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역사바로알기 (2)- 과연 누가 진정한 친일파인가?

김민정 |2009.06.17 22:16
조회 908 |추천 2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 대통령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이단체는 박 대통령을 그들의 역사적 상상과 가정에 따라 신친일파로 분류했습니다. ~내용:이단체는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단체의 상상과 가정에 의한 설정에도 간도특설대이니 독립군 토벌과 같은 언급은 없음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 대통령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실체 (노무현정부 예산에서 8억원 지원)

소위 민족문제연구소란 것은 일찍이 대한민국을 파괴 전복하기 위해 월남 베트콩식 무장폭력투쟁을 목적으로 남민전이란 赤色 무장폭력단체를 결성하여 암약하다가 덜미가 잡혀 국가변란음모의 중죄인으로 10년 형을 받고 위장 전향을 한 임헌영이 고 임종국씨의 연구업적을 도적질하기 위해 만든 사설연구기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위원장 임헌영(任軒永)은 민청학련 배후조종자로 수배중이던 주범 이재문과 반국가단체인 남민전을 결성하여 투쟁자금 마련을 위해 수차례의 강도행각을 벌이는 등 악질적 활동뿐만 아니라 무장폭동을 목적으로 사제폭탄과 총기류 등 1300여점과 인공기와 베트콩 깃발을 합성하여 남민전 깃발까지 준비 한바 있는 반역적 지하조직 주동자이다.

 임헌영 등은 북괴 김일성에게 “남조선 혁명가들은 수령님의 혁명이론과 투쟁방법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있다”는 요지의 서신과 사업보고서를 보낼 정도의 골수 빨갱이 집단이었으며 남민전 사건 당시의 주역들이 지하로 잠입하여 학문과 역사연구라는 위장 술책으로 대한민국 파괴 전복활동을 계속해온 비밀근거지가 민족문제 연구소이다.

 소위 민족문제 연구소는 위 국가변란음모 전과자 임헌영을 중심으로 김희선 김원웅 이창복 이해학 등 일부 문제 의원과 골수 빨갱이들이 이사로 위장하여 ‘역사문제’로 역사를 뒤엎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대한민국 건국사와 근대화 업적을 친일로 매도하여 전범원흉 김일성에게 역사적 정통성을 헌납하려는 적색 음모집단이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의 사주를 받아 국회 내에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을 만들어 친일과거사진상규명법 제정을 주도해온 김희선은 널리 알려진 대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조상을 자기 할아버지라고 내세우고 만주국 경찰 악질특무 애비를 독립운동가로 둔갑시켜 환부역조 하는 패륜적 기만수법으로 국회의원직을 도적질한 희대의 악녀이다.

 빨갱이 소굴인 전국연합과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암약하던 김희선은 남편 방국진과 함께 사월혁명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깊이 간여하여 대한민국 파괴공작에 앞장선 김정일의 하수인으로 국회에 진출하여 원내 교두보를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합법을 가장한 ‘反 歷史’ 악법인 ‘과거사법’을 통과시켜 역사의 이름을 빌어 역사를 죽이려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다.

 친북 사설단체에 불과 한 민족문연구소가 발표한 3090명의 ‘친일인사 명단’은 김정일의 눈으로 본 친일인사요 노무현의 뜻에 따라 만들어 낸 Black List에 불과 하다. 특히 박정희와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중앙일보 전 사주 홍진기 이대총장 김활란을 대표적인 친일인사로 내 세운 것은 정치적 음모를 노골적으로 들어 낸 증좌이다.

 이는 친일인사 명단 발표를 통해서 타도해야 할 敵을 명백히 한 전형적인 빨갱이 수법이며 김일성과 대결에서 승리한 박정희와 조선 동아 중앙 등 Big 3 우익신문, 그리고 무혈접수를 획책하고 있는 사학재단을 표적으로 한 악질적인 선동수법이며 이미 친일행각이 널리 알려진 김희선 신기남 이미경 유시민 등 열린당 의원의 애비들을 누락시킨 쓰레기 문서이다.

