라. 길 떠나는 네 모습을 눈을 감고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허나 기다려라. 다시 보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은 눈을 뜨잤구나.”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가는 무진의 뒷모습을 서은은 깊은 한 숨과 함께 가슴속으로 담았다. 그렇게 서은은 제 나라, 무칸에서의 밤을 소리 없는 울음과 가슴 저미는 사랑에 뜬눈으로 지새운 채 떠오르는 해를 보며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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