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스포츠의 존립 근거는 팬이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처럼 들릴 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명제는 한국 축구의 현실에서 '참'이 아닌 '거짓'이다. 스님을 버려두고 절이 떠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이 땅에서 팬은 프로 스포츠의 구경꾼 정도로 과소평가 되고 있다. 자생적 축구 클럽이 프로화된 유럽과 달리 대기업 주도로 만들어진 기업 구단이 대세를 이룬 국내 프로 축구 환경에서 팬들은 늘 푸대접을 받아왔다.
부천FC 1995의 등장은 그런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주도가 아닌 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클럽을 창단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많지 않은 유쾌한 '사건'이다. 이는 또 구단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미래의 가치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팬들이 늘 배제되었던 기존 축구단의 전례를 온전히 벗어던진 출발이라는 점에서도 '한국 축구의 신기원'이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기념비적 사건이다. 이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 구단과 오는 18일 친선 경기를 갖는 것 또한 매우 의미있는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프로 축구단의 존재 이유는 축구 경기를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감독과 선수라는 전문 직업인이 필요하고, 그들을 고용하고 팀을 운영하려면 돈을 벌어야만 한다. 경기 입장권을 팔고, TV중계권을 판매하고, 스폰서와 머천다이징에 공을 들이며 때로는 투자자를 모집하는 각종 사업은 결국 축구단의 존립을 위한 매우 기본적인 업무인 셈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업은 '팬'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일들이다. 경기장을 찾고, TV 채널을 고정하며, 선수와 감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축구단의 유니폼을 사 입어주는 팬들. 이들이 없다면 축구단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손님 없는 식당이 문을 닫는 것처럼 팬이 없는 프로 스포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손님이 왕'이란 말은 '팬이 왕'이라는 표현으로 바꿔도 말이 된다. 그래서 프로 축구와 프로 축구단의 존립 근거가 팬이라는 문장은 이 경우 지극히 현실적인 명제가 된다.
K-리그의 힘든 출발, 힘겨운 성장
하지만, K-리그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예로부터 학원 축구 중심의 클럽(구락부)이나 기업 소속 운동부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정작 프로 리그의 출범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고 여기에 참여한 팀들은 모두 신생 구단이었다. 정부가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해 만들어낸 리그는 거대 자본에 소속된 '부서' 구단들의 주도로 운영됐다. 이들은 모기업에서 할당한 예산을 정해진 기간 내에 '소비'하면 되었기에 별다른 수입원을 애써 찾지 않았고, 자연히 관중보다 모기업을 위한 운영에 천착했다. 따라서, '팬'은 프로 리그와 프로 구단 운영의 필수 요소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이후 '서포터스'로 조직화된 적극적 팬들은 때로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연고지'에 대한 개념도 뚜렷하지 않았다.
부천도 그렇게 축구단을 잃어버렸다. K-리그 최고의 서포터즈를 자처하던 부천의 서포터즈 '헤르메스'는 순식간에 존재의 위기를 맞이한다. 다른 팀간의 경기장을 찾아 억울함을 호소하고, A매치 경기장 안팎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 모 기업의 행위를 규탄도 해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들 부천 축구와 헤르메스의 존재가 그렇게 사라지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부천 서포터스 헤르메스는 이대로 무릎 꿇지 않았다. 기업이 철수한 공터에 모여 앉은 헤르메스는 기업 구단이 버려둔 이 곳에 시민 구단의 씨앗을 뿌리기로 결심한다. 2007년 12월 1일, K3리그 출범을 앞두고 정식 창단한 부천FC의 등장은 이들이 1년 여간 절치부심한 결과이자 한국 축구의 신기원이 열린 순간이다.
팬 주도로 클럽이 만들어진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대부분 대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주도로 축구단이 창단한 국내에서 부천FC의 창단은 그 자체로 이미 혁신적인 성과다. 이것은 팬과 클럽이 태생적으로 한 몸일 수 밖에 없는 축구단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사실, K-리그 구단들이 팬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팀들은 폐쇄적인 운영과 모기업 의존적 구조를 유지하며 '축구 클럽'이 아닌 '기업 구단'의 면모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이미지를 중시하고 모기업의 지원금에 의지하며 지자체 단체장들의 기침 한 번에 팀 존립이 위협받는 환경이 팬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창단 2년차인 부천FC의 현황은 아직 초라하다. 서른 명이 넘는 선수단은 야식 배달원, 헬스 트레이너, 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본업을 가진 '연봉 0원'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른바 '주경야축', 즉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차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축구를 통해 버는 수입은 출전수당으로 받는 몇 십 만원이 전부다. 하지만, 부천FC는 오히려 낙관적이다. 1천 명이 넘는 유료 관중은 많지 않은 숫자지만 일부 K-리그 팀들의 유료 관중 수와 비교하면 도리어 기적적인 수준이다. 스폰서십 계약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다. '다음', 'SK에너지', '자생한방병원' 등 6개의 기업체가 현금과 현물 후원 업체로 나섰다. 지역 업체들의 적극적 지원도 눈에 띈다. 덕분에 지난 해 부천FC는 8천만원의 흑자를 냈다. 수 만 명 관중이 드나든다는 K-리그에서도 달성할 수 없는 놀라운 성과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부천FC의 신동민 마케팅이사에 따르면 유료 관중 3,000명을 달성해야 장기적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K3에서 머물 때의 이야기다. 승강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내셔널리그를 거쳐 K-리그로 복귀하게 된다면 현재의 재정으로는 1년 운영도 어림없는 소리다. 그래도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늘 즐거운 마음으로 경기장에 오르는 선수들과 무보수 자원봉사로 팀의 한 경기 한 경기를 밀고 끄는 서포터스들의 마음 속에는 같은 꿈이 자리하고 있다. 2017년까지의 팀 운영 계획을 짜둔 '10년 마스터 플랜'은 당장의 어려움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보물지도와 같다. 10년 안에 K-리그로 복귀하겠다는 부천FC의 꿈은 멀고도 험난해 보이지만, '팬들'의, '팬들'에 의한, '팬들'을 위한 팀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기업 구단과 다른 출발점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부천FC의 도전은 그래서 한국 축구의 새로운 발견이자 희망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