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이 성형 수술에 대해 맹목적인 비난을 가하거나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자는 씨알도 안먹히는 강태공의 낚시와도 같은 얼어죽을 개소리가 아님을 소기에 밝힌다.
조각같은 몸매와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모의 소유자 김아중이 95kg의 거구에 육박하는 인물로 분한 것과 전신성형으로 화제를 모았던「미녀는 괴로워」. 제목부터 황홀하다.
외모 때문에 자신의 꿈과 사랑에 당당할 수 없었던 주인공 ‘강한나’가 택한 선택은 전신성형. 피나는 노력끝에 그녀는 결국 오랫동안 바래왔던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지만 과거를 숨긴 채 질주하던 그녀의 아슬아슬 불안한 행보는 결국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당당히 맞섬으로써 그녀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회복하게 된다는 대략의 줄거리.
뭐 줄거리가 어떻든지 간에 감독은 과거를 외면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관연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 김아중의 늘씬한 미모와 노래 솜씨에 가려 과연 이 메세지가 잘 전달되었을런지는 의문이다.
우선은 '강한나'의 노력에는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강한나'가 피땀흘린 수많은 고난의 시간들을 짧게 압축한 점이 이 영화의 흠이라면 흠이랄까. 그 이후의 삶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만큼 고통의 수난사는 대중들에게 더 쉽게 잊혀지는 법이다. 이 영화가 조금만 더 이 시간들에게 시선을 할애했었더라면, 조금 더 의미 깊은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아무튼 각설하고, 데미무어의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드디어, 전신 성형수술까지 대중문화의 코드로 등장했다. 오늘 기사에는 ‘강한나’가 ‘제니’가 되는데 드는 비용이 고급 승용차 한대값에 맞먹는 6천만원 정도로 3~6개월정도의 회복기간이 요구된다는 견적서까지 각계의 전문의들의 설명과 함께 친절히 실렸다. 여기에 한 네티즌은 6천만원 인생이 달라진다면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반응을 내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2006년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 통탄할 만큼 슬프다. 미녀는 자신 이외의 문제로 괴로울 이유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강한나’와 ‘제니’의 인생은 어떻게 다른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비주얼이 안되는 강한나는 립싱크에 백보컬 신세, 입을 옷도 마땅치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은 혐오와 경멸에 가득차 있다. 반면, ‘제니’는 어떤가. (물론 영화이기에 픽션적인 요소를 가미하였겠지만)지나가던 짜장면 배달부를 공중회전 하게 만들고, 머리에서 피가 뿜어져나와도 교통경찰에 의해 간단한 접촉사고쯤으로 무마된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워낙 착한 ‘강한나’의 본성은 ‘제니’가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착한 미모에 착한 마음씨, 순수함까지 겸비한 그녀는 우리 시대가 바라는 미녀상에 딱 부합한다. 게다가 자신을 평가절하했던 남자에 의해 다시 자신의 자아를 찾게된다는 이 전개는 또 무슨 순애보인가. 사랑이라는 절대가치가 또 다시 우스워지는 순간이다. 신데렐라에 인어공주까지 완전 짬뽕된 이 영화는 여러면에서 디즈니판 코메디가 되어도 전연 무방하다.
"이쁘면 뭐해? 마음이 예뻐야지!"
개소리 말아라. 어디 삼국시대 이전에나 통할 법한 말을. 요즘은 한술 더떠서 이쁜 애들이 머리도 좋고, 마음도 착하고 잘났으면 잘났지 못나지는 않은 세상이다. 게다가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아주 그냥 더없이 화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세상에 「미녀는 괴로워」와 같은 영화들이 난무하면서 예쁘면 뭐든지 용서가 된다는 이상한 이데올로기까지 퍼트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생각들을 아무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못생긴것도 죄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니까 피해주는 거잖아요."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한 여고생의 항변이다. 이 여고생은 고등학생임에도 방학 때 성형수술하기 위해 집을 나와서 학교 공부보다는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쪼개고 돈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이 여학생을 비난하기 전에 한번만 더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것이 단순히 한 당돌한 여학생의 왜곡된 사고방식의 문제인가? 이것을 개인의 탓이라고 돌리기 전에 이 여학생에게 이쁘면 다 된다는 생각을 주입시킨 배경이 무언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자신에게 콤플렉스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써 성형수술도 나쁘지 않다. 발달한 과학기술의 혜택을 썩히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것이 사치재가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 성형수술, 좋다. 충분한 돈이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민주주의 사회에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뤄지는 의사결정에 대하여 그들의 권리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한번쯤은 당신의 외모에 무엇이 불만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당신의 외모에 불만을 갖게 만드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강한나’는 ‘김아중’이 아니다. 때문에 ‘강한나’는 ‘김아중’이 될 수 없고, ‘김아중’은 ‘강한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영화가 미치는 파급효과는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단순히 웃고 넘길 수 없었던 까닭은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자본의 문제도 함께 결부되어 있다. 모든 정신적인 가치마저 물신화 되는 세상에서 한 인간을 평가하는 요소로써 바로 그 ‘외모’라는 것은 인간을 서열화시키고 상품화하는데 더없이 좋은 기준이다. 연예인들은 좋은 예다. 때론 맹목적인 군중심리에 의거한 소위 ‘안티’들에 의해 난도질 당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버는 수입은 그들의 탤런트보다 그들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정비례한다. 특히 여성의 경우 어느 순간부터 아름다움에 있어서 여성은 철저히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주체적인 아름다움이기 보다는 대상으로써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굴레는 남성 뿐만이 아니라 여성 자신조차도 흡수되어 양자의 굴레로 만들어버렸다. 때문에 여성들은 그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콤플렉스와 만족감을 이유로 표준화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건넌마을 불구경하던 남성들도 이제 예외는 없다. 그들도 대상화되어 간다. 우리사회는 점점 이렇듯 주체는 사라지고 타자와 대상만이 남았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아름다울지는 몰라도 통탄할 만큼 슬픈 것이다.
미디어와 현실의 벽이 과학기술과 자본에 의해 사라졌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생산해 낸 이데올로기에 외려 자신들이 잠식당하고 있다.
이 문제는 성형수슬이 어쩌구 저쩌구,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단순한 이분법적인 담론의 문제가 아니다. 더더군나 이렇게 짧은 글에서 다룰만큼 간단한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본연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 현상에 대한 한번쯤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 충분히 가치있고 존중받아야 마땅한 삶이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욕망과 욕구라는 차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그 기저에 누구를 위한 아름다움인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