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한풀 꺾였다곤 하지만
역시나 제 방은 덥군요.
오늘 밤도 끈적한 땀에 온 몸을 적시며
뒤척 거려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래서 잠이 부족한가 =============================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민아, 한나...
그들 옆에 서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밖으로 나간 뒤
아버지가 다가오셨다.
아버지 - 일어났냐.
기억 - 아.. 예... 윽....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애를 쓰는 순간
허리에서 뒤통수까지 짜릿한 통증이 엄습했다.
얼마나 아팠는지 눈물이 핑 고이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기억 - 아아아..... 아....
일단 극대값을 찍은 뒤부터
x<1 인 지수함수를 따라 감소하는 통증에
난 힘겹게 숨을 골랐다.
이런 내 모습에 아버지의 미간엔 깊은 주름이 내천자(川)로 새겨졌다.
아버지 - 그냥 누워서 말해라.
기억 - 예...
아버지 - ...... 누가 이랬냐.
기억 - ......
아버지 - 누구냐. 누가 이랬냐.
기억 - 아버지....
아버지 - 그래, 말해봐라.
기억 - 죄송합니다... 아버지...
목에 핏대를 가득 세운 채
간신히 화를 참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
도저히 그 말밖엔 나오질 않았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몰라도
그 사이 너무나 왜소해져버린 아버지의 어깨.
필시 그 줄어든 폭만큼 애간장을 태우신 것이리라...
아버지 - 말해! 내 이놈들 사지를 찢어발겨 버릴 테니까!!
어머니 - 여보, 그만 해요. 당신 지금 너무 흥분했어요.
아버지 - 내 이놈들을.... 내 이놈들을... 그래...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간신히 가누며
병실 밖으로 나가시는 아버지.
그 뒷모습에 한없이 죄송한 기분이 복받쳤다.
아버지가 병실을 나가신 뒤,
민아가 조심스레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민아 - 괜찮...지는 않겠지만.... 어떻게 된 거야?
인공풍화공정에 24시간 노출된 도자기처럼
세월의 고단함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표정에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진 나였지만
그보다 더 발끈하고 치받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유형의 인간.
기억 - 안군이야.
민아 - 응?
기억 - 나 이렇게 만든 놈..... 안군이라고.
차마 아버지가 계실 땐 하지 못했던 그 말을 꺼내놓자
민아의 표정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민아 - ... 안군 오빠가 이랬다고?
기억
- 그래, 안군 그 놈이 사람 시킨 거야.
아직 증거는 없지만...
범인들만 잡히면 바로 밝혀질 거야.
민아
- 기억아....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냐?
안군오빠는 절대 그럴 사람이....
내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녀석을 싸고도는 민아의 말에 서러울 만큼 화가 복받쳤다.
그녀는 한 번이라도 내 기분을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기억
- 네가 뭘 알아? 그놈이 사람들 없는 자리에서
나한테 무슨 말을 지껄이고 다녔는지 알아?
연극에서도 현실에서도 이기는 건 자기라고,
네가 왜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속 긁고 다니던 인간이 그 인간이야!
예전에 버스에서 있었던 일도 그 인간이 꾸민 거고,
이번에도 내가 불꽃놀이 왔다는 걸 알고 손을 쓴 거라고!
민아 - 기억아, 침착해, 지금 너무 흥분해서...
기억 - 지금 침착하게 생겼어? 지금 넌 누구 편을...쿨럭! 끄으윽....
갑작스레 목을 타고 올라온 피비린내에
거친 기침을 하는 순간,
츄르륵... 하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곳엔
내 옆구리 꽂힌 튜브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고이는 플라스틱 통이 있었다.
기억 - 뭐....뭐야 이건.
민아
- 그게.... 갈비뼈가 폐를 찔러서
고이는 피를 빼내는 거래.
4~5일 정도 지나면 멈출 거라고....
기억 - 허! 허허..... 콜록! 아아악....
하도 기가 차서 헛웃음을 치자
그 충격으로 다시 옆구리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나 정말 용케도 살아있구나...
기억
- 젠장, 다른 덴 어떻게 된 거야?
움직이는 덴 오른손뿐인 것 같은데.
민아 - 지금 다 기브스 해놨어. 당분간은 못 움직일 거야.
기억
- 하아.... 아무튼 내 말 믿어.
이거 전부 안군 그놈이 한 짓이야.
앞으로 절대 그놈 근처에도 가지 마. 알았지?
민아 - .......
기억 - 왜 대답을 못해?
민아
- 저... 기억아, 이제 공연도 얼마 안 남았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더 찬찬히 상황을....
기억
- 공연? 지금 공연이 문제야?
아직도 상황이 파악이 안 돼?
나 죽은 다음에나 믿을래?
