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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 김기덕 反 II 심영섭이 말하는 김기덕

최다함 |2009.05.17 05:03
조회 288 |추천 0

여성을 재예속화하는 4중의 시선

 

“실레가 사람을 알 수 없는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뒤틀리고 고립된 존재로 보았다면 그것은 그가 대상 인물에 잠재한 정신적인 갈등을 느꼈기 때문만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자기 인식이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의 모든 초상화는 화가의 내면의 풍경과 흡사하며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키는 거울이다. 초상화는 실레가 비틀린 바깥세상과 인연을 맺는 자신만의 방식인 것이다.”(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중에서)
1910년 에곤 실레가 그린 가장 흥미로운 자화상은 이었다. 이 그림을 제외한 많은 실레의 자화상은 흔히 두 가지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퀭한 눈으로 스스로 성기를 드러내어 자위를 하는 그림이나 고통으로 울부짖으면서도 그것을 영광스러워하는 자신을 순교자로 묘사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 자화상만은 예외적이었는데, 실레는 자화상을 제작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인 거울,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누드모델과 함께 등장한다.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실레가 그렇하듯 모델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가는 몸매와 작지만 단단한 가슴을 가진 여자는 흘러내린 스타킹과 엉덩이에 걸치고 있는 손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녀의 음모에 시선이 가도록 배치된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것은 실레의 시선이다. 그는 자신의 모델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모델을 그린다기보다 이 그림을 볼 관객을 쏘아보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그의 최후의 작품 중 하나인 을 제외한 실레의 초상화들은 비록 그가 옆모습의 포즈를 취할 때라도 관객을 쳐다보는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김기덕 감독 스스로가 공인하고 있고, 또한 과 에 연달아 등장하며 은근히 오마주를 바치고 있는 에곤 실레의 그림 중 하나는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놀랄 정도로 의 포스터와 닮아 있다. 의 포스터는 마치 실레의 과 정반대의 각도로 그려진 김기덕 영화세계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신체포기 각서를 쓰고 사창가의 작부가 된 여자는 전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본다. 자신의 얼굴 대신 그의 얼굴이 비추어진 거울을 보며 어쩌면 그녀, 창녀가 된 백설공주는 자신의 포주와 자신이 하나되었음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남자의 시선은 여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나신에 시선이 가도록 전시해놓은 뒤, 정작 그는 짐승의 눈빛으로 관객이라는 먹잇감을 포획하고 있는 것이다.

내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선

에곤 실레의 이야기는 뒤에 더 하기로 하고 이 에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김기덕 감독은 왜 의 장소로 사창가를 택했는가? 김기덕의 많은 여자들이 몸을 팔고 강간당했지만, 김기덕의 영화세상에서 사창가는 늘 은유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의 한강도 의 세상 안쪽인 새장 여인숙이나 물 속의 님프 희진이 사는 섬도 거대한 하나의 정글로 물이 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의 경우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단선적인 인간시장의 비유를 넘어서 개를 사고 파는 이 땅은 자본주의적인 착취와 미군이라는 혼혈의 정체성이 스며든 지정학적으로 사회적인 통찰마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 사창가는 여러모로 직설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곳이다. 그곳은 한기와 선화의 사랑이 꽃피는 동네(?)인 동시에 여자들은 몸을 팔고 남자들은 몸을 사는 장소이다. 그곳은 사창가이다.

일단은 유리문으로 여체를 전시할 수 있는 사창가의 특성을 이용하여 김기덕 감독은 이 장소를 여러 가지 각도의 관음이 가능한 핍쇼의 장소로 용도 변경시킨다. 그곳에서 한기는 선화의 매춘을 일방향의 거울을 통해서 지켜본다. 그때 한기의 모습을 ‘아주 섬뜩한 성화(聖畵)’라고 표현한 한 평자의 글을 읽고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김기덕을 향한 순진한 선의가 놀라울 뿐이다. 그 평자가 이미지 분석에 몰두하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의 이 섬뜩한 성화(性畵)에 나오는 선화라는 여자의 육체는 라는 텍스트 내에서만도 자그마치 삼중의 시선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사창가 장면을 묘사하면서 김기덕은 사창가를 지배하는 세 남자, 한기, 명수, 정태의 컨테이너를 사창가의 위쪽에 위치시킨다. 그들의 눈높이로 내려다보는 사창가는 연옥의 공간처럼 몸을 파는 여자와 사는 남자들로 북적거리는 저잣거리의 장소이다. 그 컨테이너에서 세 남자는 한 여대생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신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우정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저당잡혀서라도 한기를 구출해내려는 정의로운 ‘사내’들이 되어간다.

