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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EMBER OF MY LIFE 1.

전광섭 |2009.02.22 08:07
조회 463 |추천 1
1.내가 세살 되던 해. 1945년 8월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때 아버지는 배 2척을 준비하여 한배에는 화물을 가득 싣고, 또 한척에는 먹을 식량과 가족들을 태워서  외갓집 삼천포를 향해 일본 시모노세끼항을 출항하셨다. 그중 한척은 무사히 도착했는데 가족이 탄 다른배 한척은 기관고장으로 제주도쪽으로 표류 하다가 한달이 넘어서야 삼천포에 도착했단다.귀환동포의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풍문인줄로만 알았는데  일가친척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재산을 다 사기당하다시피 날려보내고 바야흐로 아버지의고생길이 시작되셨단다. 경남 거창에서의 생활부터가 내게 기억이 되는것같다. 도립병원 안마당에 큰 은행나무와 어머니가 일하러 다니시던 생사공장, 그곳에서 갖고온 번데기를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먹던 모습이든지 셋째 광희형이 종일 쪼그리고 앉아 삶은 고구마를 단 한개도 팔지 못하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던 모습 등등. 그이후  부산 대신동 남의집 엿방(엿을 만드는 집)에서 일하시다가 다시금 영주동으로 이사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과 찰흙으로 직접 지으신 토담집에서 살던 기억. 이때만해도 어머니를 '오까장'이라고 불렀던게 생각난다.그이후에 정착 하게 된곳이 부산시 중구 대교동 영도다리 옆 시청부근의 판자집 생활이다.1층에는 석탄을 쌓아두는 창고로 쓰고 2층에는 방을 들여 생활했다. 한때 1층 석탄창고는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의 거처로 쓰인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큰 솥에다 밥을 해서 그들에게 주곤 했었다. 아버지는 손수 구공탄을 찍어 만들어 리어커에 싣고서 앞에서는 아버지가 끌고 뒤에서는 어머니가 밀고 하시면서 남포동, 광복동,동광동, 중앙동등의 단골집에  배달하시던 모습은 너무도 생생하다. 나중의 일이지만  초등학교시절 방과후 하교길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멀리서 보일라치면 나는 곧잘 전봇대나 담벼락 모퉁이에 숨어버리곤 했었다. 시커먼 검정이 묻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동무들 보기에 창피했기 때문이다. 학교에 입학 하려면 호적이 필요했는데 당시 귀환동포들과 6.25 피난민들에겐 기류초본이라는 것으로 거주지 확인을 했던 때가 있었다. 이때 동회에 올린 이름이 全光福이었다.-어머니가 일본서 나를 임신 했을때 아버지는 두 필의 말중에 유독 좋아하시는 백말을 타고 '후지가와상'이라는 친구분과 함께 몇날 밤낮을 집에 오시질 않고 놀음판에 계시다가 그날 밤따라 며칠간 잃었던 돈을 모두 따고나자 필경 애기를 낳은것 같다는 예감이들어 말에다  미역과 찬거리를  싣고서 새벽무렵 집에 도착하니 내가 태어나 있더란다. 복을 타고 낫다고해서 붙인 이름이 光福이란다.- 그때부터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호적에 얹혀있는 원래의 이름은 알지못한채 지내왔는데 군대에 갈때 호적등본이라는걸 처음 접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알게되었다. 귀환후 아버님의 정착이 늦어지면서 취학 적령기를 2년 넘기는 바람에  간신히 입학한 곳이 '부산 동광 초등 학교'이었다. 6.25전쟁때의 피난민이 많았던 탓인지  나보다 한두살 더 먹은 급우들이 더러 있었으나 대개는 잘사는 집 아이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재벌집 자녀들도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줄곳 반장을 하다가 6학년 때에는 전교 어린이회 회장으로 많은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했다.  졸업후 '경남중학교'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을때 쯤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그 후에 '경남고' 합격의 영예를 얻었으나 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급학교 진학은 두번 모두 돈 없이도 공부할수있는  사립학교 장학생의 길을 택해야만했다.6학년때의 담임 노채호 선생님의 주선으로 '부산 덕원 중학교'에 입학해서 줄곧 1등을 하고 졸업때는 전교수석이 되어 '김지태' 부일장학회 회장상으로 받은 탁상시계를 어머니께 드린적이 있었다. 나의 중학시절 등교는 친구들의 눈을 피해 부지런히 새벽길을 다녀야 했다. 모교인 '동광교'부근을 지나서 대청동 고갯길을 올라가야 하는데  쓰고 다니던 모자의 모표를 남이 볼가봐  친구들의 눈을 피해 새벽 일찍 학교에 들어서는 습관이 생긴것이다. 