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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에세이] 사진은 "진실"을 말하는가?

표승용 |2009.05.06 21:44
조회 253 |추천 2

안녕하세요 콘탁스 클럽의

 

 세렌디피티 / 표승용 입니다.

 

본 글을 공개하기에 앞서

리뷰에 대한 모든 권한은 mindviewer 님께 있습니다.

저작물에 대한 편집을 일체 금지 합니다.  

 

아울러 귀중한 자료를 공개요청에 수락 해주신 mindviewer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언제나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는 사진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이신 mindviewer 님 께서는 사실에 의거한 기록적 측면과 창조적 측면을 탈피한 또 다른 관점으로 작성 되었음을 미리 공지하는 바입니다. 

개인사진이 리포스팅 될 경우 사생활 침해를 우려하여 동일주제의 제 사진으로 대체 하였습니다.  

사진계에 이미 종사하시는 분, 처음 사진을 접하시는 분, 취미생활로 하시는 분 기타등등..  한 번쯤 읽어 두신다면

앞으로 자신의 사진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짧게나마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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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진실'을 말하는가?


'카메라가 거짓말을 하리?'
그렇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의지가 없는 단순한 기계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근대사진까지는 많은 사진가들이 사진의 '진실성'을 신념으로 삼고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벼가며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다큐멘터리나 저널리즘에서는 '진실성'이 사진의 중요한 척도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사진의 중요한

근간은 '기록성' 임에는 반론의 여지도 없을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진들은 대단히 객관적이고 진실을 재현한 사진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지금껏 세상에 나온 수 많은 사진들 중 실제로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 사진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자.

 

 

 2009 부산항  Copyright(c) 2009 T*Serendipity™ all right reserverd 

 

 

그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던 우리는 현실을 그 대상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대단히 추상적인 관념을 표현하려고 할지라도 결국은 현실에 존재하는 피사체를 바탕으로 표현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사진만이

 가진 사진의 타고난 숙명이요, 특성인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과연 현실의 존재하는 그 무엇을 담았다고 하여 그것이

 그대로 현실일 수 있고 진실이 될 수 있냐는 점이다.  '결정적 순간'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문자 그대로 그의 사진은 '결정적 순간'을 담은 것들이다. 작은 실수 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구성으로 일상의 어떤 사건을

 시각적으로 극대화 시켜 보여주고 있다. 분명 현실을 대상으로 렌즈의 방향을 겨눈것 이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실인가?

 

 

 

프레임의 함정


좋던 싫던간에 사진가는 필연적으로 사각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사각 프레임안의 '현실'을 대상으로 작화 하는것이다. 따라서 프레임의 담긴 현실을 담으면 그것이 현실의 묘사라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류가 아닌가 한다. 사물은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며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유기적인 관계에서 특정 부분만을 선택해 편집하는 것이 바로 프레이밍이다. 이는 피사체가 사진가 개개인의 주관에 따라 편집되고 다르게 읽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두명의 아이가 있다. 한아이는 밝에 웃고 있고 나머지 한명은 서럽게 울고 있다. 두 아이는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있다. A라는 사진가는 울고 있는 아이를 크로즈업했고, B라는 사진가는 웃고 있는 아이를. 그리고 C라는 사진가는 두 아이를 모두 프레임의 넣어 그 대비를 보여주고자 했고 D라는 사진가는 두 아이의 마주잡은 두손을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각자의 사진에 흡족해 했다.'

 


자, 누가 담은것이 '진실'인가?

이러한 이유로 세상에 객관적인 사진이란 없으며 모든 사진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프레이밍을 하는 자체가 이미 주관이 개입된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셔터를 누르는 행동은 개개인 각자가 지닌 의식의 표출이지 혹은 표현이 되는 셈인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주관이 개입된 이상 '진실' 이라고 믿었던 대상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미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것이다. 사진이란 매체가 지극히 기록성에 충실하면서도 객관적인 매체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지금 까지의 글을 읽고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진가가 프레임을 볼 수 없는 노 파인더 샷은 객관적인 진실이 아닌가' 결론 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현실의 무엇인가를 감지해 셔터를 누르고 상이 맺히게 하는 것은 사진가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셔터가 눌러지지 않으면 상도

맺히지 않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2009 노량진,  프레임을 구성하는 자체가 이미 자신의 주관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음을 뜻한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린다면 사람에 시야에 가장 근접한 50mm 렌즈를 가지고

카메라를 사람의 눈이라 생각하고 접근하는 근접성 정도라고 말해둔다.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 반대로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인 사진의 한 예이다.

