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金賢姬, 1962년 1월 27일 - )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범인. 범행 후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1990년 4월 12일 사면조치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大韓航空 858便 爆破事件, Korean Air Flight 858 Bombing)
대통령선거를 약 2주 앞둔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5분쯤 버마 근해인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기가 북한공작원에 의해 폭파돼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탑승객은 중동에서 귀국하던 근로자가 대부분으로 한국인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사건 발생 이틀만인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 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됐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하치야 신이치(본명 김승일)'와 '하치야 마유미(본명 김현희)'라는 여권을 가진 남녀로 이들은 바그다드에서 탑승한 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으며, 이중 마유미의 여권은 위조여권임이 바레인(탈출로 중간기착지)공항에서 밝혀졌다. 이들은 바레인에서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 위조여권 적발로 체포되자 담배 속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기도, 김승일은 숨지고 김현희는 중태에 빠졌다.
김현희의 신병은 바레인 당국에 의해 한국으로 인도되어 12월15일 김포공항으로 압송됐다. 김현희는 압송 8일만인 12월 23일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858편 기내 좌석 선반에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려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했다고 자백했다. 그 후 김현희는 1990년 3월 27일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전향의사 표명과 김정일의 도구로서 이용된 점이 정상참작되어 90년 4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나 안기부 촉탁직원이 됐다.
사건 일지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1분 바그다드에서 출발하여, 승객 115명을 태운 KAL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방콕과 최후 교신 뒤 실종.
11월 30일 현지조사반을 급파한 관계당국은 인도양과 벵골만 상공에서 공중폭파 가능성 시사.
12월 1일 아랍에미리트 주재 한국대사관은 바그다드에서 탑승하여 아부다비에서 내린 요주의 인물 남성1명, 여성1명을 검거하였으나,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고 발표.(김승일 자살, 김현희는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압송됨)
12월 2일 청와대는 대북한 안보체제 강화와 선거방해 책동에 대한 엄단을 지시.
12월 7일 바레인에서의 수사를 종결하고, 정부는 북한의 88 서울 올림픽 대회 방해 책동으로 사건 분석.
12월 9일 현지조사단 철수 결정.
12월 11일 KAL858기 잔해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하였으나, 12월 15일 미국방성은 KAL858기 잔해가 아니라고 보고.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실시. 안기부 주관으로 하치야 마유미 신상확인 조사 착수.
1988년 1월 15일 어느 한 여성은 TV기자 회견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김현희이며,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와 대통령 선거 혼란 야기, 남한내 계급투쟁 촉발을 위해 KAL858기를 폭파하였다고 발표.
1989년 2월 3일 서울지검은 김현희에 대해 살인죄, 항공기폭파치사죄, 국가보안법으로 불구속 기소.
1990년 3월 27일 김현희에 대해 대법원의 사형선고.
4월 12일 김현희에 대한 사면 조치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다음 달인 4월, 정부가 밝힌 김현희 특별사면의 이유
『김현희는 이 사건의 진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유일한 생존자로서 수사와 재판이 허위날조된 것이라는 흑색 정치 선전을 분쇄하고 북한 공산집단의 폭력성과 침략적 근성을 입증할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점 등에 비추어 김현희를 대한민국의 품으로 과감히 수용, 조국의 평화통일대열에 동참시키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2004년 3월 23일 국가정보원은 KAL858기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책 《파괴공작》의 출판사 창해 대표에게 10억원 손해배상 소송 제기.
5월 22일 ~ 23일 KBS는 〈KAL858기의 미스터리〉를 방영하여, 수사결과에 대한 거짓부분을 밝힘.
6월 28일 법원은 국가정보원의 《파괴공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 판결.
12월 15일 서울지검 중앙1부는 유족들이 낸 기록공개 소송과 관련해 1심 재판부가 공개하라고 판결한 5천여쪽의 기록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발표.