초등학교때 우리반  60명중 거의30명이 소위 일류라고 하는 '경남중학교'나 '부산중학교'에 입학 했었고 다른 남학생반 2학급까지 치면 90명 이상의 많은 동기들이 경중,부중에 합격했었다.  여학생들 또한 '부산여중'이나 '경남여중'에 많은 합격율을 기록 했기때문에 나의 사립학교 뺏지와 모표를 보이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챙피한 노릇이었다. 고등학교 3년은 정말 힘든 시절이었던 것 같았다. '부산 해동 고등 학교' 장학생 모집 시험이 있었는데 360명 모집인원중 아슬아슬하게 6등이되어 갑종장학생으로 입학금과 1학기분 등록금은 면제를 받았으나  교과서 구입과 기타 학자금은 벌어서 조달해야 하기때문에 중3과 고1 학생의 가정교사를 하며 숙식 해결과 함께  약간의 용돈을 타 쓸수 있게되었다. 겨우겨우 졸업하고,육군사관학교에 가면 돈 걱정 하지않고 대학4년을 무난히 마치겠다고 생각 했었는데 입학요항을 보니 연령cut line에 해당되어 있는게 아닌가! 즉 1943년3월 이후탄생자만이 응시자격이 되었고 나는 약 두 달이 over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호적의 이름'전광섭'을 알게 되었다. 이유야 어떠하던 장교생활은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고 택하게 된것이 육군간부후보생(갑종장교)자격 시험에 응시하는 것이었다. 논산 훈련소 생활 10주를 마치고 전남 광주 육군 보병 학교에 입학해서 만1년간의 힘든  훈련을 끝내고 1965년 6월 5일 갑종191기(육군보병학교-IOCS191#)로 꿈에 그리던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게되었다.       2.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12사단 52연대 11중대에서 소대장 복무를 하던중 김포 오세리에서 공수훈련을 수료하고(1966년 5월)  이해 10월1일 고박정희 대통령 내외분 앞을 행진하며  국군의날 행사에 참가한후 10월 3일 '개천절'에 월남 파병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부산항 3부두에서 우렁찬 군악대와 학생,  친지, 많은 환송 인파의 손에손에 태극기 흔들면서 불러주는 백마사단가를 귓전에 남긴채 9사단 30연대의 병력은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느냐 ! 그이름 무적의 사나이. 세운 공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정의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들고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나를 태운 미수송선(Blatch-ford호)이 오륙도를 벗어날 무렵 "1년후 다시 보자"고 다짐하며 환송식때 가정교사 때 같이 공부하던 여자 친구가 내 목에 걸어준 화환을 바다에 던져 띄워 보내던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강산이 네번 변한 44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되돌아보면 눈 깜짝할 순간같이 생각 되지만 실로 파란만장한  긴 시간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선체밑이 3층이나되는 큰 배이지만  파도가 어찌나 센지 배가 파고와 파고 사이안에 내려질 때에는 양 옆에 산더미같은 물벽밖에 보이질 않는겁니다. 장교 사병 할것없이 모두는 멀미투성이의 상황이었습니다. 바다위를 마치 제비처럼 날렵하게 날아 다니는 날치라는 물고기가 구경거리일뿐, 어디를 보나 양 사방은 바다의 수평선과 맛닿은 하늘만이 있는 망망 대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소대장이라는 것 때문에 병사들을 여기저기 둘러보며 격려하고 다닌것이 7일 밤낮. 쉬지않고 항해한 배가 도착한 곳은   베트남 남부의 '캄란'이란 항구이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는 너무도 평화로워 보이는 울창한 숲과 병풍처럼 둘러 싸인 고요한 산이 있는 항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속에서 지긋지긋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전장에 왔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곧장  여기 저기 수없이 대기중이던 LST 상륙정으로 수송되어  낯설고 물설은 월남땅에 첫 군화발을 내 디뎠습니다. 우리는 백마사단의 첫 파병 병력이었기 때문에 맨땅에 부대기지의 진지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땅속에 서로 얽힌 나무 뿌리와  도마뱀,독충,나무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우수수 떨어져 몸에 달라 붙던 거머리떼의 공격,가끔씩 후두둑 날아서 사람을 놀라게하는 산닭.무엇보다도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초저녘부터 찾아오는 귀찮은 모기떼,또한 '달그락,달그락'고요한 적막속에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떼들의 움직임 소리. 이런것들을 파악하고 적응하는 데에도 만만찮은 시간이 흐른것 같았습니다.밤과 낮의 심한 일교차 때문인지 더러는 감기환자도 생기곤 합니다. 