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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시작 – 살아가는 이유

손현지 |2009.06.19 02:03
조회 463 |추천 0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벨이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평소와 같이 문은 열렸지만 아버지는 왜 이렇게 늦게 여냐며 화를 내셨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머니는 말 없이 그런 아버지의 역정을 40년째 견뎌내고 있었다.

평소에도 화를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는 최근 할아버지의 간암 때문에 더 민감해 지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병 때문이라기 보단, 할아버지와의 의견차이 때문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병을 할머니 혼자 감당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효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려 했다. 하지만, 그 고집쟁이 늙은이는 절대 자신의 영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오늘이 바로 또 그 두 강퍅한 양반들의 고집씨름이 있던 날인 것이다. 보아하니 세상에서 가장 완고한 할아버지의 승리로 끝난 듯했다. 결국 간호라는 힘든 작업은 한 평생을 할아버지를 위해 인생을 바친 할머니의 덤이 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차에서 반찬통을 꺼내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아버지는 이 번에도 당신의 패배에 반찬 놓고 오는 걸 잊으신 거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새로운 반찬을 준비하셨고, 이번에는 내가 광주에 가야 하는 판국이었다.

 

“싫어! 내가 왜 또 가야 돼?”

                                                 

그러자 아버지의 벼락은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나를 내리쳤다.

 

“기집애가 가라면 가야지. 어디서 배워먹은……”

 

내가 반항하려 하자 어머니는 내게 눈치를 줬다.

 

“여자는 무조건 참는 거야.”

 

30년 넘게 내가 아버지나 남동생과 의견대립이 생기면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로부터 나온 개 철학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당신의 철학을 잘 지켜가고 있었고, 나도 그러길 바라셨다. 하지만 내 신념은 아니었다.

음식을 차에 싣고 광주로 내려가는 내 마음은 흐린 하늘 만큼이나 답답했던 나의 대학시절을 상기시켰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저녁 8시 전에는 반드시 집에 모두 들어와 있어야 했다. 가끔 오빠가 8시 전에 들어오지 않으면 나와 내 동생들은 완고한 아버지의 비난에 가까운 꾸중을 피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오빠만 혼내라고 대들었다. 물론 기집애가 큰 소리 낸다고 더 혼났을 뿐이다. 그런 집을 너무나 떠나고 싶었던 나는 일부러 대학을 할아버지 할머니가계신 광주로 갔다. 그곳이면 아버지가 허락할 것이었고, 최소한 조부모님이 내게 더 관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대쪽 같은 기운이 4년 동안 나를 더 숨막히게 할 수도 있다라는 가정을 하지 않은 건 나의 최대의 실수였다.

 

잠시 모교에 들러 내가 다니던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따닥 따닥 내리는 빗줄기와 커피에서 올라오는 김은, 비가 와도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커피를 마셨던 그때랑 똑 같았다.

 

할아버지 집은 다른 이웃들과 조금 떨어져 있었고, 고요했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집 마루에 누워있으면 가끔 세상이 멈춰버린 건 아닐까 잠시 의구심이 들다가도 파리가 나는 소리에 아직 세상이 살아 움직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용했다. 할아버지는 새벽부터 책상앞에서 책을 읽으셨다. 할머니는 절대 편리하지 않은 부엌에서 할아버지를 위한 따뜻한 아침을 준비하셨다. 가끔 밥이 맘에 안 드시면 그 노인네는, 여자의 본분을 다하지 못 했다며 할머니를 꾸짖곤 하셨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위해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 그의 세수를 도왔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젊잖게 차려 입으시고 동네 마실을 나가시거나, 뒷 뜰의 정원을 가꾸시면, 밥상을 치운 할머니는 마루를 걸레로 수십 번 닦으셨다. 유난히 깨끗한 마루를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마루가 맘에 안 드시면 할머니를 또 꾸중하셨다. 점심 때가 되면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위한 음식을 하셨다. 아침에 했던 밥을 다시 점심, 또는 저녁 밥상에 올리는 경우는 없으셨다. 찬밥은 언제나 할머니 몫이었고, 나 조차 찬밥을 먹이지 않으셨다.

