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리포트] 주요 정상들 "자유시장 방종은 인류의 적"
최근 호주국민의 눈길이 오랜만에 영국 런던으로 쏠리고 있다. 2일부터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 Summit)가 런던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심화되면서 총체적 위기에 빠진 지구의 경제를 살려내기 위해 주요국가 정상들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는 것.
전통적으로 권위주의를 몹시 싫어하는 호주국민들이 이번처럼 국제정상회의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그동안 APEC 정상회의 등을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면서 기념사진이나 찍는 것으로 간주해오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다.
맨 선두에는 케빈 러드 총리가 있다. 러드 총리는 이전 총리들과 달리,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외치고 있다.
호주는 왜 G20에 관심을 갖나
1998년 아시안 외환위기가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치자 이를 계기로 발족한 G20은 선진국과 신흥국의 주요 대화채널로 자리 잡아왔다. G20 국가는 전 세계 국민총생산(GDP)의 약 90%, 전 세계 교역량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를 아우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G20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수밖에 없다.
▲ 지난 3월, 호주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케빈 러드 총리와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러드 총리는 런던 G20을 위해서 6개월 전부터 꼼꼼한 물밑작업을 벌여왔다. 비록 의미 있는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지난 3월 초에 호주를 국빈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과도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바 있다.
특히 러드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협조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G7이나 G8에는 못 미치지만 거기에 거의 근접했던 나라가 한국과 호주 등이었을 뿐더러 G20에서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맡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 지도자가 본인 외에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G20의 신흥국가들은 말이 신흥국이지 거기엔 한국, 중국, 인도, 브라질, 호주 등이 포함되어 그들이 빠진 상태에서 결정된 세계경제정책은 의미가 없을 정도다.
오랫동안 G7, G8 등으로 거드름을 피웠던 미국, 일부 유럽국가, 일본 등의 경제 선진국과 새롭게 부상하는 G20 신흥국 사이에서 한국과 호주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국제적 위상이 확보된다는 의미다.
글로벌 경제위기 해결의 주도권은 누가?
그러나 G20은 G8과는 달리 상설기구도 아니고, 회의를 통해 결정한 사안에 대한 강제력 또한 갖고 있지 않다. 때문에 이번 런던 G20도 소문만 요란했지, 자칫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만 찍고 끝나는 비효율적인 국제 포럼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
▲ 백악관을 뒤늦게 방문한 러드 총리를 맞는 부시 대통령의 떨떠름한 표정(위)와 부시와 러드의 껄끄러운 관계를 표현한 의 만평(아래).
그런 징후는 이미 있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G20을 무시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2008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G20 1차 정상회의 때 "미국과 중국의 'G2 서미트'에 다른 나라 정상들이 들러리를 선 격"이라는 발언을 했을 정도.
이런 일도 있었다. 2008년 10월 29일자 은 "부시의 G20 무시에 러드 얼굴 붉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두 정상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을 폭로했다.
러드 "11월 15일에 열릴 워싱턴 G20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실질적 논의를 해야 한다. 이제 G8만으로는 어렵다."
부시 "G20이 뭔데?(What's the G20?)"
호주언론은 그 사안에 대해 두 가지로 분석했다. 여전히 G8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부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또한 비록 G8 국가는 아니지만 초강대국 대열에 들어선 중국에게 칼자루를 쥐여줄 수 없다는 위기감의 표출이었다는 것.
거기에 러드에 대한 부시의 개인적인 괘씸죄도 추가됐다. 4차례나 총리를 연임하면서 꼬박꼬박 미국으로 취임인사를 왔던 존 하워드 전 총리와는 달리, 러드 총리는 취임 10개월이 넘도록 취임인사를 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
"이제 G8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G20을 향한 케빈 러드 총리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그는 지난해 3주 반 동안 이어진 연말연시 휴가를 이용해 7700자에 달하는 글로벌 금융위기 에세이를 써 에 기고했다.
그는 런던 G20의 사전포석으로, 1월 말 '다보스 포럼'에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를 대신 참석시켜 자신이 쓴 에세이 내용과 자신이 구상해온 자본주의 새 모델을 전파하기도 했다.
러드 총리가 G20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호주가 지닌 어정쩡한 위상을 재정립하자는 의지가 가장 큰 것으로 분석된다. 호주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한 아시아 지역의 나라인 점과, 국력 또한 선진국과 신흥국의 틈새에 끼어 있는 나라라는 점이 고려된 것.
▲ 은 G20 국가의 경제상황을 비교한 도표를 활용해 한국과 호주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의 꿈은 G20이 상설기구가 되어 G8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러드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협조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차기(2010) G20 의장국이라는 점이 그렇다.
한국은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와 함께 5그룹에 속한다. 그룹별 순환방식을 채택한 G20은 관례에 따라 한국을 차기 의장국으로 선정했다. 이래저래 러드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행보를 맞춰나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문제는 이 대통령과 러드 총리의 경제정책에 관한 이념적 간극이 너무 크다는 것. '금산분리 완화' '부유층 감세정책' '일자리 창출을 위한 토목사업' 등으로 대표되는 이 대통령의 경제정책과는 달리 러드 총리는 '탐욕스런 신자유주의 청산'과 '부유층 증세와 복지정책 확대' '국가의 적극적인 시장(특히 금융권) 개입'으로 특징 지워진다.
차기의장국 한국의 MB 빼고는 의견조율 성공?
반면 미국, 영국 등과는 찰떡궁합이다. 케빈 러드 총리는 런던 G20 참석에 앞서 미국으로 가서 버락 오바마 미 신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G20을 사전조율 했다. 성향이 비슷한 두 정상은 서로를 '소울 메이트(soul mate)'로 부르면서, 경제위기 타개를 위한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에 공감을 표시했다. 적극적인 부양책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
아울러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독일과 프랑스가 G20 의제로 내놓은 금융규제 강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대목은 미국과 호주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에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특히 투자금융은행의 탐욕스런 CEO들은 공공의 적이 된 지 오래다.
▲ 서로 '소울 메이트'로 부르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케빈 러드 호주 총리
2박 3일 동안 미국에서 충분한 사전정비작업을 마친 러드 총리는 G20 개막 3일 전에 영국에 도착하여 현지 활동에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4월 1일, 영국 국교인 성공회 산하 에서 열린 경제포럼에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와 함께 참석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동안 족쇄 풀린 자유시장이 마치 신처럼 숭배됐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이 허위와 기만의 신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공공의 이익과 시스템의 신뢰 등의 가치는 도덕의 경계선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자유시장의 방종은 인류의 적이 됐다. 그 결과 OECD가 경고한 대로 세계경제는 지속적인 하강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시장과 정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경제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
▲ 런던 G-20에 참석한 러드 총리가 브라운 영국 총리와 함께 세인트 폴 성당에서 경제포럼을 열고 있다.
G20에서 '차기의장국'인 한국의 이 대통령과 러드 총리가 어느 부문까지 공조하고 보조를 맞출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에서의 러드 총리 발언을 분석해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과는 큰 차이가 느껴진다.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은 불가피하다"고 발언한 대목은 '금산분리 완화 정책'과 정면으로 상치한다.
문제는 오바마 미 대통령을 비롯해 G20 정상 대부분이 케빈 러드와 비슷한 해결책을 고민 중이라는 데 있다. 거의 유일하게 이명박 대통령만 시장의 자유를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자유시장의 방종'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케빈 러드와 '시장자유'를 외치는 MB의 '오월동주'는 어떤 결말을 맺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