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야구가 아쉽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우승에 실패했다. 24일(한국시간) 대회 우승을 놓고 일본과 5번째 대결을 가진 한국은, 역사에 남을 만한 명승부 끝에 3-5로 분패했다. 이범호는 9회말 2사 후 극적인 동점 적시타를 때려냈지만, 최종적인 영웅은 10회초에 결승 적시타를 날린 이치로가 됐다. 일본은 2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0
봉중근은 지난 2경기와 달리 어려운 출발을 했다. 대릴 커즌스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은 좁고 낮았으며, 봉중근의 제구도 지난 2경기보다 좋지 못했다. 일본 타자들은 지난 2경기와 달리 잘 던진 공도 커트해내거나 안타로 만들었다.
1회초 봉중근은 앞선 2경기에서 '6타수 6땅볼'로 봉쇄했던 이치로에게 선두타자 안타를 맞았다. 보내기 번트로 1사 2루. 봉중근은 좌타자 아오키를 투수 땅볼로 잡아냈지만, 상대전적 4타수3안타의 우타자 조지마를 9구 접전 끝에 볼넷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봉중근은 좌타자 오가사와라를 다시 2루 땅볼로 잡아내고 '8출루 7득점'의 이치로를 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1회 투구수 28개.
커즌스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은 이와쿠마에게도 적용됐다. 하지만 봉중근보다는 낮게 떨어지는 다양한 구종을 가지고 있는 이와쿠마와의 궁합이 더 맞았다. 1회말 이용규가 낮은 공에 루킹 삼진을 당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와쿠마는 1회를 10개, 2회를 13개, 3회를 7개의 공으로 끝냈다. 특히 추신수를 삼진으로 잡아낸 84,5마일의 고속 포크볼(스플리터)은 절정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봉중근의 고전은 계속됐다. 2회 2번째 2사 1,2루에서 이치로를 2루 땅볼로 잡아내고 위기를 넘긴 봉중근은, 3회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그리고 2루수 고영민의 치명적인 실책에 무사 1,2루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봉중근은 고영민의 실책을 승부의 균형을 일순간에 무너뜨린 쿠바 프레데릭 세스페데스, 베네수엘라 바비 아브레유, 미국 브라이언 로버츠의 실책으로 만들지 않았다. 봉중근은 1사 1,3루에서 오가사와라에게 1,2루 간 안타를 맞아 선취점을 내주고 우치가와에게 또 1,2루 간 안타를 맞아 1사 만루에 몰렸다. 하지만 구리하라를 병살타로 잡아내 최대 위기를 1실점으로 봉쇄했다.
1-1
일본은 선취점을 얻었다. 하지만 이는 3회까지 8명의 주자를 내보내고도 1명밖에 들여보내지 못한 것이었다. 3회까지 77개의 공을 던진 봉중근이 4회를 공 5개 3자범퇴로 끝낸 것은 분위기 반전의 기회가 될만 했다. 4회말 한국은 12번째 타자 김현수가 안타를 때려내 처음으로 출루했다. 2-3 풀카운트에서 좌중간으로 힘있게 날아간 김태균의 타구가 더 뻗지 못하고 좌익수에게 잡혔다.
5회 봉중근은 선두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한국 벤치는 좌타자 아오키를 봉중근에게 계속 맡겼다. 아오키가 안타를 때려내면서 무사 1,3루. 그러나 한국 불펜에는 정현욱이 있었다. 정현욱은 4번 조지마와 5번 오가사와라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 여기에 오가사와라가 삼진 때 2루로 뛴 아오키가 아웃을 당하면서 한국은 첫번째보다 더 큰 2번째 분위기 반전의 기회를 얻었다.
5회말 경기의 흐름이 정말로 바뀌었다. 첫 타석에서 완벽하게 당했던 추신수가 이와쿠마로부터 중월 동점 솔로홈런을 뽑아낸 것. 한국은 1사 후 고영민이 2루타가 충분한 타구를 치고 나갔다. 하지만 좌익수 우치가와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2루로 송구했다. 고영민은 손이 먼저 들어갔음에도 아웃 판정을 받았다.
