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옛날에는 법과 윤리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강제로 간음하거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아무런 제재없었다. 당연히 그런 사회가 지속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법과 윤리를 만들어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과 지켜야 할 도리를 제정하였다. 이후로부터 인간들이 느끼는 대부분의 스트레스는 사회 구성원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윤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무방비한 자유는 사라지고 절제된 자유만이 허용되었고, 인간들 스스로가 사회라는 이름 하에 서로를 통제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끊임없이 발생하는 범죄들은 인간들이 법과 윤리라는 만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려 저지르는 이미 예견된 일이라 생각한다.
매일 신문을 보면 어김없이 간밤에 누군가가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계획된 타살이든 자살이든 우발적이든 매일 보는 신문마다 이 나라의 일부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이 세상에 살지 않는다. 근래에도 초등학생 A군이 안타깝게 죽었다. 피의자의 범행동기도 우습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운전면허 기회박탈과 생계에 대한 집착으로 A군을 살해했다. 더구나 A군은 피의자에게 "살려달라" 고 애원까지 했으나 피의자는 범행동기를 지키기 위해 A군을 향하여 공기총을 쐈다. 이쯤되면 욕한번 나와야 정상이겠지만, 이젠 이런 기사가 놀랍지도 않다. 내가 매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살인사건 기사들이 익숙해서 그렇다.
사회 구성원들은 흉악 범죄에 불안해하지만 불안 속에서도 익숙함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마치 냄새와 같은 거다. 밀폐된 공간에서 방귀를 뀌면 잠깐 동안은 냄새가 나지만, 어느새 내 코는 그 냄새에 적응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누군가 심하게 방귀를 뀌지 않는 이상 방귀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불안감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번 초등학생 살인 사건 기사를 본 어느 사이트 댓글을 보니 "이런 놈은 그냥 죽이지 말고 사지를 절단해야 한다!" 같은 과격한 댓글이 달려 있던데, 진짜 살인이나 성폭행 같은 흉악 범죄자들은 잡히는 즉시 모조리 사형대로 보내버려야 할까?
나는 오늘 예전에 봤던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며 사형제도 존폐에 대해 나의 의견을 말해보려한다.
살인자.. 살인자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을 죽인 자? 그렇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살인은 그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손에 흉기를 들고 누군가를 죽인다고해서 살인자라고 말할 수 없다. 추상적이긴 하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흉기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매일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나의 삶만 봐도 하루에 몇 번은 살인을 저지른다. 어쩔 때는 그 살인에 자랑스러워하거나 무감각할 때가 있다. 물론 행위와 관념의 차이는 다르지만, 동기는 "저 사람을 죽이고 싶다" 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만 어떤 사람은 생각에 머물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실천되어진 것의 차이이다.
책을 보니 11살짜리가 천원을 빼앗으려고 4살짜리를 죽인 상황이 있다. 처벌을 하려 하니 우리나라는 14세 이하에게는 처벌 대상에 적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방치하거나 소년원으로 보내진다고 한다. 조금 웃기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합법적으로 살인자를 양성하는 나라인가? 단지 나이가 어리다고, 아니면 어려서 잘 모르기 때문에 법을 피해갈 수 있다면, 과장해서 우리나라는 어린시절부터 훌륭한 킬러가 될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나이가 어리든 많든 순간의 목적을 위해 살인하는 사람들.. 만약 그 사람들이 내 친족이거나 절친한 친구이라면 냉정해질 수 있을까? 그의 눈을 보며 ‘이 살인자!’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 수야 있겠지만 일단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동정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고 그들의 어쩔 수 없는 변명을 듣다보면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살인자인가? 살인자로 만드는 사람이 살인자인가? 아니면 실제 살인한 자가 살인자인가? 우리는 모두 공범인 것이다.
