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를 가자!!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바람의 언덕.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본 그곳은 사진과는 많이 달랐던 터라 내게 잠시나마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었다.
090606. PM 12:45
으악!!!!!!!!!!!!!!!!!!!!
분명 알람은 9시에 맞췄는데 왜 열두 시가 넘었냐구!
6월의 무더운 날, 지나친 채광량을 생각해 오전에 출발해 햇살이 덜 따가울 때에 이쁜 사진을 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난 알람을 9시로 맞추고 잠에 들었었다.
하지만 주중에 쌓였던 피로를 간과한 탓이었을까. 악몽에 시달려 매번 새벽에 깨었던 나날들을 잊었던 나의 불찰이었을까.
무정하게도 핸드폰 액정에 뜬 시각은 12시를 훌쩍 넘겨 있었다.
부랴부랴 씻고 가방을 어깨에 매고 집을 나선다. 든 것은 새로 산 나의 똑딱이와 순간순간을 기록할 다이어리, 그리고 네가 선물했던, 손으로 직접 만든 필통. 지갑. 읽을 책 한 권.
동묘역에서 1호선을 기다리며 생수를 한 통 샀다.
PM 1:00(다이어리)
서울역 앞. 10분 늦는 바람에 서율역 광장 계단에 앉아 책을 읽는다. 쇼펜하우어 인생론 - 생존과 허무.
습도가 높아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지만 그리 불쾌하지만은 않은 날이다. 처음 떠나는 혼자만의 기차여행. 그에 대한 설레임 덕일까?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고요하다. 두근거리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저 서울역을 메운 군중 속에서 고요함을 느낄 뿐이다.
두 귀를 가득 메운 MP3 노래소리, 조금은 뜨거운 바람. 지나가는 사람들은 붕어 마냥 그저 입술만 벙긋댈 뿐이다. 마치, 밀랍인형 같다.
그들이? 아니면 내가?
담뱃불을 붙이는데 노숙자 아저씨가 다가와 손을 내민다. 한 주 내내 주머니를 가득 메우고 있던 동전 한 움큼을 쥐어준다.
부디 다시 서울역이란 글자를 마주할 때엔 그 동전들의 부피만큼, 그 보잘 것 없는 무게만큼이라도 가슴 속에 얹어둔 무언가가 덜어져 있기를 바라며, 열차시간을 기다린다.
PM 2:40(다이어리)
10분 일찍 열차에 올랐다. 통근열차의 내부는 마치 지하철처럼 옆으로, 한 일자(一)로 배치된 좌석이 색달랐다.
물론 순방향으로 배치된 좌석이 중간에 있었고, 그 뒤엔 노약자석이 또 옆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마치 예전의 통일호 마냥 옆으로 긴 좌석이 나로 하여금, 마침내 서울을 벗어난다-는 느낌을 주었다.
두근, 두근. 조금은 심장이 뛰는 것도 같다.
PM 3:30(다이어리)
아무리 통근열차라지만 너무 느린 거 아닌가..ㅠㅠ
답답한 마음이 없지 않다. 건널목을 의식해 정차하려는 것마냥 속도를 늦추고, 늦추고, 늦추고. 도심을 벗어나는 데에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가 없다.
도중에 승차한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하고 출입구 계단에 앉았다.
계속 도심이다. 볼거리가 없다. 콘크리트 일색..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개성 없는 건물들이 조금씩 약동하던 심장을 옭아맨다.. 조금 지겹다.
PM 3:50(다이어리)
지루하기만 하던 열차 안. 애기 하나가 난리다.
쪼그만 것이 저도 사내랍시고 작은 누나,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누나,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큰 누나 안 가리고 눈만 마주치면 엄마 다리 사이로 숨는다.
그러기를 얼마. 작은 누나가 귀여운지 살짝살짝 건드린다. 그럴 때마다 꺄르르 하며 난리다. 부끄럼이 많은지 매번 숨기는 하지만.
아, 장가 가고 싶다..