3-1
6회말 한국이 이진영의 삼진과 이용규의 도루 실패로 1사 1루 기회를 놓치자, 일본은 7회초 가타오카의 안타와 도루, 이치로의 번트 안타로 5회에 이어 2번째 무사 1,3루 기회를 잡았고 나카지마가 적시타를 때려냈다(2-1). 다시 아오키의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총알 같이 날아간 순간, 경기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추신수는 어려운 타구를 잡아냈고 재빠른 송구로 1루주자의 2루 진루까지 막아냈다. 이는 결국 조지마의 병살타로 이어졌다. 1루주자 나카지마는 2루 슬라이딩을 하면서 고영민의 다리를 잡다 수비방해 판정을 받았다.
지금까지와 달리 투구 교체 타이밍을 한 박자 늦게 가져간 한국 벤치는 8회초 이미 힘이 떨어진 모습을 보인 정현욱이 선두타자 안타를 허용하고 난 후에야 류현진을 올렸다. 류현진은 이나바에게 1루수 김태균의 옆을 스쳐나가는 2루타를 맞았고 우치가와에게 희생플라이를 허용했다(3-1).
와! 9회말, 아! 10회초
8회말. 한국은 이범호가 선두타자 2루타를 치고 나갔다. 그리고 1사 3루에서 대타 이대호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따라붙었다(3-2). 박기혁은 2사 후 볼넷으로 이와쿠마를 마운드에서 끌어내렸다. 하지만 좌완 스기우치의 공을 공략한 이용규의 잘맞은 타구는 좌익수 정면으로 날아갔다.
9회초 한국은 임창용이 이치로에게 선두타자 2루타를 맞았다. 고영민이 나카지마의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자 임창용도 힘을 냈다. 임창용은 아오키를 거른 후 조지마를 얕은 중견수 플라이, 오가사와라를 삼진으로 잡아내 마지막 불씨를 살렸다. 일본은 12안타 4볼넷으로 3득점.
9회말. 다르빗슈가 올라왔다. 대타 정근우는 삼진. 하지만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던 다르빗슈는 김현수를 스트레이트 볼넷, 김태균을 5구 볼넷으로 내보냈다. 한국은 1사 1,2루에서 등장한 추신수는 삼진을 당했다. 하지만 이범호가 극적인 좌전 안타를 때려냈고, 2루 대주자 이종욱은 전력을 다해 홈을 밟았다. 3-3 동점.
10회초 1사 1,3루에 몰린 임창용은 대타 가와사키를 유격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하지만 이치로에게 던진 8구는 한가운데 실투였고, 결국 2타점 적시타가 됐다. 이치로는 6타수4안타 2타점. 한국은 10회말에도 강민호가 다르빗슈로부터 선두타자 볼넷을 골라 나갔다. 하지만 대타 최정이 삼진, 이용규가 중견수 플라이, 정근우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한국야구의 놀라운 성장
미국 언론이 지난 대회 4강 팀은 한국을 우승후보로 꼽지 않은 것은 메이저리거가 6명에서 1명으로 줄은 데다 이승엽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년 사이 한국야구는 이들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1회 대회 때 이승엽은 팀 홈런의 83%(5/6) 팀 타점의 38%(10/26)을 혼자 담당했다. 최희섭(1홈런 4타점)까지 포함하면 한국 대표팀의 6홈런 26타점 중 6홈런 14타점이 이 두 해외파 타자에게서 나왔다. 이번 대회에서도 유일한 해외파 타자 추신수는 준결승전과 결승전에서 천금 같은 홈런을 때려냈다. 하지만 전체 홈런과 타점에서 차지한 비중은 18%와 7%였다.
가장 큰 활약을 한 김태균의 비중도 27%와 22%로 이승엽 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만큼 타선의 힘이 고르게 퍼졌다. 테이블 세터진이 1회 대회 이병규-이종범에서 이용규-정근우로 바뀐 것, 그동안 국제대회 3,4번인 이승엽과 김동주가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김현수-김태균으로 그 몫을 완벽히 해낸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다.