몇날 지나지도 않았는데 우리소대는 첫 야간 매복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베트콩의 출몰이 잦다고하는 지점인데 그곳은 '방고이'시 외각의 작은 부락으로 '몬타나'라고하는 원주민 산족들을 한데 모아 집단을 이루어 살게 만든  전략촌 나들목의 한 정글지역이었습니다. 미군들의 작전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런 원시족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존을 보호하자는 목적과 베트콩과 섞여 생활 하는것을 분리 시키고자하는 작전의 일환으로 한곳에 정착시켜 놓은 '몬타나'족 집단 거주지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수시로 산속 베트콩기지에 소금을 비롯한 곡식을 날라다 주며 때로는 옥수수 알갱이 속에 수류탄 권총등의 무기를 숨긴 물동이나 바구니같은것을 머리에 이고 운반해주는 vietcon의 동조자들이 간혹 섞여 살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을 생포하여 적의 본거지를 알아내어 공격하자는 명령을 받고 오늘 첫 매복을 하게된 것입니다. 한 밤중인데  달빛으로 인해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는가 싶더니  한 사내가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점점 가까이 닥아 온 그앞에 '변동철'하사가 불쑥 앞을 막고 걸음을 제지하는 순간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는게 아닌가.그들에게 우리매복이 노출 된 때에는 더이상 머물러 있을수가 없기때문에 '변'하사가 달아난 곳으로 대충 지향해서 M79유탄발사기를 한방 쏘았습니다. s날이 새기전에 우리는 군장을 챙기고 그곳을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비탈진 오솔길을  내려오는 도중인데 길바닥에 낣짝 엎어져 있는 시체 한구가 있기에 가까이 가보니 가슴팍에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게 조금전에 도망친 그 사내가 틀림없는듯 싶었습니다. 네 팔다리를 들고 그들이 나다니는 부락어구  출입문 앞에다 옮겨 놓고 철수했습니다.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 경고용으로 남겨 둔 것입니다.  그 이후 며칠이 지나서 대대장이 우리중대를 방문하여 중대장에게 사건의 경위를 보고 받고나서 나와 함께 찦차로 뽀얀먼지를 날리며 돌자갈 길을 달려 도착한곳은  미군소령이 관리하고 있는'방고이'라는 도시의 시장실 이었습니다.그는 두 다리를 책상위에 걸터 놓은채 비스듬히 뒤로 기대 앉은 자세로 우리일행을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 산족들을 조심스럽게 관리하고 있던 중이라는데 사건이 발생하여 주민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몹시 마음이 상해 있었습니다. 죽은 그사내가 그 전략촌의 촌장이라고 했습니다. 대대장이 거만하게 앉아있는 미군소령을 향해 유창한 영어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너희 나라 군대는 상관도 몰라보는거냐!" 그러자 벌떡 일어나서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면서 부동자세를 취하는게 아닌가. 잠시후 대대장은 또 한마디 한다."귀관이 관리자라면 이곳에 주둔하게 된 우군을 식별하는것 쯤은 알려 놔야 하는게 상식 아니냐! 전장에서 사살 당할 행동을 자초한게 누구의 책임이라고 생각 하느냐! 귀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때의 주월 미군은 한국군대와 함께 같은 작전지 안에 있는것을 행운이라고 생각 할만큼 마음 든든해 하고 반가워 하던게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군 가까이에는 베트콩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건은  사건이고 퍽 조심스레 자기의 무례했음을 사과라도 하는듯 싶었습니다. 우리는 그 전략촌에 많은 의료지원과 먹을 양식과 의복등을 지원하고 자매결연을 맺기도했습니다. 사살된 그 촌장은 아내가 셋 이나 되었는데, 돈도 수천 '피아스타'씩을 나눠주고 위로 해 주었더니 그들은 남편이 죽었어도 한방울의 눈물을 흘리기는 커녕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돈만 세고있는 모습을 보며 더욱 더 측은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그로부터 한달후 우리는 부대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캄란'항구에서 각종 보급품을 운반하게 되는 젖줄과도 같은 1번 국도의 한 지점으로서 '나트랑'시와 '닌호아'성의 사단 사령부를 연결하는 중간쯤에 위치한 작전상 매우 중요한 기지이었습니다. 각종 군수품을 싣고 달리던 군트럭이 종종 기습을 받고 많은 무기와 식량을 노획 당하던 곳인데 악명높은 '고무밭기지'란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프랑스'점령군시절에  농장을 일구어 고무나무를 심어서 경작하던 곳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빽빽한 고무 나무숲의 벌판이었습니다.