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숨죽이며 투수의 다음 공을 지켜봤다.
세계 최고를 겨누는 월드베이스볼 클라식의 결승전, 라이벌과의 경기. 한 점차로 뒤진상황에서 9회말 2아웃 주자는 1루와 2루. 타자는 4번타자. 장소는 한반도를 벗어나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산다는 그곳, 바로 로스엔젤레스에서였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광화문의 구석진 한 상가 지하의 어둠침침한 음식점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 두어명과 티비를 시청하고 있었고 곧 한마디를 내뱉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저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바로 1분 후의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극도의 긴장과 동시에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바로 “희망”이니까요” 저 넘어오는 공을 칠 수 있다는, 역전할 수 있다는, 이길 수 있다는. 그리고 우승할 수 있다는… 정말 무엇이든 이루어 수 있다는!
그 순간은 “중간 시간”이다. Transition period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는 순간. 긴장과 기대가 공존하는 순간. 우리 모두 “하나되는” 순간이다.
바로 옆에 앉아있는 친구가 되었건, 우리에게 점심을 사주시던 변호사님이던, 그 옆에서 일사분란하게 행주를 닦으며 티비를 지켜보던 알바 종업원이던, 뒤에서 뒷짐을 지고 역사적 사실을 거명하며 저 상대팀은 꼭 이겨줬으면 좋겠다던 늙은 백발의 할머니이던, 그들과 나 사이의 많은 이질감과 차이점 – 정치적 이념이 되었건, 사회적 위치가 되었건, 부의 축적량이나 교육의 수준이 되었건 – 은 우리의 공통된 간절한 염원과 소원, 희망과 기대,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갈라놓지 못하였다.
우리는 결국 그것을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의 하나됨.
‘야구’’는 어쩌면 우리의 저런 하나되고픈 욕망을 상기시켜주는 ‘변명거리’일 수도 있겠다.
‘어떤 운동선수들의 승리,’ 그 자체보다 우리는 훨씬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명분을 부여하고 있다: 그들의 승리를 통해 너무나 다른 너와 내가 공통된 분모를 찾아 하나되고픈 욕망; 그들의 승리를 통해 자랑스러운 하나된 ‘우리’를 세계에 들어내고픈 욕망; 각자 가슴 한구석의 다른 고뇌거리와 상처를, 열약한 환경에서 오로지 ‘희망’을 갖고 싸워가는 이름 모를 운동선수들의 승리를 통해 분출하고 포효하며 날려버리고 싶은 욕망을!
그 순간을 사랑한다.
그 순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순간은 한국인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저 멀리 고국팀을 응원하는 상대팀의 건강한 청년들과 꿈 많은 어린이들에게도 동시에 이루어진다. 자국 팀이 잘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그 순간은 정직하고 공평하되 편협하게 한 쪽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너와 나의 하나됨은 결국 국내적인 개념이 아니다.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다. 내가 “너”를 포용할 수는 있지만 너를 제외한 ‘그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이 것은 반쪽 짜리, 아니, 거짓된 가면을 쓴 포용일 뿐이다. 단지, 냉혹한 승부가 불가피한 ‘야구’라는 맥락 안에 존재하는 편가르기는 상황적이고 일시적일 뿐, 이 룰을 떠나 인본적인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는 그 어느 누가 단순히 출신이 다르다고, 배경이 다르다고 ‘적’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하지만 나는 현재 ‘야구’를 보고 있기에,
저 멀리 로스엔젤레스 경기장에 결집한 4만 명 교민들의 목쉰 응원소리와,
한국 이 곳, 저 곳에서 가슴을 조이며 조용히 ‘도와주소서’ 라고 기도를 중얼거리는 수 많은 청년들과,
눈시울 적시며 한 편의 ‘기적’을 염원하는 장년, 노년층.
즉, “우리는 할 수 있다,” 라는 희망을 갖고 다음 공을 지켜보는 저 모든 이들에게,
기적은 일어났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기적은,
다음 공이 오기 전,
“바로 그 순간” 에 벌써 이루어졌다.
모두의 하나됨
그리고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