 

당연히 할아버지는 나를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셨다. 나는 항상 그들보다 늦게 일어났으며, 세세한 집안 일에 서툴었을 뿐아니라, 잘 하지도 않았다. 가끔 학교에서 친구들과 술이라도 한잔 하고 들어오는 날에는 문을 걸어 잠그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리시다 문을 열어주는 할머니가 나올 때까지 어둠 속에서 떨어야만 했다. 내가 대학교 4년 내내 장학금을 탄 건 오로지 집에 들어가기 싫게 만든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할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처음 방문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상당히 난감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정이 없으셨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맞으셨고, 별로 질문도 안 하셨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별 대화는 없었고, 그저 달라진 게 있다면 할머니의 일이 더 많아졌다는 것 뿐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더 청결에 신경써야 했고, 음식도 더 자주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병 때문에 그렇다손 치지만, 할머니는 간호 때문에 더 많이 늙으셨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서울로 모시고 싶었던 아버지의 노여움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조금도 너그럽지 않은 할아버지가 얄미웠다.

 

몇 일 후, 우리 가족 모두는 광주 병원에 가야만 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였다. 후진 하던 버스가 작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를 미쳐 보지 못하고 밀어버린 것이다. 몸이 부서지는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그 사고 이후로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병실에서 아버지는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할아버지를 다그쳤다. 그러나 그 노인네는 죽어도 자신의 은신처를 떠나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 말고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성격 급한 아버지의 혈압만 올라갈 뿐이었다. 병실 문을 박차고 나간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할아버지께 간병인이라도 부르자고 간청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마디로 됐다 하셨다.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런 노인네를 보니 내 혈압도 같이 올라갔다. 도대체 죽을 날 받아놓은 양반이 무슨 배짱으로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버티겠다는 것인가? 평생 당신 아내에게 자애로운 적이나 있으셨던 양반이었는가?

난 더 이상 고집쟁이 할아버지 상황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여자라서 참아야 하는 어머니만 할아버지 댁을 방문할 뿐이었다.

 

엄마나 할머니처럼 살 진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나였지만, 시댁 문제로 말라가는 엄마를 보니 모른 척 할 순 없어 이번 한번은 내가 광주에 내려가기로 했다.

조부모댁 녹슨 대문을 통해 보이는 죽어가는 화초들을 보니 더욱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은 스산했다. 언제나 번들거렸던 마루는 몇 일을 닦지 않은 것처럼 불투명했다. 낡은 부엌에서 물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있었다. 서먹한 인사라도 할 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터벅 터벅 옮기다 발을 멈췄다. 그 곳에서 할머니 목욕을 시키는 할아버지의 한 숨이 새어 나왔다.

 

“나 죽으면 이거 누가 건사하나…”

 

할머니는 뭐가 그리 좋은 지 물장구만 쳤고 할아버지는 이 말을 열 번도 넘게 반복하고 계셨다.

나는 간단히 저녁을 준비했다. 할머니의 식사를 돕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밥을 받아먹는 할머니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소녀처럼 잠든 할머니의 이부자리를 정리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배설물이 묻은 옷 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가셨다. 내가 빨겠다며 손을 뻗었으나 그는 다시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됐다 하셨다. 빨래를 하는 할아버지의 팔뚝이 앙상했다.

 

머지않아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했던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의 부음을 먼저 들었다. 할아버지를 위해 준비했던 장례식이 할머니를 위해 이루어졌다. 할머니는 평생을 무슨 재미로 사셨을까? 할머니가 그토록 즐겁게 웃은 건 치매가 걸린 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할머니 장례식에서 할아버지는 다시 양쪽 눈썹을 꼿꼿하게 치켜 올리신 채로 미동 조차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 장례식이 있은 일주일 뒤에 할아버지는 쓰러지셨고, 곧 우리 가족은 또 한번의 장례식을 치뤄야만 했다.

 (Marrochy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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