동그랗게 원형 배치를 해서 360도의 경계 방어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는데 가끔씩 달리는 차량들로 인한 뽀얀 먼지만 멀리 보일뿐 인기척이 없는 참으로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외톨박이 중대가 된 셈이었습니다.밤낮이 따로없는 경계근무는 참으로 지루하고 따분한 긴긴 시간의 연속이 될수 밖에 없었습니다.어느 때는 주월사령부에서 초청한 고서영춘씨,가수 도미씨,한명숙씨등의 연예인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와서 병사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진적도 있었지만 이도 잠시뿐 ,한낮에는 더위와 마라리아 모기, 나무에 붙어 서식하는 거머리, 독충,심심찮게 기어드는 뱀들과의 신경전이 계속 되는가하면    해질무렵 저녘부터 시작되는 야간 경계근무 때는 심한 긴장감이 엄습해 오게 되는데 낮 시간과는 너무 대조를 이룹니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는가 하면, 금방 소리내기 시작하는 이름모를 풀벌레의 울음도 고국에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계절의 합창으로 들리지만 지금 이 곳에서는 접근해 오는 베트콩의 발자욱소리와 구별 해야하는 참으로 귀찮은 소음으로 귓전을 괴롭힐 뿐입니다.나는 외각 진지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소대막사에는 되도록 병사들이 모여있는것을 삼가하고  있었는데 이는 종종 날아오는 적의 박격포탄에 대비해서 항상 산개 해 있는편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가끔 산에서 야음을 타고 우리를 기습하러 오는듯한 베트콩들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군청에만 대고 총질을 하고 되돌아 가곤 했습니다. 밤낮없이 계속되는 긴장탓인지 가끔씩 병사간에는  충돌이 발생하기도한다. 한번은 분대장 '박종주'하사에게 '이강구'상병이 대들고 있었는데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었다폈다하는 사태가 격투 일촉즉발의 순간인듯 했습니다. 마침 순찰중이던 내가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듣고나서 둘을 모두 햇볕 따가운 마당에 부동자세로 서 있도록 기합을 줬습니다.부당한 간섭을 한 분대장도 문제지만 상사에게 덤비는 부하의 행위는 결코 덮어 둬서는 않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조금 있자니 두명의 병사가 철모에 물을 푸다가 번갈아 가면서  퍼붓기 시작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교대로 퍼붓고는 달아나고 하는것을 못 본채하고 나는 속으로 빙그레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그 분대원들을 전원 집합시켜서 소리 칩니다. "기합받는 두명에게 물을 끼얹어 준 놈.일보 앞으로!" 앞으로 나서는 병사가 없는듯 싶더니 잠시후 전원이 약속이나 한듯이 발을 앞으로 내 디딘다. 나는 똘똘뭉친 그들의 행위를 속으로는 반가워 하면서도 소대내에서의 다툼은 앞으로 용납하지 않겠노라고 심히 꾸짖고 해산시켰다. 군대는 단체 기합을 통해서 전우들의 단결심을 높히는 계기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또 한날은 중대진지 외곽 깊숙히 주간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인접 소대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칼빈소총을 들고  자기보다 일계급이 높은 김상병을  쏘아 죽이겠다고 마구 울부짖으며 쫓아다니는 최일병간의 심각한 숨바꼭질이 벌어지고 있는것이다. 내용인즉, 최일병이 애지중지 키우던 누렁이를 그가 없는 사이에 보신탕 해 먹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쫓고 쫓기고를 얼마동안 하던 끝에 그만 김상병이 잡히고 말았다. "야! 이 새끼야! 내  개 살려내 놔!"  하극상이 발생할수있는 긴장된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중대장이 말려도 않되고, 소대장의 말도 듣지않고 가까이 오면 누구든지 쏘아버리겠다는 것이다. 아무도 선뜻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었다. 그의 손에 든 칼빈소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손에 땀을 나게하는 긴장의 시간이 아닐수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가... 이때  소문을 듣고 급히 달려 온 사람은 다름아닌 작달막한 키에 새카맣게 탄 구리빛 얼굴의 사나이 김상사이었다. 이는 6.25참전 용사로서 중대원들 사이에서는 삼촌으로 불리던 꽤나 의협심이 강하고 통솔력이 있는 중대본부의 인사계  직으로 있던분이다. 당장 최일병의 앞에 닥아 서더니 그가 갖고 있는  소총을 잡고는 총구를 자기 가슴팍으로 갖다대며 "야 !최일병. 나를 쏴라.나를 쏴! 너 정신이 있는거냐 .참아라. 참아야 해. 