 1.민족문제연구소는 남민전 국가변란 전과자 출신 친북 쓰레기들이 역사의 이름을 빌어 역사를 파괴하려는 친북반역 음모의 소굴이다.

 2.임헌영 김희선 김원웅 이창복 이해학 등 빨갱이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 역사와 근대화 업적을 뒤 엎으려고 짜깁기 한 과거사법은 입법동기의 불순성에 비추어 원천 무효이다.

 3. 악질적 친일 행각이 입증 된 김희선 신기남 이미경 유시민 등 저희들 편의 선대 명단을 고의로 탈락시킨 친일인사명단은 악의적 허위날조 문서이므로 즉각 폐기하라.

 4. 6.25남침 전범수괴 김일성에게 민족사의 정통성을 꿰다 맞추려는 반민족적 음모의 소굴 민족문제 연구소를 박살내자.

 5. 노무현과 열린당은 정략적인 ‘과거사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고 비열한 역사파괴 음모를 국민 앞에 사죄하는 의미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즉각 폐쇄하고 관계자를 엄단하라.

 6. 노무현과 그 하수인들이 대한민국 정통수호 애국세력의 정당한 요구와 진정어린 충고를 무시한다면 분노한 민심과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참담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임을 경고한다.

 2005년 8월 31일

 나라사랑어머니연합 (http//cafe.daum.net/nasayun)-]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요?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본다면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의 지역감정 유래--

60년대 호남사람들이 선거때 박정희대통령한테 50프로 이상 표를 준 사실을 아십니까?

 

(김정렴  비서실장의 말 )

과거부터 유력정치인중 하나가(김대중) 호남을  차별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지역감정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되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발 정책면에서 얘기를 해 보죠.

 우리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해서 100년 이상 뒤떨어져 있고, 미국, 영국에 대해서는 20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데다 자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공업화하느냐, 이것이 초미의  과제였습니다.

 그럴려면 가장 입지가 좋은 데다 공장을 세워야 되거든요.  우리 한반도를 보면 제일 좋은 곳이 동해안이고 남해안입니다.  단애가 져 가지고 바다가 급히 깊어져요.  그리고 남해에는 섬이 많고, 섬이 있으니 방파제의 필요가 훨씬 덜하고 준설도 많이 할 필요 없이 항구가 되죠.  더욱이 거긴 일제 때부터 도로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해안의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은 수심이 앝으니까  여기 10만 톤, 25만 톤 급 항구를 만들려면 이만저만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도 장항까지 가는 것과 호남선 이외에는 안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해안 따라서 도로가 없고 제한된 돈으로 일은 빨리 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남해안하고 동해안에 개발의 중점을 둔 겁니다.


당시 국토 개발 계획이 있었죠.  건설부 산하의 국토연구원이 있어서 주원 건설부장관이 국토 계획의 전문가였는데 지금 말씀대로 강원도는 관광자원, 수산자원 정도지 여기다 공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하는 식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경제권을 몇 개로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하고 난류가 대한 해협에서 교체가 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부산 울산 포항 쪽입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거기다 지어서 오폐수를 쉽게 내보내고 특히 공해 많은 온산 공단에 들어간 유해 공장의 폐기물도 해류가 거기서 되돌아오니 거기에 넣어도 되었던 거죠.  하지만 서해 바다는 기껏해야 간만의 차이뿐이고  옆으로 크게 흐르지 않아요.  경기도,  전북, 전남 해안에 섣불리 공장을 지었다가는 해수가 들락날락만 하지 옆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조개고 뭐고 다 오염이 됩니다.  그 때 돈만 있었으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이 있었으면 더 급한 데 썻겠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우선 순위의 결정과 요충식 경제 개발의 불가피성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이다’ 하며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었는데  왜 안 하려고 그러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유세 때 전주 광주 가셔서 ‘공업화 안 돼서 당신들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다른 데서 공해로 시달릴 때  당신네들은 더 깨끗한 공장 지어 가지고 나중에 더 잘산다’ 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경제 개발 정책상 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무척 애쓰신 것이 종합 제철을 광양에 갖다 지으신 것과 여천 석유화학 단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