마침내 경의선의 현 종점, 임진강 역에 내렸다. 다이어리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다. 아마도 이 시점부터 나는 늘어나는 커플들을 보며 조금 마음이 아팠던 것도 같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내 짧았던 오후의 시작점, 파주시종합관광안내도.
역전에 서있던 관광안내도를 지나 걷다가 마주친 낚시터. 다리 위에서 촬영했다.
의외였다. 사실 임진강역이지만 '강'이라는 느낌을 받을 만한 곳은 이곳이 유일했다.
임진각. 임진강변에 세운 누각 쯤 되려나. 낚시터가 내려다보이는 다리를 지나자마자 마주한 이정표.
임진각.
어릴 적 그렇게도 많이 들었던 철마, 그 주인공을 26살이 되어서야 처음 마주했다.
철마. 올라보는 것도 허용되는 모양인지 아이들을 기관실에 태워 놓고 사진을 찍는 부모들이 제법 보였다. 덕분에 사진 찍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여전히 유보수에 신경을 쓰는 모양인지 조금은 투박해질 만도 하건만 매끈한 동체는 당장이라도 달릴 듯 번쩍였다. 인상 깊었다.
철마 맞은편에 세워진 철도중단점. 한자가 가득하다. 물론 어렵사리 읽어내려갔다-_-;;
왜인지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자리를 떴다.
파파이스 입간판. 황당했다. 철도중단점비를 지나자마자 마주한 녀석.
아마도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파파이스 분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사진에 담았다.
늘 그렇지만, 자본주의란 참 놀라울 뿐이다.
현충일이라 그런지 평화의 종 부근에 행사를 가지고 있었다. 행운일지, 아니면 불운일지.
나름 뜻깊은 행사라 생각해 한걸음 물러나 사진을 찍고, 타종식을 지켜봤다. 진중한 종소리가 철마를 보며 무거워졌던 마음을 더욱 짓눌렀다.
타종식을 마친 일단의 무리가 자리를 옮기고, 평화의 종을 정면에서 찍으려 자리를 옮기다 발견한 안내문.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조차 상술로 이용해 먹는 듯해 기분이 나빴다.
야이 개 호로 !@#$%^&*().....................!!!!!!!!!!!!!!!!1
평화의 종각. 서울시 한복판의 종각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망향의 노래비. 동상 혹은 조각? 미술에 조예가 없는 나로선 무어라 지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러한 조형물 아래에 비석이 있다. 노래가사를 새겨 놓았다.
오지게 더운 날씨, 비석이 제법 컸던 탓에 주변에 돗자리를 펼치고 휴식을 취하고 계신 어르신들이 제법 많았다. 덕분에 사진 찍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가사만 비석에 새겨놓은 것이 아니라, 설운도 씨가 부른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도록 모종의 시설물을 설치해 놓기까지 했다.
사진 찍기 직전 어떤 아저씨께서 버튼을 누르셔서 앞부분을 조금 들을 수 있었다. 구슬프단 느낌이 강했다.
..근데 아저씨, 듣고 가셔야지, 버튼만 누르고 가시면 어떡하나요.
No Beer, No Life!!!!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가슴을 뒤흔드는' 격언 중 하나다.
그런 나로선 제법 반가운 풍경이었고, 동시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던 '북한술'들이다.
속세의 때가 어찌나 묻었는지, '과연 저게 정말 북한 술일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드는 나에게 화를 낼 뻔했다.
물론, 궁벽한 나로선 단 한 병조차 살 수 없었다.
평화를 기원하는 희망의 사진벽..이었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 속에선 축문(?)들만 보이지만, 영감님께서 서계신 쪽으로 이동하면 액자 몇 개가 있었다.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계신 영감님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괜히 내가 죄송했다.
희망, 나의 조국, 두 시를 새겨놓은 바위.
망향의 노래비를 지나 자유의 다리로 향하는 길 가에 서 있었다. 대충 훑고 지났다.
