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8년 7월 12일 영국 캠브리지 대학은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마더 데레사는 학위를 받은 후 매우 주목할 만한 연설을 했으며
그것은 바티칸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이다. - 편집자 註
헨리 뉴먼 추기경의 기도로써 시작하겠습니다. 이 기도는 여러분과 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제가 가는 곳마다 주님의 성령을 널리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의 생명과 거룩한 영으로 제 영혼을 가득 채워주소서. 제 존재 전체를 꿰뚫으시어, 저를 완전히 소유하소서. 그리하여 저의 온 삶이 오로지 주님만을 비추게 해주소서."
"하느님은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십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어느 유다인이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교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 "그리스도교는 주는 종교"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을 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마리아께 주셨고, 따라서 마리아는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은 여러분과 나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다만 죄가 없으실 뿐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생명, 곧 당신의 존재를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이셨지만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주셨으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허기를 채워주시기 위해 생명의 빵(성체)을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살을 먹지 않고, 당신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연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 여러분과 나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애인이어야 하고,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한뜻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앙을 가져야만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신앙은 사랑이요, 살아 움직이는 사랑은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먹을 수 있고 또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난한 이의 비참한 옷을 입고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 사업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사회사업가들이 아니라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과 맺어져 묵상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자비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사랑이며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도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고, 소중한 사람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가난한 이들을 알고 있습니까?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 곧 정신적으로 외로운 사람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에도 가난한 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쓰레기더미에서 한 여인을 찾아낸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열이 심하게 나서 불덩이 같았으며 단 며칠밖에 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거듭해서 "내 아들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쓰레기더미에서 끌어내어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나는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용서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녀가 자기 아들을 용서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녀는 아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죽는 것이나 자기 몸이 불덩어리 같은 것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들이 엄마인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만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사랑은 집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좀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고통이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점점 더 많이 보고 있습니다. 가족이지만 너무나 바쁜 나머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 얘기를 나누고, 함께 기뻐할 그런 시간도 갖지 못하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집밖에서 헤매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가족이 서로 함께하는 일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서로 바라보며 웃으십시오!"
얼마 전에 미국 교수 여러 명이 나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서로 바라보며 웃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매우 서둘러서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나에게 "결혼하셨습니까?"라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예,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이 웃으시게 해드리기가 어려운 때가 자주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사랑이 시작된다고, 사랑은 바로 집 안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노인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요양소에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죽었습니다! 왜? 왜냐하면 우리가 아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서양에서 아이를 한 명 더 먹여 살리고 더 교육시키는 것이 두려워서 죽여야만 한다는 것은 일종의 커다란 영신적인 빈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극심한 빈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가정에서 어린이 한 명을 더 먹여 살려야 한다는 공포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막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주님의 창조물이요 자녀인 그 어린아이들과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해 주님께서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는 데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고통입니다. 사랑은 예수님께 고통을 주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께 슬픔을 주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느님은 모든 것을 주셔야만 했고, 당신의 아드님까지도 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