김정렴 정치회고록 발췌

 

-5.16은 쿠데타가 아닌 진정한 혁명이다-

 

박정희는 원래 만주군관 학교 출신이고요. 거기서 수석 졸업을 해서 일본 육사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도 박정희를 두고, 일본인을 이긴 조선인이라 하여 조선의 자랑으로 여겼죠. 무슨 친일파니 매국노니.. 그따위 평가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손기정 선수 아시죠? 일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에 금메달을 안겨주잖아요. 그래도 조선인들은 조선인이 왜놈들 보다 잘나서 조선인의 기상을 보여줬다고 떠받을었죠. 박정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박정희는 일본군으로 잘못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 하급장교로서  근무했으며 그의 비중은 크지 않았습니다.(만주국은 일본국과는 좀 다른 나라였죠. 뭐~ 괴뢰국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오족협화의 기치를 내세운 그런 나라였습니다.)
 
먼저  독립군 토벌 광복군 토벌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근거 없는 날조이고요. 천황 혈서 충성맹세 같은 것도 아무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특히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도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측에서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고, 김대중의 창씨개명이 도요다 다이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러한 정치공작도 쏙 하고 들어가버렸지요. 당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 80% 이상이 한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부친도 했었던 것이고요. 별로 친일이니 매국의 증표가 될 수는 없지요.

 

  그리고 5.16은 정변이 아니라, 명백한 혁명이고요. 당시 윤보선, 장면 정부는 무능과 부패의 절정을 달렸는데.. 박정희가 빈농의 아들인 것에 반해 윤보선은 친일명문벌열가문 출신이었고요. 장면도 역시 김구 선생의 지시로 반민특위가 작성한 친일파 살생부 268인 중에 한명으로 등재된 악질 친일파였죠. (박정희 해당없슴)

 4.19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진 이후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데... 비참한 민생은 내팽계치고 10번도 더 개각이 이뤄지죠. 이유는 바로 장관 자리 하나씩 해 먹으면 가문의 영광이요,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처럼 코드정치다, 보은인사다.. 하면서 전부 다 해 처먹었죠... 박정희가 5.16 혁명을 일으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합니다. 5.16으로 인하여 장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진짜 친일파 정권이 무너지게 된거죠. 그런데 왜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냐고요?

당시 4.19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회가 5.16 지지성명을 발표하죠. 그리고 장준하 선생께서 5.16은 4.19 정신을 이었다며 칭찬하게 되죠. 이처럼 학생, 대중, 지식인 너나 할 것 없이 5.16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4.19 정신의 계승이라 칭송했습니다. 군사정변??? 5.16때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대규모 교전도 없었죠. 그래서 5.16을 무혈혁명이라고 합니다. 즉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불순한 무리들은 5.16을 폄하하며..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후 혁명공약을 내걸어 모두 완수하고, 민정이양을 거쳐 직접 선거로 대통령직에 당선됩니다. 당시 서민이었던 박정희와, 친일벌열가문의 후예인 윤보선이 경합을 벌이는데.. 간발의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되게 되죠. 즉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박정희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통치설은 터무니 없는 억지이며 반박정희 세력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박대통령의 유가족인 박근혜씨의 증언을 올립니다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임종조차 못했던 자식으로서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께서 여한없이 눈을 감으셨으리라는 점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믿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여한이 없으리란 뜻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그 무렵 국가를 위한 자신의 설계를 거의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셨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끝은 우리 겨레의 5천년 한을 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떻게든 경제자립과 자주국방을 이루어 가난과 외침에 시달려온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의 조직적인 방해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추진 중이었으며, 우리가 핵을 개발함으로써 전쟁 억지력이 생겨 북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78년 9월26일 우리 힘으로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여 세계 일곱번째의 보유국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고, 그날 쓰신 일기를 보면 “자주국방과 조국근대화작업이 완성단계로 접어들었다. 흥분과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최규하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은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여러 번 “최총리가 하면 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분의 경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81년까지는 핵개발과 정부이양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오늘 우리나라는 혼란없이 선진국 대열에 섰을 것입니다."