매정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향의 아픔을 곱씹는 어르신에게서 영문 모를 죄책감을 느낄지언정 한낱 돌덩이에게서 갑작스런 애국심을 느낄 정도의 파시즘은 내겐 없다.
..이게 이영애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대편엔 이병헌을 본딴 헌병 캐릭터가 서 있었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조악하기 짝이 없는 조형물들.. 우리나라의 관광상품 수준은 아직도 멀었구나 싶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전의 타종행사를 진행했던 단체를 여기서 또 마주했다. 좁은 가교를 가득 메운 인파. 징그러웠다. 햇살도 너무 뜨거웠고. 조금은 짜증이 났다.
자유의 다리 한복판에서 찍은 사진. 아래엔 사진의 분수와 작은 연못, 그리고 그 주변을 따라 펼쳐진 아주 짧은 산책로가 있었다.
별로 내려가고픈 마음이 들지는 않는, 그저 그런 산책로로 보였다.
자유의 다리 끝.
사람이 정말 많았다. 현충일.. 쒧.
괜히 독일이 떠올랐다. 서독과 동독을 갈랐던 장벽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왜 이들의 손엔 거대한 햄머가 들려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통일은.. 대체 언제?
자유의 다리 끝에서 찍은 사진.
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 그나마 줄어든 인파를 느끼며 서둘러 찍은 사진.
정말이지 미학적으로는 볼 것이 전혀 없는 다리.
다만, 국군 포로들이 걸었던 다리라는 점을 알고 나면 감회가 새롭다.
각군 위령비. 위의 사진은 참전미군들을 위로하는 비이고, 아래의 것은 미군 공수부대를 위로하는 비이다.
우방국 주제에 하는 짓이 꼴같잖긴 하지만, 나라라는 개념을 떠나 머나먼 이국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스러져간 타국의 아들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표했다.
나라와 나라로서 마주했을 땐 욕지기가 일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정말로 많이 감사하고 있다고 짧게 묵념하고, 돌아섰다.
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지 않는 조형물.
아래부분은 N자로 무언가 상징하는 것이 있었고, 상단부의 인물들은 통일을 염원하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쒧~!
왠지 하늘을 달리다, 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이적 씨, 잘 지내죠?
(본 적도 없으면서 괜히 친한 척하기)
어, 음. 바람의 언덕은 아닌데, 정확한 명칭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튼 잔디가 펼쳐져 있고, 산책로가 죽 이어지고, 야외공연장을 향한 길도 있었고..
첫번째 사진은 사실 사람이 없길 바랬지만, 듫끓는 인파 속에서 무리한 욕심임을 깨닫고는 그냥 찍었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이 중심에 찍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던 사진. 원본은 좀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색보정을 거치고 나니 조금은 화사한 느낌이 든다.
아래는 본격적인 진입로. 사실 직접 보면 잔디만 그득하고 기타 조형물은 드문드문한 것이 황량하단 느낌이 더 강했다. 심지어 초라하기까지.
하지만, 렌즈는 내가 보는 것보다는 더 아름답게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것 같았다. 찰칵.
타박, 타박. 하늘까지 닿았으면 싶은 계단.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사진..^^
보고 있자면, 어디라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완만한 계단이 좋았다. 너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오를 수 있도록 배려한 느낌이 드는 계단.
콘크리트 일색이 아니어서 더더욱 좋았다.
짧은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난 후, 내 앞에 펼쳐진 산책로.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굉장히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행복해.
산책로 사진을 찍은 직후, 워낙 더웠던 탓에 땀을 식히기 위해 잠시 앉았다가 찍은 내 다리.
제멋대로 찢어진 청바지, 자줏빛 운동화. 맘에 든다.
비슷한 사진이 한 장 더 있는데, 이게 더 맘에 들어서 요거만 올린다.
산책로 곳곳에 서 있는 조형물과, 한없이 늘어진 연.
내가 본 하늘은 저만큼 이쁘지 않았지만, 똑딱이 녀석은 약간의 보정만으로도 이만큼이나 예쁜 하늘을 기억한다.
