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내리던 어제 오후.
계절학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1호선 전철 속에서 <아비정전>을 보았다.
내 기억에 어릴 적 어딘가에서 이 영화를 본 것 같다.
아마 그 당시에는 이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루한 그림책 보듯이 봤을 것이다.
그때는 이 영화를 이해할 만큼의 정신수준이 안되었고, 미안한 마음에 소리없는 기약을 하며 영화를 보았다.
나는 오늘에서야 그 기약을 지키게 되었고, 그 날이 내가 좋아하고, 영화의 주 배경인 비 내리는 날이었다.
"어젯밤 꿈에 당신 본 적 없어요."
"물론이지. 한숨도 못 잤을테니까."
아비는 극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에게 관심을 보이고, 수리진은 경계하면서도 싫진 않다.
지속되는 아비의 작업에 마음을 준 수리진은 아비와 사귀게 되고 결혼을 원하지만, 아비는 결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아비는 수리진에게 아픈 상처만 주고,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한다.
아비를 너무 사랑했던 수리진은 아비의 이별통보로 인하여 극복하기 힘든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1분전 당신과 여기 같이 있고, 당신 덕분에 난 항상 이 순간을 기억하겠군요."
수리진과 헤어진 뒤 새로운 여자친구 루루를 만난 아비.
청순하고 순진한 수리진과 달리, 루루는 털털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이다.
아비와 동거하게 된 루루는 아비의 삶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만, 아비는 그런 루루를 의식적으로 밀어낸다.
루루는 그런 아비의 행동에도 끝까지 아비를 사랑한다.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홍콩 영화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왕가위 감독이 한창 절정기에 뜬금(?)없는 예술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화에 의하면 배우 캐스팅만 보고 액션영화인 줄 착각했다가 영화관에 간 관객들이 영화표를 환불해 달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원래는 2편을 제작하기 위해 홍보차 영화 마지막 부분에 양조위가 등장하지만, 흥행실패로 인해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존의 왕가위 감독 영화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에게 있어서 상당히 의미 있는 영화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시작으로 <동사서독>,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 같은 명작들이 그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사랑의 감정은 순간에 결정된다.
1분, 아니 1초 그 이하의 시간에 묘한 감정은 교차되고 알 수 없고, 평소에 느끼지 못한 감정에 마음이 흔들리고 몸이 이끌린다. 서로가 느낀다면 사랑이 되지만, 한 명만 느끼면 상대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기까지 엄청난 노력과 인내,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아비는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면서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고 민첩했지만 철저히 독신주의다. 그래서 순진하고 소극적인 여자를 만나든, 털털하고 적극적인 여자를 만나든 아비의 감정은 크게 변화가 없다.
아비가 두 여자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이별통보를 하자, 두 여자 모두 힘들어 한다.
한 여자는 지고지순한 가슴앓이와 고통 속에서 보내면서 현실을 극복하려하고,
한 여자는 아비의 이별통보를 인정할 수 없어서, 필리핀으로 떠나버린 아비를 만나기 위해 필리핀까지 간다.
그리고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혼자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된 두 남자는, 연민의 감정을 갖게 한 두 여자의 행동을 각각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감정은 순간이지만, 그 감정은 오랫동안, 간혹 영원히 지속된다.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때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여자를 8년간 좋아했었다.
초등학생이 무슨 사랑의 감정이 있겠냐만은 내가 8년이라는 시간을 셀 정도면 분명하고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다른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순간의 감정은 나를 8년이라는 시간동안 사랑의 장님으로 만들었고, 멀어진 눈을 되찾기 위해 그 사랑을 그녀로부터 원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때부터 나의 가슴앓이는 시작되었고 너무 힘들었다.
8년이 시간이 흐른 뒤, 내가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을 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 는 의미를 아는 남자가 되었다. 난 가끔 그녀에게 감사의 메일을 보내고, 고맙게도 답장을 보내준다.
사랑에 눈 먼자만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단, 사랑이 끝나든 계속되든, 엄청난 고통과 약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병도 그 사랑과 함께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행복하고 고통스럽지만 영원히 아름답다.
요즘은 엄청난 자본과 인기스타 마케팅으로 얼룩진 최신 영화들보다,
삶과 사랑의 의미를 진지하게 그려낸 오래된 영화들이 그립다.
낡은 필름 속에는 단순한 진리지만 놓쳐서는 안되는 것들이 숨겨져 있다.
빠른 몽타주 기법과 특이한 클로즈업으로 아시아 액션영화계를 평정했던 왕가위 감독의 첫 멜로물은,
뒤늦게 그의 영화를 이해한 사람들에게 재평가를 받아 역작이 되었다.
지난번에 내가 <패왕별희>를 리뷰하면서 그의 그리움으로 토해냈듯이,
장국영은 비오는 날이면 무척이나 그리운 사람이다.
<첨밀밀>, <화양연화>의 장만옥의 젊은 시절 청순했던 미모와 자태를 영화에서 보니 마음이 흥분된다.
이제는 홍콩 영화계의 레전드가 된 유덕화는 그의 연기력이 결코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양조위의 연인 유가령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보는 이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한 때 중국의 영화계의 4대 천왕으로 불려진 장학우는 이번 영화에서도 진지하든, 코믹하든 여자에게 사랑받지 못한 비운의 남자가 되었다.
어제 전철 안에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전철 밖으로는 비가 내렸다.
마치 1960년 4월에 내렸던 비처럼.. 순간의 감정은 영원히 남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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