Copyright(c) 2009 T*Serendipity™ all right reserverd 

 

 

 

아까도 말 했듯이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카메라를 조작하는 것은 사람이다.
바로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straight' 한 사진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진실의 기준

 


절대적인 사실의 재현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도 가정하자. 그 사진은 코끼리를 프레임에 꽉 차게 넣은 '진실'을 재현한 사진이다. 코끼리의 피부가 소름끼칠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 되어있다. 분명히 코끼리는 그 자리에 있었고 그러지 앟았다면 사진도 찍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진은 진실을 재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사진을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코끼리를 대한적이 없는 그 사람은 이 사진만을 보고는 코끼리가 어느 정도 크기인지 알길이 없다. 그래서 그 사진가는 다시 코끼리를 찍어오기로 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 코끼리 옆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제서야 사진을 받아든 사람은 감탄을 하며 외친다. '아! 코끼리는 정말 크구나!'


모든것은 상대적이다. 인간이 정한 어떠한 단위나 규칙은 무엇인가 비교대상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것이다.
절대적인 크기란 것이 없듯이 절대적인 '진실' 또한 존재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당신의 '절대적인' 혹은 '진실한' 크기는 도대체 얼마인가?

 

▲ 2004년 가을. 대구 달성공원. Copyrights ⓒ mindviewer.net
사진은 사물의 크기를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단지 피사체들간의 관계로 유추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2009 서울

Copyright(c) 2009 T*Serendipity™ all right reserverd 

흔한 사진의 예이지만 주제를 부각시키기에 임팩트가 부족하다.

이것은 외국 사진과의 어느정도 문화적 특수성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프레임을 크게 잡고 화각에 맞추어

시선만을 끌어 올 수도 있지만. 외국의 경우와 달리 국내 대다수의 사진은 인물과 배경이 항상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하프 스테디샷이 주가 된다. 그 경계는 아마추어냐 프로냐 두갈래로 갈릴수가 있다.

몰입하느냐  아니면 주변에서 멤돌뿐이냐.

 

물론 본인은 아마추어다.

 

 

 

순수 사진?

사진은'순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과연 '어떠한 사진이 순수한 것이냐.'라고 말이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와서는 필드에서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저장매체에 기록던 데이터가 아무런 조작도 가하지 않는 순수의 결정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 카메라안에 필름을 넣고 셔터를 끊어 필름을 노광 시켰다고 그것을 사진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단지 노광될 필름일 뿐이었다. 같은 필름이라도

현상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사람에따라, 현상된 네거티브를 프린트하는 사람에 따라 그 결과물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따라서

저장매체안의 데이터가 순수한 사진이라 주장은 어패가 있는것이다. 말하자면, 방금 촬영한 '따끈따끈한' 데이터는 말하자면 이제 막 노광된 필름에 비유될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암실이 되어버린 방안의 컴퓨터 앞에서 과거의 현상과 인화가 이루어 지는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후보정' 이란 용어는 적절하지가 않다. 보정이란 모자라는것을 보충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것이다. 결과물을 위한 창조적 행위가 어찌 보정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과거 암실에서 버닝이나 닷징을 이용해 프린트의 톤을 변화시킨 다거나 두장의 네거티브를 겹쳐 '합성'을 하더라도 그것을 후보정이라 부르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고 그냥 '작업'일 따름이었다. 촬영후 작업이란 의미로 촬영과는 구분짓기 위해 '후작업' 정도는 괜찮을듯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후작업의 역량은 과거 암실작업의 역량만큼이나 중요하다. 촬영만 할 줄 아는 사진가는 반쪽자리 사진가이다. 유용한 툴을 이용해 사진의 완성도를 높히는 '작업'을 반칙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가라면 결과물을 자신의 의지대로 컨트롤 해야할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과 동시에 사진가의 큰 임무중 하나가 끝이나고 그것 만큼이나 중요한 또 다른 임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사진은 각각의 사진가가 자신의 의도에 부합되게 작업을 진행한 차이가 있을뿐이지. 누가 더 순수하고 그렇지 않는냐의 논쟁은 진부한 이야기 거리가 아닌가 한다. 그 어떤것도 '순수' 와는 어떠한 연관이 없다.


사진가는 결국 사진으로 말해야 한다.


순수하거나 혹은 거짓이거나 다른 무엇으로 이름 붙여 지던간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을 계속 해나갈 뿐이다.


 

Copyrights ⓒ mindview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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