 

 

--  후진국에서 경제건설과 민주화가 양립가능했겠는가? --

(산업화에 민주화를 동시 추진, 성공한 예는 없다)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서구국가들에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실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도 이들 국가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하거나 「선민주화, 후산업화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에 대해 선발 산업화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많은 후속국가들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 내지는 순차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편견이거나 도그마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참정권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영국도 산업화를 어느 정도 성숙시킨 연후에야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후속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의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지향형국갯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발전지향형 국가는 단순한 권위주의체제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국가가 사회 내의 제계급(지배 및 피지배계급 모두)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면서도(그 국가가) 발전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정책적 및 제도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뿐이다. 이런 특징을 갖춘 국가를 「발전지향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관찰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전의 예는 모두 그 국가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지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선산업화 정책은 정당했다

이렇게 볼 때 산업화의 초기 단계인 1960∼70년대, 특히 그 초두인 1960년대 전반의 한국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치는 병행추진이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박정희 체제의 가치 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고노동,저임금같은 노동권의 취약성과 환경권관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초기 산업개발 당시부터 개발 우선 정책집행 과정상 당면한 고노동 저임금 및 반환경적 요소를 용이하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쉽게 간과했고 넘어갔다면?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60년대 내수시장이 열약한 상태에서 수출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상태에서 기술도 없고 자본도 별로 없는 초기 개발 단계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분야는 상식적으로 많지 않고 선진국보다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제한적 선택일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겯제개발이 바로 노동자 억압으로 주장하는 지금 좌파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저노동 고임금과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천연자원과 산업자본의 취약성을 극복해 짧은 세월안에 산업화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선모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발산업국가도 후발국가도 산업화과정에서는 모두 고노동,저임금이었고 친환경적이지 못했다.  적절한 노동과 임금은 산업화가 어느정도 진척된 이후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국가의 노동복지정책 즉 국가환경정책으로 위상이 올라간 것이 그간의 세계사이며 환경권도 마찬가지이다.
더우기 경제개발시대 공무원 및 기업가들의 유착과 연결된 반노동권적 정책 집행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식 부재와 결여에서 파생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까지 모두 박정희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인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ㅅㅣ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몹시도 배고팠던 시절, 남북대치상황에서 안보불안도 컸던 시절.
경제건설을 통한 산업화 근대화가 이룩되고 나면 그 토양위에서 우람하고 튼튼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은 옳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과연 노동자 농민의 희생뿐인가?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이름 : 자유주의연대날짜 : 2005-04-28 10:34:36조회 : 81  

  파일 :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과 농촌·중소기업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소득 격차를 사회문제로 낳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처럼 쓰고 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29일 열리는 ‘교과서 포럼(상임대표 박효종)’의 ‘중·고등학교 경제 관련 교과서 이대로 좋은갗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교과서 서술이 객관적인 통계 수치를 무시한 오류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큰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한수기자 hslee@

 

 

-국내 진보좌익들이 펌하한 새마을운동 세계가 배운다.-

 