그리고 한기가 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선화를 위해 추락하듯 다시 사창가의 거리로 내려왔을 때, 그때도 한기와 사내들은 여전히 유리 너머 뒤의 여자들을 바라보는 또다른 인간의 시선을 담지하는 사내들의 시선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창가의 가장 내밀한 장소조차도 일방향의 거울을 장치함으로써 가장 사적인 공간을 확보했다고 믿는 창녀들의 믿음을 배신하고 다시 은밀한 관음자의 위치에서 자본과 육체의 거래장소로 매춘의 현장을 관음한다. 그리하여 의 시선 구조는 다다미 미장센에 버금가는 침대 미장센으로 전시된 여성들의 육체를 ‘내려다보는’ 남성들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시선이 권력이라면 의 사창가야말로 김기덕 감독의 권력의지가 가장 교묘하게 작동하는 곳이리라. 이로써 여성의 육체에 대한 전시와 이를 관음하는 남성의 시선이 가장 교묘하게 작동하는 장소로서의 사창가는 스크린 안에서 인간 구원과 추악함의 현현이라는 방패막이하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사창가가 되어간다. 그것이 바로 에서 재현되는 사창가의 모습이다. 이 재현이 더욱더 위험해지는 것은 김기덕 영화에서 그 사창가의 재현이 실제 사창가와 혼동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관객이라는 네 번째 시선을 몰아간다는 것이다(반대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는 사창가에 얽힌 낭만주의나 야생의 판타지를 걷어내고 사창가를 곧 없어질 퇴폐적 시대의 장소 또 전복적인 성적 해방구로 독해 가능하게 한다. 그는 이를 위해 철처히 15도 내외의 팬숏만을 사용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기가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명수와 정태를 구타하는 장면은 의 부조리한 이데올로기를 다시 한번 반추하게 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매춘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한기의 시선은 아버지의 약값을 위해 창녀들에게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이를 지켜보는 명수와 정태의 시선보다 더 순결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 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카메라의 내려다보는 시선은 영화 안에서도 하나의 계급간의 특권을 형성하며 거의 생래적으로 남성 판타지를 구현하는 주요한 장치가 된다.
억압적인 정체성의 융합

에서 이전의 물의 이미지는 점차 굳어져서 유리의 이미지로 인간들은 세상을 떠돈다. 선화와 한기의 관계는 파열이라는 상징적 장치를 따라 여대생-깡패, 팔린 자-팔아먹은 자의 경계간의 파열을 거듭하면서 결국 둘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한기가 선화를 데리고 사창가를 떠나 길 위를 떠돌 때, 둘간의 정체성의 합일은 결국 선화에 대한 한기의 일방적인 시선과 폭력 모두를 용서해주는 면죄부로 장치되어 있다. 그것은 부터 구사해온 여성의 육체에 관한 가학적 폭력에 대한 김기덕의 오랜 전략이기도 하다. 많은 감독들이 더 강도높은 폭력 묘사를 완충하고자 물타기용으로 웃음을 섞듯이, 김기덕은 고통과 폭력을 섞어놓는다.
그러나 고통과 폭력을 섞어 자해적인 제스처로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것 같은 두 주인공의 정체성의 융합이 과연 양방향적인 포옹이던가? 실제적으로 선화와 한기가 사창가를 떠나 선화가 매춘을 하고 한기가 토사물을 치우는 삶을 영위할 때, 선화는 비로소 자신의 몸을 포기하고 (그녀가 썼던 신체포기 각서처럼) 한기가 속해 있는 세계의 규칙을 완전히 체화하게 된다. 그것은 주류세계에 대한 체념이자 자신의 육체를 자본으로 이용하는 데 익숙해진 한기의 세계로의 선화의 편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화의 이 세계로부터의 탈출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감독은 교묘히 설파한다.

일단 내레티브의 전개 과정에서 선화는 한기에게 인신매매를 당해도 싼 중죄를 지었다. 그녀가 한기에게 가한 모욕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선화는 시종일관 한기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지만 그것은 모욕이 아니라 점차 증오에서 연민의 농밀한 제스처로 바뀌어갈 뿐이다. 그녀가 한기에게 가한 가장 큰 죄는 그의 강제적인 키스에 대해 ‘사과를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사과를 하라. 김기덕의 영화에 등장하는 야생의 주인공들에게 ‘언어를 토해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인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한기에게 그것은 신화적인 공간에서 사회적인 공간으로의 이동을 의미하고 이 사회가 부과한 아버지의 법에 따라 행동하라는 일종의 강요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사과를 강요하는 선화는 언어 이전의 세계에 속한 한기에게 위협적인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에 맞서 한기는 아예 선화를 자신의 사창가인 다이달로스의 미궁 혹은 자궁 속으로 유폐해버린다. 그리고 많은 좌절한 아들들이 그러하듯 선화를 애정과 증오가 미분화된 유아적인 감정을 가지고 대한다. 마침내 주인의 곁을 떠나기를 거부한 새 같은 선화를 떠도는 부초들을 향한 애정과 연민의 아이콘으로 만들어버리면서까지 한기는 선화와의 융합된 정체성에 대한 욕망을 저버릴 수 없다.

