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은 서양의 프랑스 기원설과 동양의 인도 기원설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프랑스 기원설은 이러하다. 옛날의 새해는 지금 달력으로 3월 25일이었고 이후 지금의 4월 1일에 해당하는 날까지 춘분제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1564년 샤를 9세가 새로운 역법을 시행해 신년을 4월 1일로 고쳤으나 일반 민중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혹은 기존 세력의 반발로) 기존의 풍습대로 춘분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이 장난스런 축제 분위기로 변하여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다고 알려지고 있다. 덧붙이자면, 4월 바보(April's fool)를 프랑스 말로는 푸아송 다브릴(Poisson d'avril, 4월의 물고기, 고등어)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고등어가 4월에 많이 잡혀 식료품으로 애용되고 있었기에 4월 1일에 속는 사람을 '4월의 물고기'라고 하는 설이 있다.
또 인도 기원설은 다음과 같다. 인도에서는 춘분에 불교의 설법이 행해져 3월 31일에 끝이 나지만, 신자들은 그 수행 기간이 지나면 수행의 보람도 없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3월 31일을 야유절(揶揄節)로 불러 남에게 장난을 치면서 재미있어 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설이 더 있다. 4월이 되면 태양이 물고기자리를 떠나므로 그것이 기원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마크로(maquereau:고등어)라는 말속에는 유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4월은 사람을 속이는 유괴자가 많은 때라 하여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4월 초에 제사장 안나스에게서부터 빌라도에게까지 끌려 다녔던 수난을 기념하여 남을 헛걸음시켰다고 하는 설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몇몇 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풍습이 있었고, 이것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서양의 풍습과 결합하여 부활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통일시대 민족문화재단 학계 발기인이자 충북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배병훈 교수 등 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 청초(淸初, 1766년)에 포송령(蒲松齡)이 쓴 문어체 괴이(怪異) 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의 전래가 우리 민족 만우절의 시초라고 한다.
중국 8대 기서 중 하나인 요재지이는 신선·여우·유령·귀신·도깨비나 이상한 인간 등에 관한 민간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인간과 요괴의 정화(情話)가 대부분이다. 괴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교착한 새로운 세계가 아름답게 전개되어, 현실을 그린 소설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의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며, 중국의 괴이문학 중에서 예술성이 가장 높은 걸작으로 되어 있다. 이에 중국 괴이문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 각국어로도 초역된 바 있다. (우리나라에는 최근 한밭대 김혜경 교수가 10년여의 번역을 거쳐 민음사를 통해 전 6권으로 발간한 바가 있다.)
이 요재지이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탕평책과 실학 등으로 조선문화의 황금기를 일군 정조 말기로 알려져 있다. 요재지이가 1766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면 당시로써는 상당히 빠른 전파라 볼 수 있는데, 이 전파 과정이 우리민족 만우절의 시작이 된다.
1994년에 국역이 마무리된 조선실록 중 정조실록을 살펴보면, 기담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우려한 요재지이의 조선 반입 금지에 대한 몇몇 이야기들이 나와있다. 이 과정에서 요재지이를 조선에 들여오려던 몇몇 중국 유학생들의 투옥이 이어지게 되는데, 이들 중 몇몇은 조정의 뜻과는 달리 지방 관리들의 착오로 죽임까지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한 명이 실록청 총재관(摠裁官)의 장남인 유지가(柳趾家)인데, 그 유망함이 정조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실력 있는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런 유지가가 요재지이 반입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소식을 들은 정조는 아들을 깊이 사랑하였던 유지가의 아버지를 위해 7년이나 그 죽음을 숨기고 일 년에 한 번, 한식(寒食) 직후에 작은 연회를 베풀어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조정 전체로 규모가 커져 관리들 사이에서 명절과 같은 것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유지가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알고 슬픔에 잠겨 때늦은 눈물을 흘렸으나(晩淚), 결국 정조의 배려에 감복하여 이 연회를 베푸는 직을 겸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민족 만우절인 만누(晩淚, 늦을 만 눈물 루)날의 기원이다. 거짓을 통하여서라도 아랫사람을 슬프지 않게 하려고 했던 정조의 세심한 뜻이 담겨있는 풍습이라 할만하다.
만누날은 이후 각 관청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조선 전 지역으로 널리 알려지고 잔치를 치루게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고 하며, 임금과 신하의 미담을 따라 서로의 거짓과 허물을 용서해주는 날로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 시기에 기존 제도를 정비(왕실에 각지의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 폐지 등)와 함께 거의 사라지다시피 할 정도가 되었고,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한민족 말살통치방침(抹殺統治方針)에 따라 금지된 명절이 되었다. 만우절 풍습이 되살아난 것은 미국문화가 들어선 이후라고 볼 수 있으나 이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풍습인 것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채 기존의 것과 유사한 이름만 남아있다는 사실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아직도 만우절을 만누날(晩淚節)이라고 부르며 민족사관의 시각에서 이 전통에 접근하고 있으며, 최근에 들어서야 우리나라 일각에서도 민족 문화를 다루는 단체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문화 연속성의 주장이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