조금만 참으면 돼. 응. 자아- 총 이리 내." 하며 총을 거두어 들였다. 그날은 전 중대병력이 중대장의 지시로 완전군장을하고 낮은 포복으로 마당을 몇바퀴 돌았던 웃지못할 사건으로 기억 되었는데 벌써 수십년이 지난 지금은  두번다시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악몽과도 같은 순간일 뿐입니다.     1966년 12월. 드디어 백마1호작전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월남에 도착한 이후 최초로 전개되는 사단규모의 큰 전투가 되는 셈입니다. 작전 끝무렵 매복작전 수행중에 도망치는 포로를 붙들어 소대원 두명이 어쩔수 없이 구타한것이 그가 죽음에 이르게되는 사건이 불씨가 되어 후에 조기귀국을 하게된다. 나중에 그는 베트콩이 아니라는 판명이 나자 양민학살이라는 누명을 쓰고 부하들을 대신해 국내로 송환 되는 아픔을 치르야만했던 백마1호작전. 나는 짧은 전투 경험이지만 전우애에 담긴 소대장과 부하 장병간의 끈끈한 사랑의 기억을 되살려 봄으로서 의리와 희생이 발휘 되었던 인간애(人間愛)의 작은 단면을 그려 보고자 하는것입니다.요즈음 의리라고 하면 마치 폭력배들의 전유물인것 처럼 생각키우는 경우가 종 종 있고, 희생정신이 매말라가고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때에 미흡하나마 하나의 미담이 되었으면하는 바램입니다. 나아가서 전장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군당국의 처사가 한 젊은이의 앞길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무책임한 처사가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 또한 크기에 4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서 밤마다 몸부림치며 이리뒤척 저리뒤척 악몽에 시달리는 한 참전용사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인간이 어렵게 성장해서 육군 간성의 첫 출발점에서 길을 막아버린데 대한 아쉬움이 있기에 못다한 군대생활의 한이 맺혀있음을 밝혀둡니다.    3.작전 개시의시간.  고무나무 벌판을 벗어난 광활한 잔디밭에는 수많은 헬기가 대기하고있다.출동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병력을 적진에 투입해야하는 주월미군 소속의 거대한 헬리콥터부대인것이다. 백마1호작전은 '흠바산'의 1부능선에 2개연대병력이 포위를하고 내가속해있는 30연대병력이 산 정상에 랜딩(Landing)해서 적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는데  우리소대는 출전 하루전날밤에  '흠바산' 정상에 투입되어 다음날 본대가 도착 할때까지 교두보 역할을 명받고 해 질 무렵에 저공비행을 해서 목표지점으로 날아가게 되었습니다.미군헬기조종사는 겁을먹고 두리번 거리면서 약5미터 공중에서 뛰어내리라고 손짓을 하는게 아닌가.완전군장을 한채로는 상당히 어려운 높이 이므로 나는 칼빈소총으로 바닥을 쾅 쾅 치며 더 아래로 내려라고 손짓을 해서 약2미터 높이에서 뛰어 내렸다.그날 꼬박 뜬눈으로 세우며 소대원 전원은 '흠바산'정상의 첫밤을 보냈다.적의 예상접근로에는 부비추럽과   크레모아도 설치했다. 날이 밝아오자 몇군데의 산봉우리에 연막탄을 쏘아대더니 연이어 수많은 헬기들 그곳으로 날아들기 시작 했다. 사상최대의 헬기 투입 작전이었다고 했다. 이날부터 베트콩과의 산속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때로는 우연찮게 불타다남은 건물에서 옛날 '프랑스'군들이 땅속에 묻어두었던 길다란 소총이 발견되어 노획무기로 전과보고 되기도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적사살 5명. 이때만해도 맹호사단과 백마사단과는 서로 경쟁이 붙어 허위 전과보고가 허다한 실정이었다. 적이 미쳐 갖고가지못한 LMG기관총을 줍기라도 하는날이면 적사살4명이라고 보고 되기가 십상인것이다. 이는 사수,부사수, 제1탄약수, 제2탄약수--이렇게 4명의 사살보고가 되는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웃지못할 허위보고 투성이인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무공 훈장을 나누어갖게되기도 한다. 베트남의 남동부-닌호아성 중심의 흠바산 산케이 계곡은 아군이 피해를 많이 본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가시덤불과 잡목으로 뒤엉킨 지긋지긋한 정글지역이다. 50여일간의 적 소탕작전이 끝나갈 무렵-우리 소대는 중대의 첨병으로서 어둡기전에 X지점까지 부대이동을 명령받고 정글도로 숲을 쳐가며 행군하고 있는중이었는데 갑자기 좌전방으로부터의 기습공격을 받게되었다. 총소리가 얼마나 요란했던지 소대원들이 많이 상했겠구나하는 공포와 조바심으로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나와 같이 움직이던 통신병 '이시동'일병과 '허 은'일병은 납작 엎드려서 나의 양 옆에 붙어서 오들오들 떨고있었다. 순간 선뜻 머리에 떠 오르는 결단이 있기에  소리쳐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실탄이 날아오는곳과는 거리가 먼곳에 있는 2분대 '박상정'하사에게 "실탄 한 클립(그당시 개인 화기는 M1소총이었다) 사격개시!"