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속에서 키워진 남다른 통찰력
조직을 이끌고 가는 리더는 늘 외로운 법이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고 의지하던 참모의 욕망이나 부정직함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리더 또한 파국을 맞게 되는 경우를 숱하게 경험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데 진흥왕은 너무도 어린 시절인 일곱 살에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와 백제가 서슬 시퍼렇게 신라를 압박하는 와중에 유치원에 갈 나이의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른 셈이다. 다행히 태후가 섭정을 하며 이 어린 왕을 잘 길러냈는데 그녀는 법흥왕비였다. 일찍이 법흥왕이 신라의 틀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녀는 어린 손자가 흔들리지 않고 신라를 똑바로 이끌어나가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그래서 그 시대 가장 지혜로운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던 이사부를 정치적 동지로 삼게 했다. 진흥왕 2년이던 541년 이 소년 왕은 섭정의 지휘 아래 이사부에게 병부령을 맡게 해 국방부 장관으로서 왕권을 보호하고 나라의 안위를 돌보게 했다.
어린 시절, 견제와 고독 속에서 홀로 자립심을 키워냈던 진흥왕은 열한 살이 되던 해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 ‘국사’를 편찬하게 한다. 국사 편찬이란 대내외에 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고 국가의 존엄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소년 왕이 이 건의를 적극 수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미 그는 리더의 자질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고 맡긴 참모와 끝까지 함께해
진흥왕의 리더십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간 신뢰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세운 이사부와 거칠부, 김무력은 진흥왕의 강력한 참모진이 됐는데 서로 결코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이사부란 이름은 우리 역사에 익숙한 인물이다. 서기 512년에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로 있을 때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신라에 귀속시키면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가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멸하겠다고 협박하는 계교를 썼을 만큼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가 울릉도를 공격할 때가 20대 초반이었다 해도 그는 진흥왕에게서 병부령을 제수받은 541년에 이미 50대 초반의 나이가 된 셈이다. 이사부는 왕의 든든한 후원 아래 549년 한강 상류 지역까지 신라의 영역을 넓히는 국력 신장을 도모한다. 그리고 550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두고 공방을 계속하다 지쳐 있는 사이를 뚫고 들어가 두 성을 빼앗았다. 이러한 그의 활약으로 신라가 함경도 남부까지 국경을 넓혀 장차 대망의 통일신라를 이룩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진흥왕은 또한 남부에서는 562년 반란을 일으킨 가야(伽倻)에 이사부를 출정시켜,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소백산맥 남동지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왕이 발굴해낸 또 하나의 인물이 거칠부다. 거칠부는 어려서 승려로 한반도 전역을 유람하다가 고구려에 들어가 혜량법사(惠亮法師)의 강론을 들은 뒤 귀국했는데 이때 고구려의 약점을 모두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그를 곧바로 관직에 진출케 했다. 국사 편찬에 깊숙이 관여한 거칠부는 551년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 10여 군을 빼앗고 혜량법사와 함께 신라로 돌아와 그를 최초의 승통(僧統)이 되게 했다. 진흥왕은 그를 깊이 신뢰해 561년 창녕 지역을, 568년에는 마운령 지역에 진출케 하는 등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무력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아들로, 이사부나 거칠부가 내물왕계의 실력자였음과 견주어 가야계의 비주류 인맥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고구려 승려 혜량을 승통으로 우대해 신라 불교를 통괄케 했으며 우륵 같은 가야계도 우대해 음악을 정비토록 한 것을 보면 진흥왕은 계열이나 출신을 가리지 않고 실력 있는 인재를 뽑아 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무력의 아들 김유신은 후일 삼국통일의 주축이 됐으니 진흥왕의 인재 발굴이 크게 빛을 본 것이었다.
화랑제도 마련, 인재의 기반 넓혀
신라의 화랑은 진흥왕 때 제도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 당시 진흥왕이 25세가 됐을 때(558년) 이미 화랑 사다함에게 가야의 반란을 평정하게 한 사실이 기록돼 있으므로 화랑제도는 그 이전에 정비됐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은 풍월도를 수련케 해 젊은 인재들을 대량 배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그 결과 지혜와 무술이 뛰어난 청년들로 인재 양성을 본격화했다.
이 화랑들을 전면에 내세운 국방정책으로 이들은 신라군의 초급 장교가 돼 리더로 성장했으며 후일 통일전쟁의 역군으로 성장하게 됐다. 이사부 거칠부 김무력 혜량과 같은 뛰어난 인재가 진흥왕의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바로 화랑제도의 본격적인 운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저변이 넓어지면 높이가 올라가는 법. 진흥왕은 인재의 폭과 깊이를 크게 키우기를 원했고 그 방법으로 풍월도를 앞세운 신라 고유의 화랑제도를 운영하게 됐다. 이로써 당시에 가장 소국이며 국력이 약했던 신라를 가장 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게 하는 원동력을 창출해낸 것이다. 진흥왕의 이 같은 인재 양성책은 위기국면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가 인재 양성임을 보여주고 있다. 1500년이 지난 지금의 국가 위기를 진흥왕이 바라본다면 그는 21세기형 한국의 화랑제도 양성을 권고하지 않을까?
참고
진흥왕 순수비는 확대된 영토를 진흥왕이 직접 순수하면서 세운 것으로 현재 창녕 신라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 북한산 순수비(국보 제3호), 마운령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등 네 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