중국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배우라고 3년간 3만명의 공무원을 한국에 보낼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론 공무원 35만명을 한국에서 硏修연수받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엔 후진타오 주석 등 최고지도부가 31개 省성·市시 간부 200명과 일주일 合宿합숙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역사와 성공요인을 학습했다. 중국은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했지만 농민 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都도·農농격차로 고심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 새마을운동이 낙후한 농민·농업·농촌의 ‘3農농문제’를 극복해낼 정책 모델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의 농촌부흥운동을 배우기 위해 몽골,베트남,라오스,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가 우리 새마을운동을 배워가고 있다. 새마을 관련조직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연수받고 돌아간 각국 공무원과 농민이 160여개국 4만명에 이른다. 북한 김정일조차 새마을사업이 한국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바깥 시각은 이런데도 정작 나라 안에선 새마을운동이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농촌의 겉모양을 바꾸는 데 置重치중했다’고 쓴 근·현대사 교과서를 토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그 교과서가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대중의 열정을 끌어내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한’ 성공적 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중국의 開放개방과 발전 지향의 사회주의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한국 守舊수구 左派좌파의 눈엔 거꾸로 보인다는 말이다.

정부는 새마을운동 첫해인 1970년 3만5000개 마을에 335부대씩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마을길 넓히고 다리 세우고 창고를 지으라고 장려했다. 이듬해엔 성과가 좋았던 1만6000곳을 골라 시멘트와 철근을 추가로 나눠줬고 성과 없는 마을엔 지원을 끊었다. 경쟁을 통해 농민들의 마을 살리기 의욕을 북돋운 것이다. 국토균형발전이니 뭐니 해가며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라고 해서 곳곳에 국민 稅金세금만 뿌려대는 이 정권과는 달랐다.

중국이 우리에게서 배운 새마을정신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고 그걸 디딤돌 삼아 압도적 경제력으로 한국시장에 밀고 들어올 때 ‘새마을운동 깎아내리기’에 골몰했던 사람들은 모두 꽁무니를 내리고 시치미를 뗄 게 분명하다.


 

--누가 과연 민주화에 진정한 공헌자인가(무궁화) ---데일리안토론방

 

흔히 말하기를,

박정희는 독재자이고,

김영삼 김대중은 민주화 투사라고 부른다.

이거 완전히 새빨간 거짓 선동이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아세우면서,

자기들이 민주투사인양 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자들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살았었고,

내 눈으로 똑바로 박 대통령을 보았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살았었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 동네 이장일을 보았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시골 농번기가 되면

어김없이 시골 농촌에 내려 와서는

농부들과 함께 일하면서 막걸리를 즐기셨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어른들은 우리집에 모였었다.

그리고는 동네 어른들은

면장, 군수를 찿아다니면서

이번 농번기에 꼭 우리 마을에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자고 하였다.

당시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의

농촌부흥 운동으로 가난을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다.

만일, 박 대통령이 정말 독재자였다면,

과연 당시 농촌 농부들이 이토록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겠는가?

 

나는 1970년대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모대학에 다녔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중화학, 중공업이 집중 육성되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들은 세계 최하위 빈곤국가에서

우리가 중진국 진입이라는

희망과 꿈에 벅차 있었다.

대통령과 국민은 하나가 되어

꿈과 희망을 안고 열심히 일만 하였다.

 

자칭 민주화 투사들은 말하기를,

"70년대에 유신헌법은 유신독재체제"라고

비난하고 있다.이거 또한

거짓된 민중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유신헌법 체제 동의는

전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 하였다.

우리는 유신체제로 인해 더욱더 중화학, 중공업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진국 진입이라는 희망을 낳게 되었다.

우리는 80년대가 가장 호황기 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80년대에 꽃피운 시기는 박 대통령의

유신헌법 개정통과로 인한 경제개발 덕이었다.

 

만일 당시 유신헌법의 개정 통과가 불발로 끝나고,

자칭 민주화 투사란 분들이 집권 하였다면,

우리나라는 끔찍한 상황이

이미 일찌기 발생하였을 것이다.

 

70년대에 대학가는 연일 데모로 얼룩져 있었다.