를 했는데 적들의 총탄소리가 뚝 멈추는것이 아닌가! 1분대와 3분대에게 연속해서  사격을  명했다. 피아간 얼마나 인명손실이 발생했는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는 상황이었다. 다급하긴하나 섣불리 움직일수 없는 상황인데 '변동철'하사가 포복으로 기어와서 귓속말로 소근거리기 시작하는데 "소대장님! 적은 격퇴가 되었는데 '이수철'상병이 총을 여러발 맞았습니다."라는것이다. 가까이 가 보니 양팔과 양허벅지에 총을 네발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어서 급히 지혈부터 시킨다음에 동시에 중대장을 통해서 헬리콥터를 요청 했다.   소대원들은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도 없이 정글도를 이용해서 둥그렇게 나무가지를 잘라내어 하늘이 보이게끔 하고나서 헬기의 안전을 지켜야 함으로 흩어져 360도 방향으로 경계배치를 하고서 초조한 마음으로 헬리콥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이수철 상병은 내 손을 붙잡고 "소대장님! 소대장님!나는 꼭 살아야 합니다. 살아서 귀국해야 합니다." 하며 큰 몸집에 걸맞지않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가 파병되기 전에 경기도 양평에서 약 석달간 훈련중에 있을때 전남순창에서   그의 부인이 이틀길의 돌자갈밭길을 마다않고 어린 딸애를 업고 면회를 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지원이 아닌 차출된 병력이 대부분으로 전쟁터로 가지않을려고 탈영하는 병사들이 종종 있을때라 영외를 벗어나서 외박은 일절 금지되어 있었기에 영내 한적한 곳에다 천막을 치고 신방(?)을 차려주어 이틀을 쉬고가게 해 준 적이 있었다. 이런 그를 보노라면 그의 무사귀국은 남다른 애틋한 소원이었을 것이다.지혈해 놓은 양 팔과  양다리에는 피가많이 배어나와 있었는데 다행이 모두 뼈는 관통되지 않았다. 출혈이 너무 심해 무척이나  마음을 조아리고 있는 중에 애타게 기다리던 헬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백색 연막탄을 보고 날아와서는 곧장 밧줄을 내려주는데 미흑인 병사 두명은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굴리며 기관총의 방아쇠를 잡고 연방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요청만하면 깊은산속 어디든지 달려오는 용감한그들인것이다. 이상병을 달아 올려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는데 필경 '나트랑'102후송병원으로 갔을거란 추측을 했을뿐 지금까지  그의 생사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날이 어두워져서 우리는주간에 적에게 노출된 장소를 다소 이동 한다음 그곳에서 야영을 하게되었다.그날밤 뜬눈으로 지내며 어서 속히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또 기다리고있는데 전방 좀 움푹한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필경 적의 부상병일것이라고 판단하며 숨죽이고  밤을 보내야만 했다.얼마나 지겨운 길고도 긴 시간이 흘렀는지...드디어 수풀 사이로 보이는 동녘 하늘에 새벽노을의 빨간빛이 마치 먼 산 골짜기의 깜박거리는불빛처럼 쬐그맣게 비치기 시작한다.  잠시후 우리는 밤새 쌓인 긴장을 억누르지 못하고 빠르게 낮은포복 자세로 접근해갔다. 그기에는 적부상병은 보이지 않고 이름모를 새둥지 하나만 동그라니 자리잡고 있는게 아닌가. 새끼들을 품고 매서운 눈알을 굴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에서 낮동안 인간들이 쏘아댄 총소리에 적잖이 놀란 어미새의 모성애를 볼수있는듯했다. 우리는 모두 '와'!하고 탄성을 지르고 먹다남은 C-레이션 부스러기를 뿌려주고는 하산길에 올랐다. 산과 평지가 맛닿은 와지선상에 집결하여 다음의 작전명령을 기다리며 휴식에 들어갈 무렵 '시누크'헬기의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보급품이 내려왔다. c-레이션 박스가 운반되어 온 것이다.자그만치 1주일 먹을 분량이란다.     한편으로는 수십대의 트럭에 편승해서 사단병력이 작전지를 철수하는 광경을 볼수있었다.1번 국도에 수백미터로 늘어선 트럭의 행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우리중대는 무어란 말이냐! 철수대열에서 벗어나 외톨박이로 남게 된다고 생각하니 맥이 확 풀리는것 같았다. 아직도 중대장은 한마디의 말도 없다. 그도 나처럼 영문도 모르는 상태란 말인가. 얼마를 기다렸을가.병사들은 지친 나머지 코를 골며 깊은 낮잠에 빠져있었다. 상황을 미루어보건데 필경 매복작전의 임무가 하달 될것 같은 분위기인것을 느꼈다. 잠을 많이 재워야겠기에 소수인원으로 경계병을 세우고 중대본부로 갔더니 막 중대장이 대대로부터 작전명령을 받고있는 중이었다. 일주일간  매복한다는 소위 올빼미작전에 돌입 해야 하는것이다. 일개소대가 계곡 하나씩을 맡아서 적 잔병을 사살 또는 포로로 잡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소대는 맨 끝 계곡을 배정받고 매일밤에 생포하게되는 포로들을 사단 수색대에 인계하는 임무를 받게되었다. 매복 첫날밤이 되자 인접 소대에서는 벌써부터 포로생포의 보고가 들어왔다. 