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라운드업 작전과 횡성전투
정보 획득능력 작전 성패 좌우 교훈 남겨
적의 신정공세(1950. 12. 31~51. 1. 8) 당시 서울을 중공군에 넘겨 주고 평택~안성~삼척선으로 물러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은 1월 15일부터 평택에서 수원까지 적의 패치와 규모를 탐색할 목적의 작전인 울프하운드(Wolfhound) 작전을, 그리고 25일부터는 좀 더 확대된 규모의 선더볼트(Thunderbolt) 작전을 전개했다.
보전포협동팀과 공군 화력을 잘 활용한 이 작전에서 유엔군은 서부전선에서 피로와 보급 부족에 허덕이는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면서 수원까지 순조롭게 진출했다. 미 제1·9군단은 이 작전으로 2월 초까지 인천·김포를 되찾고, 퇴촌 부근까지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리지웨이 중장은 한강 남쪽에서 중공군 제50군·38군, 북한군 제1군단에 대해 압박을 가하는 한편 적의 측방을 위협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라운드업(Round Up)’ 작전이라고 명명된 것으로, 아몬드 소장의 제10군단(국군 8·5사단, 미 2·7사단)으로 하여금 횡성으로부터 북한군 제5군단을 공격해 홍천을 점령함으로써 서울 동측 방면으로 포위를 꾀해 적으로 하여금 서울을 포기케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작전을 발의한 아몬드 소장은 2월 5일 아침부터 라운드업 작전을 발동시켜 국군 제8사단이 주공으로 홍천을 포위공격하게 하고 그 우측에서는 제5사단이 병행 공격하도록 했다. 후방에서는 미 제2사단이 포병·전차팀으로 이 공격을 지원토록 했다. 라운드업 작전은 ‘진취적·독창적이고 대담한’ 작전이었지만 위험성을 내포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아몬드 소장은 거의 매일 국군 제8사단을 방문해 진격을 독촉했다. 제8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2월 9일 전방의 북한군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고 일부 중공군이 출현함으로써 좀 더 신중하게 진격작전을 취하겠다고 건의했으나, 아몬드 소장은 필요한 경우 모든 예비 연대와 병력을 전방에 투입해서라도 진격 속도를 높이고자 했다.
최 준장은 홍천을 좌우 측에서 포위한다는 아몬드 소장의 작전개념을 실현하기 위해 예비대 없이 예하 3개 연대(16·10·21연대)를 모두 전선에 투입해 진격하게 했다. 그러나 연대들을 넓게 펼쳐 진출시키는 바람에 연대들 간에 수킬로 미터의 간격이 형성됐다.
중공군총사령관 팽덕회는 2월 초에 서울 북방에 있던 13병단 주력(제39·40·66의 총 7개 사단)을 은밀히 기동시켜 홍천 쪽으로 돌출한 국군 제8사단을 포위 섬멸함으로써 횡성·원주를 점령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국군 제8사단 연대들의 진격 상황을 훤히 알고 있었고 그 간격으로 침투해 정면과 후방에서 기습 타격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미 제8·10군단 정보계통에서는 홍천 이남에 중공군 대병력이 들어와 집결해 있으리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월 11일 밤에 시작된 중공군 공세는 완전한 기습이었다. 제8사단의 각 연대는 공격 개시 후 2시간을 버티다가 고립돼 소부대별로 분산됐다. 다음날 날이 새기 전부터 사단장은 예하 연대들의 상황에 완전히 깜깜했다. 후방의 미군 지원팀들로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1만여 명을 상실하고 많은 장비를 잃었다.
이 전투는 정보획득 노력이 작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군의 정보 부족과 적의 정보 획득 능력은 승패에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위기 시 군기의 중요성이다. 당시 제8사단은 불과 10일간의 훈련 후 부대에 편입된 신병들이 많아 적의 기습에 쉽게 분산됐다.
비록 5대1의 수적 열세의 불리함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공포에 사로잡힌 제8사단 부대들은 너무 쉽게 지휘계통이 붕괴됐다. 장병들이 많은 무전기를 방치하고 후퇴해 사단사령부와 연대 간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됐다. 횡성의 참사는 위기 시에도 군기를 유지하고 지휘·통신을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군기, 부대의 응집력, 지휘통신은 군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김광수 육군사관학교 전쟁사 교수>
2009.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