부럽네.
한국판 모아이? 모아이라기엔 앞쪽의 녀석들이 워낙 머리가 작고 말이지.
마치 생로병사를 표현한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마치 판문점 쪽을 바라보고 선 듯하여 왠지 모르게 짠했다.
카페. 정말이지 사람들이 득실득실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아직은 인파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것 같다. 차차 나아지겠지.
얕디 얕은 못 주변을 따라 이어진 짧은 제방. 제방이라기엔 못이 너무 얕고.. 뭐라 불러야 좋을까.
맨 위에 올려놓은 사진의 원본이다. 사실 맨위쪽은 밝기를 좀 조절한 사진.
오후 5시의 느낌이 확 와닿는 것 같다. 나를 임진강으로 이끌었던 바로 그 장소이건만 눈으로 바라본 그곳은 정말이지 황량하다- 황량해 라는 생각만 들었다.
포스팅을 보고 감탄했던 사진이 있었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허탈함도 컸던 바람의 언덕.
그나마 내 사진에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 묘한 곳이란 생각만 든다.
물끄러미, 하염없이. 그리고 덩그러니.
PM 5:40(다이어리)
여행이라기보단 피크닉? 뭐, 싸들고 온 거라곤 동묘역에서 환승하는 길에 샀던 생수 한 통 뿐이라 피크닉이라기도 그렇고, 차라리 조금 멀리 나온 산책 같은 느낌이다.
더 머물기엔 해도 저물어 가고, 그럼에도 여전히 너.무. 더워 막차를 타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5:55분 통근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의 키워드는 군중 속 고독, 더위, 똑딱이 정도일까.
생각보다 홀로 이곳을 찾은 사람이 없었다. 현충일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로 찾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들도 눈에 띄었다.
덕분에 호젓이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싶었던 내 바람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바람의 언덕에서 바람개비와 입간판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10분이 넘도록 버텼다면 말 다했지 않을까.
조금만 '경치가 괜찮은걸?', '사진 나오겠네' 싶은 곳엔 이미 인산인해였다. 어딜 가나.
사진으로 보던 것보단 작았고, 그때의 탄성이 나오게 할만한 풍경들은 '전무했다'.
4월과 6월의 채광이 이리도 다를 줄이야. 잔디 깔린 언덕에 아쉬움만 한가득 쌓아놓고 돌아섰다.
생각지도 못했던 연을 본 것은 정말이지 아직도 충격적이다. 또, 의외로 연을 날리는 사람도 많았다. 바람의 언덕이란 이름답게, 정말이지 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이마에 샘솟은 땀을 씻어주진 못했지만. 외려 곱게 단장하고 나섰던 머리를 마구 헝클어놨다.
그래도,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10여 년만에 보는 연은 굉장히 반가웠고 - 비록 어느 아주머니께서 날리던 연의 줄이 내 목을 강타하긴 했어도 - 등줄기를 타고 흘렀던 땀의 감촉은 어쩐 영문인지 상쾌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내 주제에 더위를 즐길 능력이 있는 건 역시 아니지만, 땀이 솟자마자 쓸어가려 용쓰는 언덕에서의 바람은 지나치게 강렬한 햇살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았던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십수 장의 사진 속에 나는 없지만, 기억 속엔 내 모습이 선명하다.
홀로 똑딱이를 들고 여기저기 터벅대며 찍고, 또 찍고 - 땀을 식히며 밴치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며 조금의 아쉬움을 연기에 실어 날리던 모습, 연인들 가득한 언덕에서 괜스레 튀어나오는, 불쾌하지는 않은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감추지 못했던 모습들까지.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PM 7:21
개찰구를 지나자마자 똑딱이를 다시 꺼내 찍었다. 고작 6시간 남짓한 여정이었지만, 사진을 찍던 순간엔 어째서인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발이 땡땡 부은 것이 느껴질 정도로 피곤했다, 갑자기.
똑딱이 덕분에, 많은 걸 남길 수 있었던 하루.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