드디어 우리소대에도 3명을 생포했다. 그들은 무기는 소지하지 않았지만 탄통 두개를 갖고 있었는데 도무지 베트콩이라고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3인이었다.그러나 한밤중에 산에서 내려오던걸로 보아서 그들의 동조자이거나 베트콩의 가족임에 틀림없을걸로 판단되어 그대로 억류시키기로 마음 먹었다.'파홈타이'(52세),'단'(18세), '갼'(8세)-이렇게 3명의 맨발인이었다. 어쨓던 날이 밝을때까지 억류해야겠기에 임시 가둬 놓을곳을 준비했다. 1주일간 먹을 양식인 c-레이션 박스로 사각형 부스를 만들어 그안에 가둬 놓기로했다. 두손을 묶은채 두명은 그대로하고 8세짜리 '갼'은 통신병 곁에서 자게했다.머리에 모기약도 발라주고 비스켓과 짬도주면서 긴장을 풀도록 하고있는 중에 허급지급 선임하사 이중사로부터 18세'단'을 놓쳤다는 보고를 접하게되어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일주일을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매복진지가 노출되었으니 고민이 아닐수 없었다. 역매복의 염려도 염려지만  온 사단의 화망구성이며 작전의 촛점이 이곳 매복지에 집중되어 있기에 쉽사리 진지이동 또한 곤란할 지경이 아닐수 없다. 과연 어디로 얼마쯤 도주했을가를 생각하다가 지도를 펴놓고 보니 1.5km떨어진 지점에 독립가옥 서너채가 눈에 들어온다.영감 '파홈타이'도 웅성거리는 틈을 타 도망하다가 우리외곽 매복조에게 다시 붙들리게 되었는데 힘껏 후려치는 탄띠에 맞아 앞으로 넘어져 이마에 혹이 날 정도가됐다. 이영감을 앞세워 도주한 '단'을 찾기로 작정하고 일곱명의 소대원을 차출하여 곧장 독립가옥을 향해 달려갔으나 그를 찾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별도리가없이 되돌아 나오려고 하는데 이 노인이 나무 한 그루를 두 팔로 끌어안고 따라나오기를 완강히 거부하며 발버둥 치는게 아닌가. 게다가 소리를 지르는것이 '따이한' 운운하는것으로 봐서  아마도 한국 군대한테 붙들렸다는 고함인것 같았다.더이상 지체 할수가없어서 우리병사들이 입을막고 구타하여 끌고 나오다싶이하여 진지로 되돌아 오게 되었는데 '파홈타이'는 이날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첫쨋날 사단수색대에 보고된 포로의  수는 15명인데 인계시에는 13명밖에 되질 않았다. 한명은 놓치고 또 한명은 사망했으니...포로 인수팀에는 월남 정부군 중위가 한명 있었는데 이는 우리가 밤세워 체포해온 포로들을  일렬로 세우더니 소위 주민증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베트콩이나 그들의 동조자이거나 주민증 정도는 다 소지하고 다니는건 일반화 된 상식으로 되어있다. 낮에는 농민, 밤에는베트콩-이는 전선 없는 전쟁터라고 하는 월남내의 상식화 된 첩보인것이다.  그런데 적 포로는 모두가  베트콩이 아니라는 판정인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소대원 한명이 참다못해 이단 옆차기로 그의 어깨를 가격해버린 사태가 벌어지고말았다. 그들은 오랜 전쟁으로부터 마음속에 내재하고있는 외국군대와 안남민족이라고 하는 구분만 있을뿐 베트콩과 정부군이라고 하는 적대감은 희석되어 있다고하는 표현이 적절할것같다. 훗날 호치민이 천하 통일을 하고나서 민족의 반역자 단 한명만을 처형했다는 일화가  이를 뒷 받침하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소대원의 이 처사에 대해서 결코 나무랄 수가 없었다. 비록 연합군의 장교를 구타한 행위로 봐서는  강하게 꾸짖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보다는 전장에서 내부하의 사기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앞 섰기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적을 풀어주고 있는 광경을 보는 순간 "아- 월남정부군은 이미 패잔병"이란  생각으로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그토록 악착스러운 용감성은 결코 발휘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다짐하는 순간이 되어버렸다. 자기나라는 자기가 지켜야지... 지금이후에 나의 소대원의 희생은 단 한명이 나와서도 않되겠기에 인계인수의 절차를 대충한 채 되돌아 오는 길에도 씁쓸한 마음을 금할길 없었다. "부디 우리는 한 명도 죽지말고 전원 살아서 귀국하자!" 다시 매복지에 도착했는데 어찌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선임하사 이중사가 닥아오더니 귓속말로 전해 준다. 바로 철수 하게 되었다며 중대장이 아주 저기압이란다. 일주일간의 야간매복작전이 단 24시간만에 막을 내리게 되다니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를 모르겠다. 단 소대원과 함께 50여일의 백마1호작전은 최선을 다 했기에 가슴 뿌듯할 뿐인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고무밭기지 중대방어 진지로 돌아왔습니다.그날밤 나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무척 깊은 잠에 빠져서 엠블런스에 실려 연대 의무대에 온것도 모른체르고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아침에 전화가 왔다기에 받아보니  동기생 김유화 소위이었습니다. "광섭아 너 이번에 화랑올라간다."