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분대외출때 본 <박쥐> 에 대한 감상평을 적어볼까 합니다. 이 영화는 생활관이나 부대 안에서 보고싶다며 노랠 부르던 영화들 중 하나였고, 또 모처럼의 분대외출에서 본 영화라서 왠지 이곳에 감상을 적어야할 의무감 같은게 느껴져서 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대표 영화감독 중 하나인 박찬욱 감독이 여덞번째 작품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이 영화로 박찬욱 감독은 칸느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현재로서 그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든 세계영화계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요컨대,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야심차게 세계 곳곳의 마니아들에게 자기 영화의 '언어'를 가장 스타일리쉬하게 펼쳐보이는 영화입니다. <올드보이>처럼 처절하고 잔혹한 액션씬이 등장하는 액션영화이기도 하며, 복수3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에서 내재되어왔던 '인간의 파멸'과 '복수'라는 테마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복수극이기도 하며, 또 그전의 대다수 작품들처럼 '죄의식'의 문제를 주되게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더불어 이 영화는 감독 개인의 성장사 속에서 가장 고된 고민의 화두였던 '종교'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며,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멜로'극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박찬욱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다분히 담겨진 풍자극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다양한 주제오 ㅏ소재를 끌어모아 두 시간짜리 영화 한편으로 직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복잡한 영화가 되리라는 짐작은 쉽게 하게 됩니다. 요컨대 '장르' 영화란, 일정하게 정해져있는 짜임새있는 '재미'의 틀이 정해져 있어서 그 틀안에 사건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부여하는 것인데, <박쥐>는 장르영화로서의 서사적 틀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뱀파이어영화'를 표방하지만 어딘가 낯선 느낌이고, 멜로영화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은 낯설게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장르적인 것의 범주를 훨씬 넘어설 정도로 노출씬이 등장하며, 액셔씬도 과격하고, 피는 줄줄 흐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엄밀하게 따져서 '대중영화'적이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영화냐? 라고 물으실 겁니다. 그러나 영화(즉, 스스로 '영화예술'이 되고싶어하는 영화라는 매체)는 칼로 무자르듯 대중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헐리우드 디즈니영화식의 모든 시작과 끝이 상업시장에서의 이윤획득과 승리를 위한 기획성에서 비롯된 영화가 아닌바에야, 모든 영화에는 한 감독 또는 촬영감독, 배우들의 의식/무의식적인 예술적 시도들이 담겨져있는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심형래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영화 <우뢰매3>에도 감독 고유의 의지가 담겨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박쥐>는 대중영화 시장에서 기묘한 방법으로 흥행하려는 상업전략을 갖고 있는 '예술적 야심이 가득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 볼떄, 그 욕심이 너무 과해 다소 실패한 감이 없잖아 있어 보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말하고 싶어하는 감독의 욕심이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예를 들어, 마지막에 송강호가 외국인 여성을 죽이지 않고 마치 죽였다는 듯이 김옥빈을 속이고 넘어간 것. 박찬욱 감독은 결코 그녀를 죽일 수 없었을 겁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그는 완전한 필칠갑의 고어극을 만들 순 없는 인물로, '올바른 것', '윤리적인 것'에 대해 누구보다 고심하는 감독입니다. 일전에 박찬욱은 <찬드라의 XX>(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는 이주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단편영화를 만들었었는데, <박쥐>에 나오는 그 외국인 여성은 '찬드라'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인 영화전문지인 미국의 <버라이어티>지의 수석평론가 데릭 엘지는 <박쥐>가 '뉘앙스라곤 전혀 없는' 영화라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저도 이 평의 일부분에 동의합니다. 감독은 너무 많은 야심으로 영화 안에 중심이 되어 '정서'를 심어내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영화는 분명 비극의 서사를 갖고 있는데, 비극으로 치달아가는 지점들 간의 정서고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패한 것일수도, 아니면 감독의 선택한 것에 따른 응당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분명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정서고양을 위한 극적 장치들을 시나리오 안에 있는 독특한 감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장르영화를 벗어난 감독이라는건 아닙니다. 그보다 박찬욱은 장르영화의 틀을 끌어와서 그것을 전혀 장르적이지 않은 것으로 변주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감독입니다. 박찬욱은 자신이 쓴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다시는 <JSA>같은 웰메이드 영화는 절대 찍지 않겠다"고. 찍는 내내 그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은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관객이 좋아하고, 웰메이드가 되는진 너무 잘 알겠는데, 그건 너무 재미없는 일이며 자신의 예술적 흥미와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아마도 그는 타고난 예술가인 듯 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 미루어졌던 많은 신경증적 숙제들이 이 영화 <박쥐>에 쏟아져있는 듯 합니다. 그건 아마도 '종교'일 것입니다.
박찬욱은 엄격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A대학 교수로 건축분야에서 이름난 분이고, 가족들은 모두 카톨릭 신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고자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때까지 지속된 이 꿈은 그보다 더 큰 영화에 대한 열망 때문에 포기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겪은 종교와 신앙에 대한 갈등과 고뇌는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박쥐>는 '신부가 신부이기를 포기하는 갈등' 이라는 작은 단초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즉, 신앙의 문제가 이 복잡한 영화의 가장 주된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는 예술의 가장 오래된 테마입니다. 삶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고대 예술이 인간의 고뇌를 표현하고 누군가에게 자기 집단의 공통적인 염원을 비는 행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역사상 위대한 영화들에게도 '종교'는 가장 매력적인 주제인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신부는 내내 처절한 갈등을 겪습니다. 욕망과 신앙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데, 눈에 보이는 전염병의 피와 종기들은 그에게 자꾸 신앙을 의심하게 만들며, 전염병처럼 다가간 교회의 영역 밖 세상엔 유혹적인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하균네 유사-가족들은 이런 '바깥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도박, 술, 섹스. 그리고 매력적인 여인 김옥빈까지. 물밀듯이 밀려오는 욕망의 파고 앞에 신부 송강호는 무기력하게 무너집니다. 이것은 관객에게 '그럴듯함'의 인상을 남기는데 그 이유는 애초에 송강호가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 자체가 가져오는 극단성 때문입니다. 이미 그 순간부터 영화와 관객 사이에는 '이 영화에서는 극단성이 허용된다'는 식의 일종의 약속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일에 있어서 엉성함을 느끼는 기준은 이처럼 경우마다 다르게 세워지는데, 이는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약속', '기준점' 같은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디 워>가 엉성한 이유는 장르영화적 약속의 기초조차 몰라 서사가 갈팡질팡하고 가장 심각해져야할때 관객을 어처구니 없게 만들어 웃기는 것 때문인데, <박쥐>는 비교적 그 약속의 끈을 잘 유지합니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서사장치들이 극단적이며 기괴하고, 초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대부분 그럴듯함으로 넘어갑니다. 다만, 이 초현실성은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 피로함을 줄 수 있습니다. 편한 비주얼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감독이 일부러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당황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왜 감독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했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왜 관객은 7000원을 지불하면서 불편한 기분을 느끼려고 하는가, 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시간이 없어서 이만 써야겠습니다. 휴가 다녀와서 마저 쓰든지 말든지 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꼭지점이 되는 마지막에 장면은 정말 말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 붉은 바다, 거대한 태양, 타오르는......
남겨진 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