당시 한국정부의 수사 결과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보잉 707기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죽었으며,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고, 대한민국 내 대정부 불신을 조장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객기 폭파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으로 자살 하고, 김현희는 남한으로 압송하였다.
수사 결과에 대한 의혹들
1. 블랙박스가 발견되지 않음 (안기부에서 일부를 폐기함)
2.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고 사망자 시체, 유품이 발견되지 않음
3. 국가정보원의 빠른 수사 종결처리
김현희씨 "노무현 정권 아래서 긴 피난생활"
일본어 선생 가족과 면담 앞두고 日 신문에 편지
1987년 KAL 858기 폭파사건의 범인인 김현희(金賢姬·47)씨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에 편지를 보내 일본인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씨 가족과의 면담을 앞둔 심경을 밝혔다. 다구치씨는 북한에서 김씨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이은혜'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편지에서 "나는 지금까지 노무현 정권 아래서 긴 피난생활을 해왔다"면서 "(다구치 가족과의) 만남이 가까워져 기쁨이 넘친다"고 했다. 김씨는 이어 "이 만남이 개인적인 기쁨으로 그치지 않고 한·일 양국이 이해하고 협력하는 공간으로 확대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김씨는 "현재 한국과 일본에는 북한에 의한 수많은 납치 피해자 가족들이 있다"면서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던) 2002년 9월 이후 피랍자 송환이 저조하다. 어떻게 하면 북한 당국의 체면을 살려주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냐"고 했다.
김씨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면서 "제가 다구치씨 가족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일본 정부가 북한 당국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마침내 다구치씨가 가족을 상봉하게 됐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길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아사히(朝日)신문은 김씨와 다구치씨 가족과의 면담이 오는 11일 부산에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한 바 있다. 김씨는 면담이 성사될 경우 공동 기자회견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 사건 이후 처음으로 공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12년만에 공개석상 김현희] 日정부 '납치문제' 실속 챙겼지만, 한국정부는…
[한국일보]
"남북관계 불필요한 부담 떠안아" 지적도
11일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씨의 기자회견 이벤트를 통해 실리를 챙긴 것은 일본이었다. 이벤트의 주인공인 김씨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을 위로했고, "북한은 납치 피해자가 고향에 돌아가도록 해 줘야 한다"고도 말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게 받아들일 상황이었다. 우리 정부는 명분은 챙겼지만, 남북관계에 있어 부담을 떠안았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는 국가적 이슈다. 일본정부는 1997년 만들어진 '납치피해자 가족회'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북핵 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에서도 납치 문제를 걸어 대북 경제ㆍ에너지 지원에 참여하지 않을 정도다.
참여정부 때는 한일 협조가 원활하지 않았다. 일본의 다구치 에이코(田口八重子)씨 가족은 김현희씨 면담을 5년 전부터 요구해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북관계를 의식해 일본과 엮이는 것을 피해 온 참여정부의 자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상황이 반전됐다. 납북자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우리 정부와 납치자 문제를 챙겨야 하는 일본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이번 회견은 일본 정부가 주관했지만 한국 정부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가능한 지원을 계속해 나가겠다"(2월 11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는 입장 아래 국가정보원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물밑에서 협력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번 행사로 우리 측이 얻은 것은 무엇이냐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들에게 "납치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한 발 전진했다"는 식으로 선전할 거리를 챙겼다. 반면 우리 정부의 경우 '인도주의 사안에 최선을 다했다'는 인상을 남긴 것 외에 다른 현실적 실속을 챙기지는 못한 것 같다. 정부가 목을 매는 납북자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일본의 협조를 얻어낼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번 회견으로 인해 일본인 납치자 문제, KAL기 폭파사건까지 이슈가 되면서 북한이 반발할 거리만 늘었다. 가뜩이나 험악한 남북관계 상황에서 또 하나의 짐을 떠안게 된 셈이다. 때문에 정부가 일본에 말려들어 불필요한 부담만 안게 됐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부산=정상원기자 ornot@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