아으 나..... 나 진짜.....콜록! 아아악.... 아악....
깊이 숨을 들이 쉴 때마다
튕기듯 터져 나오는 기침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민아로 인한 답답함이 더 컸다.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나가 그녀를 문밖으로 이끌었다.
한나
- 언니, 언니는 잠깐 나가있는 게 나을 것 같아.
내가 잘 이야기 해 볼게.
민아 - 아니 난 그저...
한나 - 지금 둘 다 너무 피곤해서 그래. 잠깐 마음 가라 앉히고 있어.
민아를 병실에서 내보낸 한나는
잠시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더니 내 침대 옆으로 걸어왔다.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는 내 손을 감싸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한나 - 미안해요.... 나 때문에.
기억 - 하아.... 아냐, 너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다.
한나 - 오빠.....!
한나는 내가 이렇게 된 게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는지
왈칵 눈물을 쏟으며 침대에 엎드렸다.
아마 내가 눈을 뜰 때까지
가장 마음 졸여야 했던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을까?
그녀가 울음을 그친 뒤,
난 일단 주변정황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기억 - 얼마나 지난 거야? 지금 몇 시지?
한나 - 꼬박 하루 지났어요. 지금 밤이고요.
기억 - ...... 그랬구나. 그간 별다른 일은 없었고?
한나 - 네, 저도 계속 병실에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았다는 사실에 난 안심했다.
혹여 =당신이 잠든 사이에=처럼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이미 상황종료 후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하긴... 꼴이 이래선 계속 혼수상태로 있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기억
- 공주는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눈도 깜짝 안하고 안군편만 들다니....
한나
- 일단 좀 쉬어요. 다른 생각 하지 말고요...
어차피 범인들만 잡히면 다 밝혀질 일인 걸요.
기억 - 그래.... 그렇구나.
아직 민아에게 해주고 싶은 말아
200자 원고지로 150장 분량은 남아있었지만,
범인들만 잡히면 다 밝혀질 거라는 한나의 말에
난 더 이상 안군의 일을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두고 보자. 금방 결과가 나올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날이 샌 뒤였다.
실제 움직이는 부분이라고는
오른쪽 팔꿈치 아래 정도 밖에 없었던
난 낮엔 어머니에게,
저녁 땐 민아와 한나의 간병을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
식사부터 세면까지
전부 남의 손에 의존해야 한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불편한 일이었다.
처음엔 얌전히 참고 누워있으면 될 줄 알았지만,
침묵을 불가능하게 하는 최대의 적은 가려움이었다.
뒤척이지도 못하고 고정된 자세로 있으니
등이 베기고 온몸이 근질거렸다.
행여 좀 무리를 해서 움직일라 치면
옆구리에서 왈칵 쏟아지는 핏물이 주변을 경악케 했다.
담당의사는 어차피 고인 게 빠지는 거라
신경 쓸 것 없다고 했지만...
그 양을 볼 때마다 빈혈이 올 것만 같았다.
민아 - 한나야, 그쪽 어깨 좀 받쳐봐. 기억이 등 좀 닦아주게...
한나 - 으이차... 이렇게?
민아 - 응. 기억아, 가려운 데는 없어?
기억 - 아.... 오른쪽 어깨 뒤가 좀 가려워. 붕대도 꼬인 것 같고...
처음엔 한나가 내 간병에 동참하는 데
부담감을 표했던 민아였지만,
하루에도 열댓 번씩 뒤집어 줘야 하는
짐짝이나 다름없는 날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걸 실감한 뒤론
적극적인 협력체제로 돌아섰다.
여러모로 찔릴 구석이 많은 나로선
한순간 한순간이 바늘침대였지만...
사태의 심각성 탓인지, 나름의 반성의 의미인지
한나는 민아가 있건 없건
묵묵히 간병을 도와줄 뿐 어떤 장난도 치지 않았다.
민아 - 잠깐 수건 좀 빨아 올게. 불편한 거 있으면 한나한테 말해줘.
기억 - .....응.
민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와 둘만 남게 된 한나.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는
방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나 - 오빠, 괜찮아요?
기억 - 응? 뭐가?
한나 - 오빠.... 계속 화장실 못가고 있잖아요.
기억 - 아.... 아까 어머니 계실 때 해결했어.
한나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요.
언니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런 거면 지금 도와줄게요.
사실, 아까부터 신호가 오고 있긴 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라도 쉽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라
다른 해결책을 찾고 있었을 뿐...
한나 - 오빠, 오른팔은 움직일 수 있잖아요. 통만 잡아 드리면 되죠?
기억 - ..... 그래줄래?
왠지 서글퍼지면서도, 한나가 고마웠다.
자꾸만 그녀와의 비밀이 늘어가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