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마무리 투수 임창용이 일본 프로야구 팬들이 투표로 뽑는 올스타에 선발됐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로서 팬투표로 올스타가 된 경우는 임창용이 처음이다. 선동열과 이승엽도 올스타에 뽑힌 적이 있으나 모두 감독 추천선수 자격이었다. 임창용은 시즌 초반 30경기에서 한 점도 내주지 않는 짠물 피칭으로 평균자책점 0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면서 일본 팬들 사이에서는 '미스터 제로'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그의 맹활약은 미국 프로야구(메이저리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임창용(33). 2009년은 그를 재평가하는 시기다. 야구 팬들은 임창용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인식하고 있다. '반항아' 또는 '풍운아'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1등이 되지 못했던 최고 투수로 기억할 수도 있겠다. '국보투수' 선동열, '국민타자' 이승엽과 함께 연상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쉽게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타협에 서투르다. 말수도 적다. 게다가 열 번 중 한 번의 실패가 크게 느껴지는 마무리투수다. 본의 아니게 원망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남자다.
또 하나의 '욘사마'
지난달 29일 일본야구기구(NPB)는 올스타전(24, 25일)에 출장하는 선수 명단을 발표했다. 임창용은 센트럴리그 마무리투수 부문에서 29만9835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팬 투표로 뽑혀 일본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최초의 한국인 선수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일본 올스타 무대를 밟은 선수는 지금까지 네 명이다. 선동열(1997년 주니치), 조성민(98년 요미우리), 구대성(2001년 오릭스), 이승엽(2005년 지바 롯데·2006년 요미우리) 등이다. 이들은 모두 팬 투표가 아닌 감독 추천을 받아 올스타전에 나섰다.
임창용이 지난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서 일본 진출 후 첫 세이브를 올린 뒤 동료 선수의 환영을 받고 있다. 왼쪽으로 1루 주자로 나가 있던 이승엽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고 있다. 중앙포토
선동열과 이승엽은 일본 진출 2년째부터 실력을 발휘했지만 최고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외국인 선수이기 때문이다. 임창용은 이번 투표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후지카와 규지(한신), 올해 센트럴리그 세이브 1위 나가카와 가쓰히로(히로시마)를 제쳤다. 양 리그 팬 투표 1위에 뽑힌 23명 중 임창용은 유일한 외국인 선수다.
일본은 임창용이 처음 등장한 지난해부터 큰 호기심을 보였다. 그가 지난해 3월 30일 요미우리전에서 최고 시속 156㎞ 광속구를 앞세워 첫 세이브를 기록하자 다음날 일본 신문들은 '충격적인 일본 데뷔전'이라며 흥분했다. 특히 스포츠닛폰은 '야쿠르트의 욘사마(ヨン樣)'라는 헤드라인을 뽑기도 했다.
임창용은 지난해 1승5패33세이브, 평균 자책점 3.00을 기록하며 정상급 마무리로 활약했다. 올해는 4일 현재까지 개막 후 31경기에서 2승무패19세이브(리그 3위)를 기록하는 동안 자책점을 1점도 내주지 않았다. 무려 3개월 동안 평균 자책점 0.00을 기록하며 '미스터 제로'라는 별명이 붙었다.
임창용은 5월 15, 16일 한신전에서 시속 160㎞ 광속구를 연달아 던져 열도를 놀라게 했다. 요미우리 외국인 투수 마크 크룬이 기록한 162㎞에 이은 일본 역대 2위 스피드다. 동양인 투수가, 사이드암 폼에서 뿜어 내는 마구에 일본은 열광하고 있다.
일본 닛칸스포츠의 지바 노부히로 기자는 “임창용은 일본에서 볼 수 없는 투수다. 독특한 투구 폼에서 엄청난 힘이 나온다. 무조건 정면승부를 한다. 마운드에 섰을 때의 침착성은 그만이 아니라 팀 전체를 강해 보이도록 한다. 그만의 카리스마다. 임창용으로 인해 한국 선수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국내 무대선 고집과 갈등의 연속
임창용은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 대표팀의 뒷문을 철통같이 지켰다. 그러나 일본과의 결승전 연장 10회 벤치 사인과 달리 스즈키 이치로와 정면승부를 하다 결승타를 허용했다.
세계 최고 무대의 결승전이었다. 상대는 일본이었다. 타자는 3년 전 1회 대회 때부터 앙숙이었던 이치로였다. 기적 같은 우승을 바랐던 팬들의 염원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실투 하나로 임창용은 원망을 한 몸에 받았다. 이때 '이치로를 피하라는 벤치 사인을 임창용이 무시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국내 몇몇 지도자는 “임창용이 고집을 피우며 정면승부를 했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김인식 WBC 대표팀 감독이 “공을 확실히 빼라고 지시하지 않은 벤치의 잘못”이라고 해명했음에도 '사인 무시'는 사실처럼 굳어졌다.
임창용은 항상 그랬다. 기질 때문인지, 혹은 불운 탓인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계약 문제로 구단과 수 차례 대립했고, 해외 진출을 시도할 때마다 말썽이 일었다. 김응용 삼성 사장, 선동열 삼성 감독과 그리 원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항상 어려운 싸움을 하면서도 구구절절 말을 하지는 않았다.