여기에 선봉에 선 자가 김영삼, 김대중씨였고,

김대중씨가 특히 심했다.

김대중씨는 대학가 강단에 서서

당시 학생들에게 민중선동을

일으키면서 학생운동에 불을 놓았다.

당시 김대중씨의 수제자들이

현재 집권 열우당의 실세들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대학생들에게는 이들 데모만

주동하는 학생들을 너무 싫었다.

학교는 툭하면 휴강 하였다.

당시 모범 대학생들에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대학생들의 말을 빌려보자.

" 저 개XX들, 또 데모질이다"

"저 개XX들중에는 어떤놈들은 김일성 초상화 밑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책을 숨어서 몰래 본다고 하더라"

"저 개XX들 하고는 말도 하지 마라"

 

일반적으로 70년대는 민주화 투사가 독재자와

맞서 싸운 얼룩진 시기라고 교육을 하고있다.

이것은 철처히 오도된 잘못된 교육이다.

자칭 민주화 투사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는

자기들을 미화하기 위한 위장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나는 박 대통령 시절에

어린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내 눈으로 박 대통령을 똑바로 보았었고,

당시 상황을 진실되게 말하는 것뿐이다.

 

박 대통령은 절대로 독재자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우리나라를 부강한 국가로

이끈 훌륭한 대통령이시고,

우리 국민들을 절대로 억압하지 않았다.

단지, 당시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에 몰두하고 있을때,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으면서

민중선동을 일으키며 데모만

주동하였던 작자들만 탄압을 받았었다.

 

특하면 좌익들이 그땐 총칼로 사람들을 막
죽였다고 젊은애들을 속이지만
박정희가 살인마란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 사형언도 받은 숫자는 48명으로
1년에 3명이 체안된다.
전부 극악한 흉악범들 아니면
남한체제 전복을 기도한 역도들이였다

 

 

그렇다면 자칭 민주화 투사인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를 방만하게

운영하면서 IMF 사태를 초래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체제하에서,

IMF 조기졸업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미명하에,

외국자본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기업을 외국에

헐값으로 팔아 버렸다.

작금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IMF 체제하에 무려 170만명의 가장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 몰렸다.

한 가정이 4인임을 감안할 때 무려 700만명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 누가 이들의 아픔을 달래 줄 것인가.

무책임한 돌파리 의사가 주사나 약 처방을

과도하게 남발한 것이였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집권하면서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로 얼룩졌었다.

최근에는 국정원의 도청 비리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이들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민주투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부도나게 하였지만,

이 분은 반공이념이 투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안보는 불안하지 않고,

국민들이 그런데로 마음 졸이지 않고 살았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나라가 위기로

치달을 시 금융개혁 입법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야 대권주자를 비롯한

정치권이 개혁시도를 방해 하였다.

결국 우리나라는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당시 정치권은 썪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간첩 한마리도 안 잡고,

더구나 북한이 남한을 향해 뚫어놓은

땅꿀조차도 발견하지 않았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이 안보 불안으로 국민들이

너무나 고통을 겪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혹시 부정에 개입할지도 모르는

친인척을 엄중하게 감시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친형은 가난한 농부로 여생을 보냈고,

친 누님은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또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철저하게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침실 화장실에는

물을 절약하기 위해,

벽돌 한장을 놓고 살았다.

또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때 보니,

20년된 다 떨어진 혁띠와

손목시계를 차고 계셨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전국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가보니,

할머니들이 정화수 물 한그릇을 떠 놓고는

박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당시 전국에 농촌의 할머니들은 다 이랬다.

그래서 당시 일간지 신문에도

이런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씀하셨다.

"민주화는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잘 살게 될때

진정한 민주화가 성숙될 수가 있다"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나라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덕분에

선진국 진입을 꿈꿀수가 있었고,

이로인해 중상류층이 두터운 층을 이루게 되었다.