공지영은 연이어 우행시에서 재미있는 상황을 설정한다. 세 번 자살을 시도한 여자(유정)와 세 명을 살해한 살인자(윤수)의 대화에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신을 몰라요. 기사가 당신을 말해준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신문 기사에는 사실은 있는데 사실을 만들어낸 사실은 없어요. 사실을 만들어낸 게 진짜 사실인데 사람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실은 행위 전에 이미 행위의 의미가 생겨난 것인데. 내가 어떤 사람을 죽이려고 칼로 찔렀는데 하필이면 그의 목을 감고 있던 밧줄을 잘라서 그가 살아나온 경우와 내가 어떤 사람의 목을 감고 있는 밧줄을 자르려고 했는데 그 사람의 목을 찔러버리는 거...... 이건 너무나도 다른데, 앞의 사람은 상장을 받고 뒤의 사람은 처형을 당하겠죠. 세상은 행위만을 판단하니까요. 생각은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도 없고 들여다볼 수도 없는 거니까, 죄와 벌이라는 게 과연 그렇게나 타당한 것일까. 행위는 사실일 뿐, 진실은 늘 그 행위 이전에 들어 있는 거라는 거, 그래서 우리가 혹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거...... 당신 때문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생각해보았는데 누가 지금 나에 대해 기사를 쓴다면 나는 당신 보다 형편없을 수도 있어요. 문유정이라는 여자는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도 또 자살을 기도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끝, 인 거예요......” <204p~205p>
신문기사에는 사실은 있는데 사실을 만들어낸 사실은 없고, 세상은 행위만을 판단한다는 유정의 말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즉 "우리의 눈은 몸 전체를 보지 않고 꼬리만 보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고 공지영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는 사실일뿐, 진실은 늘 그 행위 이전에 들어 있고 혹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이다. 살인자를 욕하던 사람들에게는 기가 찰 말이지만, 공지영의 말도 일리가 있다. 행위 이전에 인간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다.
조금 구체적인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사형제 폐지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해도 국회를 통과해야 될 일이고...... 국회위원들 진보적이라는 소리 들으려고, 인기 좀 얻으려고 솔깃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좀 그렇습니다. 수녀님. 그러면 우선 교도소 예산 문제가 생겨요. 사형수 일인당 일계호인데, 그럼 교도관들 더 늘려야 해요. 그 비용을 누가 다 감당합니까? 그리고 이건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 사건의 피해자들, 결국 자기네 세금 내서 자기네 가족 죽은 놈들 먹여 살리란 말밖에 더 됩니까?”
“그래요. 피해자들 생각하면 참...... 언제나 문제가 난감해지니까요.”
고모가 말하는 데 내가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면 돈 때문에 그 사람들을 죽여야 된단 말인가요?”
그는 돈이 아니라, 비용이에요, 하는 낯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나를 그냥, 외면하고 말았다. <252p~253p>
글만 읽어도 그녀가 사형제 존폐에 어느 편에 서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그녀의 의견이 완전히 옳다고 볼 수 없지만, 사람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법이 존재하고 있는 한, 이 논란의 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사형에 해당 되는 죄를 지으면 꼭 사형으로 처벌해야 죄가 해소되는 것일까? 사형제도가 진정 범죄 예방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왔지만 사회는 변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 이라는 카뮈의 말이 맞다.
나는 사람이 생명을 창조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다면 사형제도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죽일 놈, 없어져야 할 놈.. 등 같은 하늘아래 살기가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명마저 빼앗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나도 참 공지영 같이 기가 찰만한 말만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형제 폐지에 찬성한다.
살인자를 만든 것이 사회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공범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필요악적인 치부가 있다면 책임도 사회가 져야 되지 않을까? 어차피 그들도 사회구성원이라면 교화시켜 다시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내보내야 한다. 공지영도 사형제도 폐지에 대해 정략적이나 홍보가 아닌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말처럼 사람의 생명을 물질이나 수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궁극적으로 교도소는 사회적 죄인들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장소가 아니라 교화와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수행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책에서도 나온 예수의 비유 ‘돌아온 탕자’ 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 같다.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아버지 재산의 반을 가지고 독립했다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타락된 생활을 하고 재산을 탕진하여 결국 사회 밑바닥까지 떨어져 다시 아버지께 돌아와 용서함을 받는 그 탕자. 다른 이야기로 성서에서 예수는 부정한 창녀를 유대인의 율법대로 모두가 돌로 쳐 죽이려 할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첫 이야기는 개인으로서 우리의 모습이고, 뒷 이야기는 사회에 속해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두 이야기를 나름 이해한다면,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우리 모두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의 공범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죄인을 탓할 수 없다. 다만,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형벌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대화이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과분한 말이지만, 세 번만 생각하자는 거다. 나도 소중하고 그대도 소중한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또한 서로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인의 옷을 벗는 순간, 우리는 가장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의견이고, 반대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한 사람의 의견으로써 이해해주길 바란다.
謹弔 - 어린 나이에 숨진 이름 모를 A군에게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