고 무공훈장이 상신되었다는 전갈이었는데 그는 대대내의 인사장교로 부임 해 왔다고 했습니다. 하룻밤을 푹 자고나니 머리가 다소 개운함을 느꼈습니다. 그제서야 소대원들이 궁금해진다. 잠시도 떨어져 있으면 마치 젖먹이를 떼어놓고 온 엄마의 심정이랄가. 고국에서 소대장 근무중에는 이러한 감정이 별로 없었는데 사선을 함께 넘은 전우는 역시 애착이 남다르다는것을 느꼈다.다음날 여러명의 장교들과 함께 도착한곳은 나트랑의 102 후송병원이었습니다. 어떻게 된거냐고 물으니까 옆침대에 자리한 신말업(이분은 훗날 사성 장군이 됨.그리고 신대위의 형님이란 분이 신중균씨라고하는  나의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세상 참 좁다.)대위가 백마사단은 아직 휴양지가 마련되지 않아서 이곳 병원이 임시 휴양소라는 것이었다. 한 낮에는 '나트랑' 해변에서 끝없이 길다란 백사장 위를 걷는가하면 파라솔그늘에서  목을 축이기도하면서 보낸 시간이 2주일쯤 .어느날 검정 선글라스에 반팔 남방 차림의 짧은머리 사나이가 나를 찾아왔다. 찦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가는가 싶더니 도착한 곳은 사단 헌병대 영창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 칠흙과같은 어두운 정글속을 헤메는 것과같은 갑갑함이 엄습해 오는데 어느 누구 이유를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 삭막한 철창 신세의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꼬박 이틀이 지났을때 헌병 중대장인 듯한 장교한분이 지나 가길래 소리쳐 불러서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를 여쭈워 보았더니 자기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작전중에 죽은 사람이 베트콩아닌 양민으로서 신문에도 크게 보도가 된 상태라고했다. '따이한은 우리를 도우러 왔느냐, 아니면 양민을 살해하러 왔느냐'고. 그 당시는 '고딘디엠' 대통령과 '쿠엔카오키'수상간에 치열한 대통령 선거전이 벌어진 때라  크고작은 진정서가 난무하여 주민들의 요구를 잘 들어 줘야 만했던 시기였는데 양민학살이라는것은 정말 그들에게는 큰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일수밖에.. 그때의 경황으로 봐서 그'파홈타이'는 죽음을 자초한것이 아닌가. 전장에서 포로가 도망쳐서 고함을 지르는 상황. 그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건지. 그당시 진정서는 제2의 베트콩이라 할만큼  과대 포장을 해서 사회를 시끄럽게했던 승리에 얼마나 큰 걸림 돌이 되는 존재인지 모른다. 얼마후 나는 사단에서 주관하는 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단참모장 대령이 내게 심문했다. "전소위는 그 노인을 구타했는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실제는 '허 은' 일병과 '이정호'일병의 임무수행중에 발생한 사건임으로 이건 전적으로 내가 책임 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예,제가 구타했습니다." "어떻게 구타했는가?" "예, 워카발로 한 두대 찬것 같습니다." "의무참모. 워카발로 한두대 차서 사람이 죽을 확율이 있는가?" 의무참모 '전병호' 소령이 대답한다. "워카발로 백대를 차도 않죽을 수가 있고, 단 한대를 맞고 죽을수도 있습니다." "전소위. 다시한번 묻겠는데 정말 전소위가 찼는가?" 남자 한 입에 두말 할수 없는게 아니겠는가. 소대원의 일인데... "제가 찼습니다." "피고 전광섭은 특수 폭행 치사. 징역1년6개월에 처한다."하고는 꽝. 꽝.꽝. 회의봉을 세번을 침과 동시에 사단보통군법회의는 막을 내렸다. 다시 헌병대 영창으로 돌아왔다. 징역1년6개월은 실감도 나지않고 웃음만 나온다. "병정놀이 정말 웃기고 있네. 그런데 지금쯤 우리애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가?" 상념에 잠기기가 몇날이 지났을가 싶더니 오늘은 사이곤 '탄손누트'공항으로가서 귀국길에 오르게 된단다. 마음이 이렇게도 착잡할가...어디에선가 "소대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들린다. 뒤돌아보니 그렇게도 보고싶었던 향도  변하사와 통신병 시동이가 귀국빽을 둘러메고 이곳 공항까지 배웅 나온것이 아닌가. 갖고 온 W빽은 중대 장교들과 소대원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귀국 선물이라고했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앞에서 하염없이 울기만하고있는 두 병사를 끌어안고 소금자국으로 얼룩 진 군복을  비비며 굳게 악수를 하고 헤어진 것이 내가 소대원과 마지막이 된 최종 순간이 될줄이랴! 그날 이후 지금까지 단 한명의 전우도 만나보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추천수1
반대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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