광주진흥고를 95년 졸업한 임창용은 계약금 3000만원을 받고 해태에 입단, 첫해를 대부분 2군에서 보냈다. 엘리트는 아니었다. 혹독한 훈련이 싫어 툭하면 숙소를 빠져나간 문제아에 가까운 선수였다.
재능만큼은 특별했다. 임창용은 97년 14승8패26세이브를 기록하며 해태의 마지막 우승에 공헌했다. 98년엔 22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구원왕(34세이브)에 올랐다. 폭풍 같은 강속구는 선동열 이후 최고의 구위라는 찬사를 듣게 했다.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99년에는 13승4패38세이브를 기록했고, 마무리로서 규정 이닝을 채우며 평균 자책점 1위(2.14)에 등극했다. 당대 최고 투구를 했지만 정규 시즌 때 무리한 탓에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무너져 원망을 듣기도 했다.
31세에 100승-100세이브 대기록
임창용은 국내에서 뛴 13년 동안 통산 534경기에서 104승66패168세이브, 평균 자책점 3.25를 기록했다. 통산 100승-100세이브는 선동열·김용수·송진우·임창용만 해낸 대기록이다. 2007년 그의 나이 31세까지 세운 기록이 이렇다.
삼성에서 마무리와 선발을 오갔기 때문에 기록이 분산됐다. 97~99년 마무리로서 3년 연속 100이닝 이상을 던졌다. 혹사에 가까울 만큼 많은 등판을 한 탓에 기록으로 그의 위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기록보다는 몇 가지 사건으로 그를 설명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임창용이 98년 시즌 뒤 삼성으로 트레이드될 때 상대가 양준혁(삼성)·황두성(히어로즈)·곽채진(은퇴) 등이었다. 삼성은 임창용을 얻기 위해 특급 타자 양준혁과 수준급 투수 2명을 얹었고, 여기에 현금 20억원을 따로 더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야구 사상 최대 규모의 트레이드였다.
호랑이 같은 김응용 삼성 사장이 유일하게 통제하지 못한 선수도 임창용이다. 해태와 삼성에서 총 9년간 함께 생활하는 동안 임창용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김 사장의 절대권력을 거부하고 강판 지시를 어긴, 거의 유일한 선수였다. 선동열 감독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항명은 마운드에서 더 던지겠다는 시위였다. 등판 지시를 어긴 적은 없었다.
삼성 시절 임창용은 친구이자 라이벌인 이승엽보다 많은 연봉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팀 공헌도는 이승엽 못지않았음에도 그랬다. 마무리투수인 탓도 있었고, 구단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삼성은 2005년 임창용과 프리 에이전트(FA) 계약을 할 때 10승을 거두지 못하면 연봉 5억원 중 2억원을 반납하도록 했다. 구단과 사이가 좋았다면 이런 계약이 이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보너스가 연봉의 두세 배
2007년 겨울. 임창용은 삼성 구단을 찾아가 “일본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삼성과의 계약 때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 해외 진출을 원하면 허락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억지 부탁은 아니었다.
구단 반응은 심드렁했다. 임창용은 2001, 2002, 2004 시즌 뒤 해외 진출을 시도했지만 무산된 바 있었다. 게다가 그는 2005년 말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2년간 6승밖에 올리지 못했다. “갈 테면 가라”고 했더니 며칠 뒤 일본 진출을 발표했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도 난타 당한, 수술 경력까지 있는 임창용을 데려간 팀은 야쿠르트였다. 조건은 더욱 놀라웠다. 연봉 30만 달러. 전년도 한국에서 받은 연봉(5억원)보다 낮았다. 다른 선수들이 일본에 진출했을 때 받은 첫해 연봉(최소 8000만 엔~최대 2억 엔)과 비교할 수 없는 액수였다.
임창용은 미련 없이 떠났다. 예전처럼 조건을 따지거나,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장대 위에 올라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는 한 번이 아니라고 들었다. 정체된 나를 깨우고 싶었다”며 일본 진출 배경을 설명했다.
임창용은 대한해협을 건넌 지 1년여 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올스타 1위에 뽑혔다. 그는 진작 이런 활약을 펼칠 만한 선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그에게 무리한 투구를 요구했고, 힘이 떨어지면 얻어맞았다. 그는 우직하게 마운드에 오르다 팔꿈치가 상했다. 임창용은 새로 야구를 시작하고 싶었다. 모험, 또는 도박으로 보이는 길을 가는 데도 망설이지 않았다. 야쿠르트는 그에게 꼭 필요한 1이닝만 맡겼다. 수술 후유증을 떨치고 세심한 관리를 받자 임창용은 예전 공을 되찾았다. 고난의 세월이 선물한 날카로운 변화구와 정확한 제구력은 그의 파워 피칭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만 32세에 시작한 도전은 달콤한 열매를 맺고 있다. 임창용은 이미 연봉보다 두세 배 많은 보너스를 받았다. 일본 명문 팀은 물론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스카우트 공세 또한 뜨겁다. 손에 쥔 것들을 버릴 각오를 하자 더 큰 것들이 모여들었다. 예전에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들이다. 이 남자가 사는 법은 이렇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