두터운 중상류층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히 민주화를

이룩할 수가 있게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이어지며서

우리나라는 나라경제가

힘을 잃으면서 중상류층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

중상류층의 몰락은

경제민주화를 몰락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정 민주화에 공헌한 분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란 말이더냐.

 

우리는 최소한 세상을 똑바로 알고 살자.

제발 거짓 선동꾼에  속지 말고 살자.

 

 

-누가 유신을 함부로 말하는가?--

 

현재 열우당과 그 추종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평가할 때 현재의 가치기준밖에 적용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가히 단세포적인 두뇌를 가진 집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가치관으로 평가하여 나약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현 세대들을 세뇌하려는 모리배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치가들이 '유신'을 악의 대명사처럼 폄하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신헌법'이란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을 총칼로 겁박해서 강제로 통과시킨 대악법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칭 '민주투사'라는 사람들은 '유신독재'란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유해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령, 60-70년대에 버스안에서 어떤 어르신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치자. 그 당시에는 유쾌하진 않았을 지 몰라도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젊은이가 '아저씨, 버스에서 담배피우시면 안됩니다'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용기있는 사람이다. 현재의 잣대로는 아무리 나이드신 어른이라도 버스안에서 담배피운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적 사실은 시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신통치는 독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독재'란 것은 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통치자가 강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좋은 예이다.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국민을 겁박하고, 불리한 지역에서는 투표를 방해하고,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1972년 11월에 실시되었다. 투표인명부에 등재된 투표인수는 15,676,395인 이었고 이중 91.9%에 해당하는 14,410,714인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며, 이중 찬성이 91.5%에 해당하는 13,186.559표로서 유신헌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세상에서 국민의 90%이상의 지지를 받은 정권에 대해 '독재'라고 매도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지 않을까? 집권후, 10년간 자유당 잔재를 청산하고 5000년 유산인 가난을 몰아내준 지도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모두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였더란 말인가?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부의 주도하에 산업전선에서 피땀흘려 일하며 세계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 칭송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 직업도 없이 민주화운동 한답시고 국가에 저항하고 감옥이나 들락거리든 사람들을 국민들은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자칭 '민주투사'란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거꾸로 물어보고 싶다.

물론 국민소득 1만불 시대인 현재의 상황에서는 유신통치와 같은 형태가 허용되기 어려울 것이란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재야운동가들 중에 인정받아야할 분도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을 받을려면 박정희 대통령과 그 당시 산업전선에서 묵묵히 일하셨던 분들을 먼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불행히도, 열우당과 민노당의 자칭 '민주투사'들은, 극소수에 속했던 자신들의 생각은 옳고 대다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틀렸다는 아집과, 피해의식에 따른 보복심리로 과거사 전체를 부정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들인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에겐 박대통령 시절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평가도 금기시 되어 있다.

요컨대, 현재의 잣대로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하려는 외눈박이들은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세월이 갈수록 그 당시에 사셨던 분들이 자꾸 돌아가셔서, 진실을 말해줄 분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점이 심히 유감스럽다. '유신'이란 것이 현재 정권을 잡은 모리배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헌정질서를 유린한 악이 아니라, 그 당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분명한 사실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용기있는 정치인이 한나라당에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90년대말 경제위기 때 재야운동권의 큰 어른이신 백기완 선생의 말씀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래도 박대통령은 나같은 사람은 핍박했어도 나라전체는 잘살게 해줬는데 지금 이놈의 정권은 뭐하는 집단인지 모르겠다.' 불행히도 권력에 눈이 먼 작금의 열우당 시종잡배들에겐 자신들이 가장 존경했던 어른의 말씀조차도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고 있다.

 


[펌] 박정희를 다시 생각하며...

 

저는 젊은 20대의 경제학을 전공한 여성입니다. 
태어날때 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 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말로 한국을 망친 챙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이었으므로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에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 이라는 단기간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활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친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 진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추천수2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