마운드도 마찬가지다. 1회 대회 때 박찬호와 구대성을 비롯한 해외파 6명의 이닝 비중은 무려 67.7%에 달했다. 해외파의 평균자책이 1.48이었던 반면, 국내파는 3.10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유일한 해외파 임창용은 물론 마무리라는 중책을 맡긴 했지만 단 5.6%를 담당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이 가장 기대한 2명은 베이징올림픽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류현진과 김광현이었다. 하지만 둘은 기대와 달리 10⅓이닝 10자책에 그쳤다. 하지만 한국 마운드는 이들의 활약 없이도 철벽을 자랑했다.
1회 대회에서 한국이 4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마운드와 수비의 힘이었다. 그에 비해 타선의 힘은 약했다. 하지만 1회 때 16볼넷/51삼진에 그쳤던 한국 타선은 이번 대회에서 50볼넷/56삼진을 기록, 삼진과 거의 같은 수의 볼넷을 얻어내는 놀라운 선구안을 선보였다. 또한 1회 대회 7경기 6개의 홈런수가 이번 대회에서 9경기 12개로 불어나는 등 장타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타선은 더 이상 한국야구의 약점이 아니다.
돋보였던 투혼
한국과 일본, 그리고 쿠바는 다른 팀들과는 확연히 다른 자세로 대회에 임했다(지난 대회를 통해 이를 눈치챈 미국은 그래서 이 세 팀을 한 쪽에 몰아넣고 준결승 전까지는 만나지 않도록 했다). 결국 결승에 올라온 팀은 한국과 일본이었다. 일본에 2번을 져 떨어진 쿠바도 1회 대회와 같은 편성이었다면 4강에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거가 주축이 된 팀들이 '놀러 나오듯'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도 나름 자국의 명예를 걸고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이 자리에서 쓰러지더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우리 식의 투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페이스를 일찍 끌어올리기에 메이저리그 시즌은 너무도 길며, 부상이라도 당할 경우 잃게 되는 금전적 대가는 너무나 엄청나다. 하지만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우리 선수들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실망스러웠던 팀은 주최국으로서 솔선수범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미국이다. 미국은 1회 대회 때 당했던 망신을 씻고 싶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따라주지 않았다. 미국은 선수단 구성에 애를 먹어 대회 3일 전에서야 캠프를 차렸고, 그 두터운 선수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체선수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골드글러브 유격수 지미 롤린스가 지명타자로 나서고, 애덤 던이 자기 앞에 떨어진 공에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우스운 팀'이 됐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성과를 폄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는 일본과 함께 가장 진지한 자세로 대회에 임했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와 메이저리거가 지금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면 WBC는 진정한 야구의 월드컵, 진정한 월드시리즈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돋보였던 정신력
스포츠 세계에서 '정신력으로 이겼다'는 말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정신력도 엄연한 경기력의 일부다. 긴장을 떨쳐내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도 실력이다. 특히 공과 공 사이에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야구에서 정신력, 즉 멘탈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요기 베라가 '야구는 90%가 멘탈, 나머지가 10%'라고 했던 것도 핵심을 찌른 말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 팀은 놀라운 정신력과 집중력을 발휘했다. 객관적으로 강한 전력의 일본을 맞이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오히려 긴장한 것은 일본이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이나 다름 없는 베네수엘라를 상대로도 당당했다. 우리가 1회에 승부를 끝낸 것이 여러 번 되는 것도 그 엄청난 집중력의 증거였다.
인프라가 답이다
야구는 단기전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다. 각 리그의 챔피언 결정전이 7전4선승제인 것도 흥행을 떠나 그래야 진정한 강자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약팀의 승리 가능성이 높은 야구에서 우승 팀의 승률이 6할을 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야구에서는 1경기라면 상대 전력의 15%만 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때문에 단기전에서의 성과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와 일본의 고교팀 숫자가 50대4000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번 WBC에서의 성과를 야구 인프라를 늘릴 수 있는 '터닝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 돔구장은 아니더라도 현재 경기장 시설을 대폭적으로 개선해야 하며, 기반을 다질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 이번 WBC의 의미를 각별하게 만드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