그러나 가 보여주는 절절한 고통, 구원을 거부한 늪 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이 마지막 합일이 얼마나 이중적인 것인가는 자신이 스스로 폭로를 한다. 명수 대신 감옥에 간 한기는 명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된다. 남자들간의 충성과 우정으로 한기의 경우 거대한 사회질서인 감옥 자체를 넘나들 수 있지만, 선화에게는 이러한 것과 동질의 우정이나 탈출에 대한 기회는 부여되지도 부여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의 탈출 불가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창녀와 여대생이 매춘이라는 행위로 완벽히 동질적이 되면서 어떤 탈출도 불가능해졌던 의 그것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과 폭력을 경험하고 누군가와의 궁극적인 합일을 꿈꾼다. 그러나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이나 실제로 자아 경계가 흔들리는 나르시스틱 혹은 경계선 성격장애가 있는 환자들이 꿈꾸는 정체성의 합일은 강제적이고 어떤 자율성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지독한 폭력적인 융합을 향해 치닫는 경계 없음이기도 하다.

김기덕은 쉬지 않고 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김기덕의 모든 영화의 종착점에는 똑같은 모양새의 남과 여가 기다리고 있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가라앉는 의 두 주인공이나, 창녀와 여대생이 하나가 되어 손님에게 몸을 파는 , 또한 오토바이에 매달려 가라앉는 여인과 배터리에 묶여 수장되는 남자가 나왔던 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으스러져 경계가 없어진 이 지독한 정체성의 융합은 바로 증오와 폭력이 판치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런 세상에서 주인공들이 도망가고자 하는 어떤 심리적인 원형의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세상에 대한 고통만이 아니라, 이러한 식의 사도마조히즘적인 자아경계의 파괴란 지배와 피지배라는 방식 외에는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유일하게 타인과의 관계맺기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통 대신 자학을 택한 자의 증오

이제 에곤 실레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의 여자 누드들은 에로틱하거나 풍만하지 않다. 그러나 성적이다. 바싹 마른 몸매, 커다란 눈, 순진한 입술, 자위하고 있는 소녀의 자세와 풍경은 실제의 성 관계를 갈망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졌다. 실레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외로움 속에서 타인과 교류하고픈 자신의 절박한 욕망을 심어놓았지만 그 그림 속에서 그녀의 육체에서 자신이 보기 바랐던 그 욕망 이상을 뛰어넘지 못했다(실레는 실제 삶에서 자신의 아내를 선택해야 했을 때, 클림트에게서 넘겨받았으며 오랫동안 동거했던 여성 모델 발리 대신 수수한 중산층 여인 에디트를 선택했다).

그러한 면에서 김기덕 감독은 에곤 실레의 회화의 지향점과 묘하게 일치하는 여성 신체에 대한 나르시스틱한 고착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녀들의 육체를 통해 자신의 외로움의 씨앗들을 뿌리고 그 씨앗속에서 싹튼 연민의 나무를 다시 자신의 시선으로 거두어들인다는 측면에서 그렇하다. (를 계기로 나는 더 이상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세계를 여성 성기에 대한 퇴행이라고 명명하지 않기로 했다. 퇴행은 심리적으로 성숙을 담보로 하여 뒷걸음치는 행위이다. 그러나 김기덕의 경우 그것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고착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 이 대사 안에 녹아있는 한기의 세상에 대한 태도는 소통 대신 자학을 택한 자의 증오이다. 그러나 그 자학뒤에는 선화에 대한 무자비한 키스로 대표되는 여성 신체에 대한 욕망, 무자비한 흡착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는 ‘한 여성의 김기덕 세계로의 강제 편입기’에 지나지 않는다. 종이조차도 흉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김기덕의 관객들에 향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제 편입에 대한 욕망은 그렇게 징하고, 김기덕 그가 자신의 삶을 용서하지 않는 한, 그는 늘 또 그렇게 자신의 강제 편입의 욕망을 연민과 고통의 언덕에 기댈 것이다.

나는 차라리 김기덕의 여자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미끈한 육신이 그의 남자 주인공들처럼 추해지기를 바란다. 또 하나의 야생 동물의 식성을 지닌 여성 작가 천운영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들처럼 곱추의 문신 뜨는 여자거나 소골을 먹는 늙은 할미이거나 월경이 정지된 반편이여야 할 것 같다. 아마도 페데리코 펠리니의 이 와 달리 그토록 여성 학대적이면서도 긴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줄리에타 마시나의 반편스러운 저능과 추함에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주변부 여성’이란 허위진술이다. 나의 이 진술에 의문을 품는 독자들이 있다면 일찍이 존 버거가 추천했던 다음과 실험을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 김기덕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여 주인공 서원의 잘 빠진 누드를 남자의 미끈한 누드로, 조재현이 분한 남자를 짐승 같은 눈빛의 삭발한 여자로 교체시켜 보자. 머릿 속에서 상상하거나 복제 상태 위에서 그려 넣어도 좋다. 그리고 그 변형이 가하는 불쾌함과 낯설음을 맞아 들여 보자. 그것이 바로 김기덕의 영화 속의 여성들의 육체에 가하는 가상의 폭력, 뿐만 아니라 김기덕의 영화가 현실의 여성관객에게 가하는 실제적 폭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net

자료출처http://www.cine21.co.kr/kisa/

sec002100101/2002/01/0201251202320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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